본 이미지는 페이퍼의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음을 밝힙니다. 요새 알콩달콩질이 많이 줄어서. 옥찌의 체크무늬 원피스가 너무 예뻤던 날.
친척들 모임에서 금기란 없다. 직장이 없으면 없는대로 결혼을 못하면 못하는대로 표적물은 민망함이 없는 무생물처럼 취급이 된다.
어제 친척 모임에서 모임의 성격에 딱 들어맞는건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나였다. 노총각 친척 오빠까지 이번에 결혼을 해버리니 여자인데다 나이가 차가는 나야말로 아무 때나 나타나는 화제의 핵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요새 난 살까지 쪄버린 상태다.
얼른 결혼해야지부터 돈을 벌어놓고 시집을 가야한다. 자기는 모르겠지만 그런게 알고 보면 부모한테 불효하는 거란 것까지. 너무 뻔해서 하품이 나올만도한데 당할때마다 어찌나 전투 의지를 치솟게 하는지 지치지도 않고 맞대응을 했다. 하나같이 결혼을 못하더니 애가 독해지나부다란 표정이었지만, 지금 그런거 신경쓰게 생겼어? 잔뜩 악을 품고 다신 모임이고 뭐고 안 나온다고 선포까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먹을게 다 떨어져서였지만.
부엌에 가보았다. 그곳에선 새언니랑 친척 언니, 그러니까 친척 모임의 젊은피들이 동동주를 마시고 있었다. 동동주. 어화동동. 동동주에 신 김치를 살짝 싼 머릿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웬만하면 끼고 싶지 않던 모임에 어거지로 들어앉은게 일테면 앉으면 술이신 아빠를 대신한 고작 대리운전 때문이었기 때문에 꿈도 못꿀 일이었다.
젊은피들과 이런저런 얘기 끝에 왜 그리들 결혼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둥, 난 결혼이 무섭다는둥, 맨날 뻔한 소리만 한다는둥 아까 못했던 말들의 2절을 읊어대고 있는데 새언니가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결혼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면서.
-그치그치.
그러자 옆에서,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되지만 그동안 노총각 범버꾸 행세 하느라 수많은 걱정과 염려를 한 몸에 받아왔던 오빠가 한마디 했다.
-나도 한 이년동안은 명절 때 집에 안 내려왔잖아.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오호.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었구나. 새언니는 한술 더 떴다.
-아가씨. 아예 거짓말을 해버려.
-어떻게?
-남자친구 있다고 하는 거야.
-에이. 그럼 언제 결혼할거냐, 뭐하는 사람이냐, 집안은 어떤지 꼬치꼬치 물을거 아냐.
-사업 준비중이라고해. 자리가 잡혀야 결혼을 할거 같다. 이렇게 둘러대는거지. 아니면 공부한대던가.
-그래서?
-그런 다음에 한 몇 년 지나서 둘이 결혼하려니 하고 있으면 그때 뻥터트리는거야.
-뭘?
-사업 말아먹어서 결혼이 무기한으로 연기됐다고.
-그런 다음엔?
그러자 아구탕의 살을 초장에 살짝 찍어먹던 친척 오빠가 거들었다.
-그때는 나이도 있고 하니까 유부남으로 갈아타면 되지.
허허. 그들의 터무니없는 말이 그 시간의 피크였고, 뒷맛이 알싸한게 오래오래 남을 것 같았지만 그것보다 내 맘을 동동주 우린 물처럼 맹탕하게 만든건 우리, 별로 다를게 없다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결혼해라, 잘 살아라, 애는 언제 낳느냐, 애가 공부는 잘 하느냐. 나는 죽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말들이 나이 들면서 의식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나올 말들이 되고, 정말 하고 싶은 일보다는 사는 것에 관성이 붙어 어쩌면 그냥 살아가게 될지도 모를 어느 날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지 않다는 느낌. 언니와 오빠가 내 나이였을 때 나와 마찬가지로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해 나만의 공간, 나만의 것들을 자꾸 찾게 되었을지도 몰랐겠단 상상. 때가 묻는게 아니라 세월의 움이 자라나고, 그 안에서 유머를 잃지 않았구나란 이 정도 나이 먹어서 느끼는 풋내나는 동질감.
극악을 떨 필요도 어깃장을 놓을 이유도 없었다. 잠깐 웃어줘도 좋고, 딴청을 피워도 됐다. 어른들은 내 안에 어떤 싹이 있는지 다 알고 계시니까. 나는 가끔 우스개를 늘어놓거나 남자 앞에선 죽었다깨나도 안 나오는 애교로 어른들의 뭉친 근육을 푸는 수 밖에.
그런데 이게 또 내 전문이니까 부지런히 전문 분야에 몰입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