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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건 정말 내 것일까? 파주를 본 후 리뷰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무척 좋았던 느낌과 감상을 논리적이고 세심한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다른 분들의 영화평을 듣게 되었는데, 내가 좋다고 한건 감독의 전작과 나의 기대치-늦은 시간에 영화를 보러 1시간을 달려 갔고,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것을 봤다는-를 만족시키려는게 아닐까란 생각까지 들고야 말았다.
영화 초반은 산만했으며 어설프게 내뱉어지는 대사는 영상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영화적 미감을 해쳤다. 사건의 개연성이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의 선명함도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앞머리 스타일 하나만으로 몇 년 세월은 거뜬히 넘길 수 있는 서우란 배우를 볼 수 있다는 것과 목소리가 다였던 이선균을 음성은 이 배우가 갖고 있는 많은 장점 중하나로 느낄 수 있게 한 점은 좋았다. 배우 뿐만은 아니었다. 안개처럼 낱낱히 흩어져 분간할 수 없는 사건들과 감정은 막판에 맥없이 풀어졌고 엔딩은 갑작스러웠지만, 그 순간 난 정말 무언가 쓰고 싶을 정도로 달뜨고 말았다. 안개가 걷힌 후, 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풍경처럼 영화가 끝나자마자 비로소 영화는 자신의 정체가 어떤건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어란 맘이 아니라, 이렇게 선명한 어조로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분명함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자질들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나의 ‘파주 감상기’는 이렇게 편파적이다.
영화는 세개의 축을 갖고 있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와 형부와 처제의 사랑, 죄의식. 세 축은 제자리를 벗어나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딜레마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되어가는 것을 묵과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성욕이란건 ‘꼴린다’가 아니라 미치도록 절망스럽단 지시어는 아닐까란 생각 등등. 의도와 억측과 팽팽한 사건들이 별다른 클라이맥스 없이 쭉 진행되는걸 보면서, 통념에 호소하는 몇 가지 익숙한 코드를 보면서, 박찬옥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을 떠올려봤다. 끔찍하게 좋았던 감독의 전작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환기시키는 안개의 이미지 역시 설익은 은유로만 보이지 않았을까.
감독의 전작인 ‘질투는 나의 힘’에 비해서 ‘파주’는 이야기를 가공하고 표현하는 힘이 딸린다. 감독은 연대기적인 극의 연출보다는 인물간의 심리적이고 기만적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더 많은 재능이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 툭툭 튀어나오는 작위적인 설정이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잘 만든 영화를 보고 싶은게 아니라, 박찬옥이 오랜만에 만든 작품을 보고 싶었던 나로선 별반 상관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재능은 모든 부분에 골고루 나눠지는건 아니란 생각에 감사하단 감상까지 들고 말았다.
대체적인 평도 내가 생각하는 지점이랑 맞닿아 있다. 이 영화가 싫으면 조목조목 싫은 부분과 이유들,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가 초래하는 해악까지 세세하게 제시하고 있지만, 좋은 경우에는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불투명하지만 참 몽롱해요’란 감상이 다일 정도이다. 내가 쓴 영화 감상기는 영화로 밥벌이하는 사람의 리뷰라고 하기에는 수준 및 함량 미달, 직무유기이겠지만 다행히도 ‘난 그저 관객’인지라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맘껏 부풀려 환호할 수 있다.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