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하나 뿐인 자동차를 아이들과 옆지기에게 양보한 남자는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 야타족도 아닌데 '타실래요'라고 묻길래 어설프게 뒷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여름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한남대교의 강바람은 끝내준다는 감상과는 별개로 나는 더운 날 차를 못갖고 다녀 좀 억울하단 남자의 엄살이 얄미웠다. 단지 돈을 번다는 이유로 양육에서 한 발짝 떨어져 '여가'란걸 갖는 남자에 비해 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며 병원과 학원, 그 밖의 장소로 움직이는 엄마들의 노곤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마들처럼 힘들진 않지만 낮 시간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학 중인 조카를 돌보는 내 입장도 그리 녹록치는 않다. 아이의 등하교 시간과 학원 가는 시간에 딱딱 맞춰서 뒷바라지를 하다보면 내 시간을 갖는 게 얼마나 큰 사치인지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양육을 등한시하는 집 밖의 남자들이 늘상 즐겁다는건 아니다. 집 안과 밖을 벗어나 누군가의 일과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긴 싫은 정도랄까.

 얼마 전에 일하는 곳에 꼬마 손님이 왔다. 부모들이 사장님과 얘기하는 동안 나는 요 꼬마 손님이랑 얘기를 했다. 내가 이렇게 아이들과 잘 노는 사람이었던가. 아이의 티셔츠에 있는 소니 캐릭터를 보고, 있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소니에게 전화를 한다고 설레발을 쳤다. 과자를 가지고는 글자를 만들고, 집을 만들었다. 얼음을 좋아하는 아이와 제빙기 옆에서 얼음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지켜봤다. 나는 덩치 큰 호랑이가 돼서 어슬렁거렸으며 이빨 빠진 호랑이 할머니가 돼서 아이에게 익살맞은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간혹 조카들은 내게 말실수처럼 선생님이라고 한다. '친구 같은 이모'보다는 잔소리 많고, 잔소리의 대부분을 '조용히 좀 해'에 할애하는 이모. 언젠가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없는걸 확인하고서 자신도 모르게, 채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생진심을 담아

-와, 짱이다.

라고 했단다. 흑

 그리고 가끔씩 민은 날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아동 전문가에 의하면 양육자를 선생님으로 부르는건 뭔가를 지속적으로 지시하고, 강제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런 말 하나도 안 믿는다고 뻥쳐도 소용없게 됐다.











 곰 말고 이모가 되고 싶다. 아이를 갖을지, 결혼을 할지, 제대로 살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이모만은 되고 싶다. 그 주문이 때론 이기적이고, 언제든 발을 빼려는 수작이고, 내가 이모로서의 자질이 썩 훌륭한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모는 이모대로 자기 노릇을 할 일이지만, 아이를 낳는 문제는 세계관에 따른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아이를 안 낳는다는 말에 무조건 모든 생물에겐 종족번식의 본능이 있다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부치던 '아는 사람1'에게는 다음과 같은 책을 권할 요량이다. 해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윤,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던 남자. 난, 내 아이가 자라난 후의 세계를 결코 낙관할 수 없어. 스스로는 낙관할 수 없으면서, 힘들겠지만, 넌 여기서 한번 살아볼래. 물어보지도 않고 아이를 낳는다는 거, 황당하도록 무책임한 거지. 방긋거리며 웃으면 예쁘겠지. 서툰 걸음걸이를 보면 왈칵 연민이 솟겠지. 처음 아빠, 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엔 삶이 고해라는 걸 잊을 수 있을 테고. 그런 순간적이고 이기적인 즐거움을 위해 한 생명을 세상에 던져놓는다는 거, 그거 너무 무책임한 거야. 

 소설 속 윤은 아이를 낳았다. 그렇다면 윤의 세계관은 믿을 수 없는 게 되는걸까. 내가 만나왔던 연인의 변화를 바라는 지점은 꼭 이런 것과 닮았단 생각이 든다. 세계관이고 뭐고 어떤 상대를 만나냐에 따라 달라지는거면 왜 지금 달라지지 못하느냔 우격다짐. 결국 누구든 가능하지만 나한테는 안 된다는 그 세계관의 문제가 연애의 걸림돌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어떨까.

 예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 저런 아이들을 낳아서 흠 없이 티 없이 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후손 친화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후손을 낳는다는 문제는 유전자만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같이 물려주는 것이다. 내가 보는 이 세계의 전망이 불확실하고 심란한데 어떻게 내 아이에게 무리한 희망을 선전 하겠는가. 희망이 아니라면 점잖게 냉소하는 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 

 나는 또 한 명의 냉소주의자를 길러내고 싶지 않다. 나까지 거들지 않아도 이미 우리 사회에는 누군가가 키워야 할 아이들이 많다. 정부는 출산율 저하의 심각성을 교조적으로 떠벌리고 있는데, 그들이 계산한 출산율이 청소년 출산이나 비혼모 출산도 포함되는지 궁금하다. 혹시라도 살다 살다 이제는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아이 키우는 재미라도 있어야겠다 싶어진다면, 늙어감에 대한 공포와 권태를 잊게 해줄 뭔가가 절실해진다면, 그때는 태어나버렸지만 갈 곳 없는 아이를 데려다 키우고 싶다.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이모 혹은 고모가 되고 싶다. 끈끈한 건 됐고, 말이나 통하면 좋겠다. 의무로 묶이기보다 우정으로 엮일 수 있는 사이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이모 고모와 사촌들이 꼭 있어야 한다. 당근과 순무를 사야하고 헛간과 창고가 있어야 한다. 시장에 가고 대장간에 가야한다. 어슬렁거리고 잠을 자야 하고 좀 모자라고 바보 같아야 한다.

 에머슨도 그랬다잖은가. 이모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굴라쉬 브런치의 작가쪽으로 맘이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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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8-2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하거나 아이들이 잘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님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보네요.
울 아들이 아이들을 참 잘데리고 놀더라구요.ㅋ

Arch 2010-08-20 16:49   좋아요 0 | URL
전 아이랑 잘 노는 남자 사람이 참 좋아요. 조카들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건 절~ 대 아니고(강한 부정은 급긍정의 다른 말)^^

전호인님 따님의 미모만 접해봐서 아들은 과연 어떤 미모일지 궁금해져요.

다락방 2010-08-2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짱이다, 라니. 철푸덕.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이들이 결코 밉지 않은데요? :)


나는 이모도 되고 싶고 고모도 되고 싶어요. 그리고 이모도 될 수 있고 고모도 될 수 있어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해요. 그렇지만 엄마가 되는 것은 이모나 고모가 되는 것보다는 천배 만배쯤 더 무섭고 힘든 일인것 같아요. 그래거 엄마 만큼은 잘 해낼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Arch 는 어떻게 그렇게 아이들하고 잘 어울려요? 조카들하고 시간을 많이 보냈었기 때문에 이젠 방법을 아는 걸까요? 그들만의 규칙이나 룰 같은거?

Arch 2010-08-20 16:55   좋아요 0 | URL
네, 밉진 않은데 좀 머쓱하달까.

뭐가 되든 다락방님은 다락방님답게 잘 할 것 같아요. 인셉션에서 다락방님이 봤던거 있잖아요. 웬디양님이 잘 짚어준 것처럼 뭐랄까, 다락방은 다락방식으로 잘 소화하는 것 같아요. 조카한테 어떤 다락방 이모가 되어줄지 안 봐도 왠지 알 것 같아요.

확실히 아이랑 잘 노는 방법은 잘 모르겠어요. 꼬마 손님이랑 저렇게 할 수 있었던건 일하는 시간 안에 노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어서였던 것 같아요. 조카들이랑 그럴 수 없었던건 마찬가지 이유로 내 시간을 뺐긴단 생각이 너무 커서였고. 아이와의 놀이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봐야겠는데요. 히~

pjy 2010-08-20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둘리면 이모도 되고, 고모도 되겠지만 엄마는 모르겠습니다~~
현재 사촌조카들을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는데, 보통 니들은 놀아라 문제있으면 불러라입니다~
문제있다고 부르면 니들책임이다 요러는ㅋ 대부분 99.9% 방치버젼이죠~
아주 가끔 완죤 1:1로 동등하게 치고받고 놀기도 합니다ㅋ

Arch 2010-08-21 00:21   좋아요 0 | URL
조카들을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까 말예요. 자산 같고, 저축 같고 그래요^^
가장 괜찮은 양육 혹은 놀이는 큰 범위만 정해주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만 놀 수 있게 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면에서 pjy님은 잘하시는 것 같은데요.
귀여운 이모, 고모 같아요~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431401.html

 “나는 그때 변변찮은 소설을 쓰고 있었고,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 편지를 받았고, 문학상 응모에는 매번 떨어졌다. 책을 사면 늘 저자의 나이를 계산해봤다. 몇 년생인지, 첫 번째 책은 몇 살에 펴냈는지 늘 확인하곤 했다. ‘이 사람은 서른두 살에 첫 책을 냈군. 아직 내겐 7년이 남았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스물두 살에 데뷔하다니, 천재네, 천재. 부럽군’이라며 나의 재능 없음을 한탄했다.”  

 한겨레 ESC 섹션에서 <씨네21>기자 이다혜씨의 '책에서 배우는 위로의 기술' 코너를 좋아한다. 정말 딱 내 맘 같은 글을 발견해서 옮겨본다.

 되고 싶고 하고 싶은건 많은데 뭐 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을 때가 있었다. 방바닥에서 배밀이를 하며 대체 나는 왜 태어나서 아무 쓸모도 없이 사는가 싶은 생각이 꾸역꾸역 들 정도로 한심할 때였다. 살아오면서 내가 꾸준이 해왔던 일은 뭐였고, 뭘 할 때 즐거웠나를 떠올려봤다. 일기 쓸 때, 방에서 혼자 끙끙대며 말들을 지어낼 때, 밤바람 쐬며 걸어다닐 때, 누군가와 서로의 말 꼬투리를 잡고 잡으며 얘기하는 것,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그때 문득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상 한번 받은 것 말고는 누가 인정해준적도 없는 재능이었지만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글이든 쓰고 싶었다. 꿈은 꿈대로 나이를 먹어가고, '작가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끈기나 집념은 내 성향과 맞지 않다는 생각도 하고, 아직은 사는게 힘들어서 그렇지 조금만 나아지면 제대로 써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때 나도 누구처럼 멋진 글의 작가 나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다녔다.

 그러다 정말 맘껏 쓸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쓸 말이 없었다. 내가 쓰려고 했던건 그냥 나에 대한 것인데 그건 일기로도 족했다. 굳이 여러 그루의 나무를 베어가며 누군가에게 읽힐만한 글을 쓸 재주는 없었다. 게다가 김어준의 말처럼 그건 단지 꿈이란 단어 속으로 숨어버린 20대의 알리바이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자신이 가장 후회스러운건 어렸을 때 공무원 시험 준비를 안 한거란 얘기를 했다. 밤낮으로 일하고, 잠이 늘 부족해 기운이 없다고 호소하는 그분을 볼 때마다 그에게 필요한건 후회가 아니라 지금 도전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P에게 그 얘기를 하자, P는 '그럼, 아치는 뭘 하고 싶어요'라고 되물었다. 글쎄, 나는 이제 뭘 하고 싶은걸까. 남에 대해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과연 나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까.

 책 보고, 음악 들으며 놀고 싶다고 했고, 수영을 배우고 싶고, 또 다른 뭔가에 대해서 얘기를 했지만 P는 흡족해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이랬노라고, 나의 알리바이가 나를 사로잡게 된 일이 있었노라고. P는 예쁜 말을 할줄 아는 사람이기에 서슴없이 아치는 잘 할거라고 말해줬다. 내가 아무리 핑계를 대고, 그렇게 하고 싶은건 아니라고 돌려 말해도, 내 속에 박힌 이야기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 아치, 지금은 말고 나중에라도 꼭 써요. 그리고 내가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이 온다면 참 좋겠어요.

 나는 나 때문에 글을 쓰고, P 때문에 글을 쓴다. 남들 다 노력할 때 뒷짐 지고 '정말 하고 싶은 일' 운운하던 나의 어렸던 알리바이를 위해 글을 쓰고, 그때 그 단언들을 믿어준 친구를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나는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곳이지만 가끔씩 내 서재를 찾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큰 목소리는 어림없겠지만, 지금처럼 앞으로도 조용하고 꾸준한 목소리로 속삭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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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8-1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하고 꾸준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Arch의 말을 내가 계속 듣고 있어요. 그러니 나중에 P가 누리게 될 행운을 저도 좀 주세요.

Arch 2010-08-19 22:28   좋아요 0 | URL
알고 있어요. 제가 이만큼이나 쓸 수 있는건 다 다락방 때문이에요. 다락방은 P만큼이나 친절하군요!

hnine 2010-08-1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꿈을 이루세요!

Arch 2010-08-19 22:28   좋아요 0 | URL
늘 고마워요. hnine님

2010-08-18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0-08-19 22:39   좋아요 0 | URL
설마요^^

차좋아 2010-08-18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내 서재를 찾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저도 포함 되는거 같은 말이라 기분이 좋아요)

가끔식 오지만 아치님도 가끔씩 올리는 바람에 아치님의 글은 다 볼 수 있어요 ㅎㅎ
나중에 아치님을 책으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 봅니다. ^^

Arch 2010-08-19 22:41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이 찾아주시는구나~

아, 괜히 말했어. 괜히... 전 감히 제 글을 책으로 낼 수 없을 것 같아요. 컨셉 자체가 없으니까. 히~
 


 아빠는 요즘 독기가 빠져있다. 지민이랑 짖궂은 장난을 치고, 가끔씩 별거 아닌 일로(세탁한 빨래에서 썩은내가 난다던가, 식은 밥을 먹어야 한다던가, 아이스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얼음을 다 처먹고-주로 내가!- 물을 안 넣어놓는다던가 등등) 성내시는거 빼곤 말이다. 오늘 아침엔 내가 설거지를 하면 다시 해야한다며, 빨래를 건성으로 넌다며 당신께서 그 모든 일을 다  하셨다. 긍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뭐랄까, 체념 내지는 포기하는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물론 감사하기도 했다.

 아빠는 장난을 잘 치시는데 지금이나 예전이나 고지식했던 나에겐 그게 참 곤혹스러웠다. 90점 맞은 시험지를 갖고 가면 아빠는 9개 맞은거 말고 1개 틀린걸 지적하셨다. 지금이야 아빠 사실 기분 좋은데 그렇게 말하는거 아니냐며 생짜를 놓고 웃으며 넘긴다. 이제야 아빠를 좀 이해할 수 있겠다며 이러고 앉았는데 막내랑 옥찌 얘기는 좀 달랐다.

 막내는 아빠가 장난치고 싶어서 그랬다는걸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알았댄다. 막내가 아빠에게 불만이었던건 큰 딸만 챙기는 차별 대우였단다. 차별을 눈 씻고도 느껴본적 없는 나로선 막내가 조목조목 차별 목록을 얘기해도 뭘 그런 것 같고 그러냐고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의식을 못할 수 밖에.

 언젠가 옥찌가 받아쓰기 시험지를 갖고 왔는데 아빠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한 개 틀린거 갖고 뭐라고 한 적이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아빠도 참)옥찌에게 가만히 다가가 할아버지가 저러시는거 서운하지 않냐고 물었다. 옥찌는 뭐 그런 말이 다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 할아버지 장난치는 거잖아.

한다. 나만 몰랐다. 나만 빼고 다 알았다. 
  
 일이 없을 때면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시는 아빠를 보면 답답할 때가 많았다. 별거 아닌 일에 화내시고, 손톱만한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하실 때면 그래선 안 되겠지만 한심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미욱한 점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 건 결국 그 모습에서 나를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쩌면 장난을 받아들이는데 이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나랑 아빠는 어느 면에선 닮았단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건성에 불같이 화를 내고, 모임에서 주인공이 아니면 다른 역할이라도 하려고 안달을 내고, 잔소리가 심하고, 말투 자체가 화난 사람 같은 것까지 말이다.

 아빠가 널어놓은 빨래에선 새물내가 물씬 난다. 아빠가 해놓은 그릇에선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아빠가 청소한 집은 꼭 딴 집 같다. 늙은 아빠가 일하게 한다고 불만이 가득하지만 일을 하시는 아빠는 참 멋지다. 무슨 일이든 자기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대충이 몸에 익은 나로선 정녕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 아빠, 아빠는 우리 낳았을 때 겁나지 않았어?
- 겁나긴. 지금이야 이렇지, 젊었을 땐 어딜 가든 밥벌이는 했어.
- 난 겁나는데. 내가 능력이 없어서 옥찌들이 자기도 모르게 부족한 것에 익숙해질까봐 겁나는데.

아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아빠와 나는 같이 늙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해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

* 끓인 물을 식히려고 얼음을 쓰다가 얼음 커피 생각이 났다. 
- 아빠, 물 바로 넣어놓을테니까 조금 있다가 커피 드시는건 어때? 
- 알았어.
- 설마 나 욕하는거 아니지?
- 바로 욕은 안 하지.
- 그럼 나중에 한다는 소리야?
- 나중에 해야지. 지금 하면 따지고 물고 늘어지니까.

 어쩌면 손톱만한 가장의 권위 운운은 병풍처럼 있기 싫다는 얘기일지도. 누군가를 챙기는데 서투른건 아빠랑 나랑 다를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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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8-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주의자....마음에 팍 꽂히네요. 새물내가 나고 윤기가 흐르고 정갈한 아빠, 저두 그러고 싶네요..^^

Arch 2010-08-10 10:15   좋아요 0 | URL
곡우님은 벌써 그런 아빠 아니신가요? ^^
 


 여자는 늦었다. 늦은 다음에 훌륭한 강의를 한다면야 시간 개념은 미심쩍지만 강사 능력까지 의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변명이 아주 길었다. 자신이 왜 늦었는지에서부터 오늘 무슨 일이 있었고, 자기가 해온 일이 어떤거였는지, 나로선 전혀 관심 없는 내용을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였다.  

 졸음이 왔고, 짜증이 났다. 전날 늦게 잔데다 아침부터 페달질을 했더니 몸도 노곤노곤해지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다 교육법을 알려준다면서 오만가지 주제들을 다 갖고 들어가니 정신도 없었다. 15년 강사 경력이 무색할 정도로 중구난방인 강의를 들으며 갑자기 생각이 나는 뭘 한다고 공부를 하고 있는지에까지 미치자 폴짝 뛸 정도로 답답해졌다.  

 질문할 기회만 노리다 강사가 '남성이 여성보단 인정 욕구가 더 크다'란 말을 홱 낚아챘다. 성별적인 성향은 사람마다 다른데 그렇게 범주화할 수 있냐고. 여자는 차근차근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대체적인 비율상 그렇단 얘기에서 무슨 말 끝엔가 페미니즘은 결국 휴머니즘의 다른 말이란게 자신의 가치관이란 말까지 나왔다. 흥미로웠다. 성별적인 양육 태도에 대한 질문에서도 반대 성의 역할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좋다는 얘기도 괜찮았다.  

 나중에 강의 소감을 묻길래 실례를 무릎쓰고 말했다. '처음에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평이한 내용만 나와서 지루했다, 교육이론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는데 그 부분은 지나쳐서 아쉬웠다. 지적 자극을 원했지만 강사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한건지는 대충 알았다' 등등의 얘기. 지루했지만 어느 정도 감은 잡았단 소린데 결국 감은커녕 감나무조차 구경하지 못했다는걸 알았다.

 강의할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지점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감정적으로 소통되길 바라는가하면, 다른 사람은 사고를, 정보를 많이 주는 강의를 원한다. 강의에서 정보를 통해 의식을 바꾸는건 정말 어려운 목표이다. 처음 도입 부분을 길게 잡은건 정서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내가 오픈해야 편안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전달하려는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와닿지 않는다.

 무능한건 나였다.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볼 수 없을 정도로 닫힌건 바로 나였다. 닫힌 문 앞에서 아무리 그럴싸한 정보와 자극을 준다고 열릴리 없었다. 
 

 강사의 강의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인상 깊었던 강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전에 성매매와 성폭력에서 느꼈던 지적 자극과는 달랐지만, '행복한 세상, TV 동화' 같은 이야기에 흔들리는게 또 나란 인간이었다. '나, 지금 당신 강의 안 들어요'를 온몸으로 말하던 내가 참 부끄러웠다. 강의가 끝난 후 강사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자, 자신도 그렇게 말해줄 수 있어서 고맙다고는 했지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왜 나는 남들 다 알아서 잘하는건 이렇게 못난 방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걸까.

 강의법엔 다른 차원이 있고, 섣부르게 속단하진 말자는 식으로 정리하고 어제 다시 수업에 갔는데 어떤 분이 나를 불러선 참 고마웠단 얘기를 했다. 들어본즉슨, 내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해줬다는거다. 그 강사가 전 시간에 다른 강의도 했는데 아주 지루해서 폴짝 뛸 뻔했다고,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은 얘기를 왜 매 시간마다 하며 왜 매 시간마다 늦는지 알 수 없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결국 난 누군가의 방어 기제에 놀아난걸까. 아니면 내게 말을 건 수업보다 핸드폰 진동에 집중하는 분의 말을 믿어야할까. 그런데 뭐 꼭 둘 중 하나만 믿을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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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네를 타는 옥찌는 아름답다. 자아도취에 이어서 조카도취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정말 아름답다. 너무 높거나 낮지 않은 높이에서 앉았다 섰다를 촐싹 맞지 않게 오간다. 무릎을 굽혔다 폈다하기에 정성을 들이고, 가끔 나를 보며 한번씩 웃는다. 그네는 원래 그 아이 몸에 딱 맞는 옷 같다. 게다가 옆에서 참견한다며 신발을 벗어라, 좀 더 높이 올라가라, 내가 신발을 맡겠다 하며 뛰어다니다 엎어지는 방자 같은 동생이 있으니 우아함이야말로 더 돋보일 수 밖에.

 이제 아이들은 그네 바닥에 배를 깔고 발로 구르며 그네를 탄다. 까르르거리며 웃는 소리가 오후의 놀이터에 퍼진다. 오랜만에 즐겁다.

 벤치에 누워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를 보다가 자기 객관화와 자존감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 에 골똘한건 아니고 그냥 좀 졸려서 뒤척이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왜 모래를 뿌리느냐로 시작한 악 소리는 아이가 갖고 있는 모래삽을 들어다 아이를 때리고 모래를 던지는 연속 동작으로 이어졌다. 여자는 아주 성이 나 있다. 금세라도 아이를 분지르고 아이 자체를 지워버릴 것처럼 화가 나 있다. 조마조마했다. 더 폭력적인 상황이 되면 어쩌지. 아직은 여자가 지켜보는 사람들 눈을 의식해 좀 자중하길 바라며 그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여자의 아들일까, 아니면 자기 아이에게 모래를 던진 남의 아이를 저렇게 몰아세우는걸까. 남의 아이라면 내가 나서도 되고, 자기 아이면 나서기 그렇겠단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저건 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옆에 할머니들은 왜 수군거리면서 나서지 않나 싶어 서운했다. 생각만 하는데도 머리에서 쥐가 날 것 같았다.

 여자가 인상을 쓰며 다시 아이에게 모래를 던지고 발로 아이를 찼다. 다가가서 아이의 모래를 털어줬다. 여자에게 뭐라고 할까하다 내가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자격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니라 폭력인데 자꾸 내가 관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여자가 다시 아이에게 다가와선 화난 목소리로 왜 그랬냐고 자꾸 물으며 아이의 모래를 털어줄 때까지 아이의 모래를 털어줬다. 거친 손매무새로 아이의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준 여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벌어진 일의 성격과 달리 자격 얘기가 나온건 다른 사람 앞에서 안 했다 뿐이지 나도 숱하게 저지른 일이었다는 의미에서였다.

 어제는 자책감과 미안함에 전전긍긍했다. 방학이라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진 옥찌들이 싸울 때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 아이들을 때렸다. 때리고 상처를 주는 말을 했으며 그래놓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해낼 수 있는 아주 심한 말을 해버렸다.

 차라리 아이들이랑 떨어져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공감해야하는지 알면 뭐하나.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걸. 아이들이 투정을 부리고, 우는걸 상대할 때마다 이런 감정노동은 하기 싫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네가 그래서 슬펐구나, 그래서 정말 즐거웠구나, 그래서 맘이 상했구나란 말 대신 '왜'라고 묻는다. 너는 대체 왜 그러니? 마치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의문이라는 듯 왜라고 묻는다.

 어제의 자책에서 벗어나고 싶어 오늘은 잘하려고 애썼다. 물론 맘처럼 쉽진 않았지만, 옥찌들은 내가 여지를 두는 만큼 덜 싸웠고, 재잘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미안할 정도로 즐거웠다. 놀이터에 다녀온 뒤, 몸이 끈적거리다며 지민이가 짜증을 냈다. 지민이가 짜증을 내면 이모도 짜증나고, 속상하단 말을 했다. 어느 순간 아이가 자신을 끌어올려 짜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게 보였다. 활달한 목소리로 내게 뭔가를 물어보는데 그제서야 알았다. 나만 감정 노동을 한다고 생각했고, 나만 다 희생하는 것처럼 느꼈던 맘이 문제란걸. 분명히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맘 속 깊숙이에선 정말 그렇게 믿었다. 이 생각은 언제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라질까. 6살 아이에게 이모한테 맞추라는 미숙함에선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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