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요즘 독기가 빠져있다. 지민이랑 짖궂은 장난을 치고, 가끔씩 별거 아닌 일로(세탁한 빨래에서 썩은내가 난다던가, 식은 밥을 먹어야 한다던가, 아이스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얼음을 다 처먹고-주로 내가!- 물을 안 넣어놓는다던가 등등) 성내시는거 빼곤 말이다. 오늘 아침엔 내가 설거지를 하면 다시 해야한다며, 빨래를 건성으로 넌다며 당신께서 그 모든 일을 다  하셨다. 긍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뭐랄까, 체념 내지는 포기하는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물론 감사하기도 했다.

 아빠는 장난을 잘 치시는데 지금이나 예전이나 고지식했던 나에겐 그게 참 곤혹스러웠다. 90점 맞은 시험지를 갖고 가면 아빠는 9개 맞은거 말고 1개 틀린걸 지적하셨다. 지금이야 아빠 사실 기분 좋은데 그렇게 말하는거 아니냐며 생짜를 놓고 웃으며 넘긴다. 이제야 아빠를 좀 이해할 수 있겠다며 이러고 앉았는데 막내랑 옥찌 얘기는 좀 달랐다.

 막내는 아빠가 장난치고 싶어서 그랬다는걸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알았댄다. 막내가 아빠에게 불만이었던건 큰 딸만 챙기는 차별 대우였단다. 차별을 눈 씻고도 느껴본적 없는 나로선 막내가 조목조목 차별 목록을 얘기해도 뭘 그런 것 같고 그러냐고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의식을 못할 수 밖에.

 언젠가 옥찌가 받아쓰기 시험지를 갖고 왔는데 아빠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한 개 틀린거 갖고 뭐라고 한 적이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아빠도 참)옥찌에게 가만히 다가가 할아버지가 저러시는거 서운하지 않냐고 물었다. 옥찌는 뭐 그런 말이 다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 할아버지 장난치는 거잖아.

한다. 나만 몰랐다. 나만 빼고 다 알았다. 
  
 일이 없을 때면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시는 아빠를 보면 답답할 때가 많았다. 별거 아닌 일에 화내시고, 손톱만한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하실 때면 그래선 안 되겠지만 한심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미욱한 점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 건 결국 그 모습에서 나를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쩌면 장난을 받아들이는데 이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나랑 아빠는 어느 면에선 닮았단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건성에 불같이 화를 내고, 모임에서 주인공이 아니면 다른 역할이라도 하려고 안달을 내고, 잔소리가 심하고, 말투 자체가 화난 사람 같은 것까지 말이다.

 아빠가 널어놓은 빨래에선 새물내가 물씬 난다. 아빠가 해놓은 그릇에선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아빠가 청소한 집은 꼭 딴 집 같다. 늙은 아빠가 일하게 한다고 불만이 가득하지만 일을 하시는 아빠는 참 멋지다. 무슨 일이든 자기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대충이 몸에 익은 나로선 정녕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 아빠, 아빠는 우리 낳았을 때 겁나지 않았어?
- 겁나긴. 지금이야 이렇지, 젊었을 땐 어딜 가든 밥벌이는 했어.
- 난 겁나는데. 내가 능력이 없어서 옥찌들이 자기도 모르게 부족한 것에 익숙해질까봐 겁나는데.

아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아빠와 나는 같이 늙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해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

* 끓인 물을 식히려고 얼음을 쓰다가 얼음 커피 생각이 났다. 
- 아빠, 물 바로 넣어놓을테니까 조금 있다가 커피 드시는건 어때? 
- 알았어.
- 설마 나 욕하는거 아니지?
- 바로 욕은 안 하지.
- 그럼 나중에 한다는 소리야?
- 나중에 해야지. 지금 하면 따지고 물고 늘어지니까.

 어쩌면 손톱만한 가장의 권위 운운은 병풍처럼 있기 싫다는 얘기일지도. 누군가를 챙기는데 서투른건 아빠랑 나랑 다를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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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8-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주의자....마음에 팍 꽂히네요. 새물내가 나고 윤기가 흐르고 정갈한 아빠, 저두 그러고 싶네요..^^

Arch 2010-08-10 10:15   좋아요 0 | URL
곡우님은 벌써 그런 아빠 아니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