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431401.html

 “나는 그때 변변찮은 소설을 쓰고 있었고,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 편지를 받았고, 문학상 응모에는 매번 떨어졌다. 책을 사면 늘 저자의 나이를 계산해봤다. 몇 년생인지, 첫 번째 책은 몇 살에 펴냈는지 늘 확인하곤 했다. ‘이 사람은 서른두 살에 첫 책을 냈군. 아직 내겐 7년이 남았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스물두 살에 데뷔하다니, 천재네, 천재. 부럽군’이라며 나의 재능 없음을 한탄했다.”  

 한겨레 ESC 섹션에서 <씨네21>기자 이다혜씨의 '책에서 배우는 위로의 기술' 코너를 좋아한다. 정말 딱 내 맘 같은 글을 발견해서 옮겨본다.

 되고 싶고 하고 싶은건 많은데 뭐 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을 때가 있었다. 방바닥에서 배밀이를 하며 대체 나는 왜 태어나서 아무 쓸모도 없이 사는가 싶은 생각이 꾸역꾸역 들 정도로 한심할 때였다. 살아오면서 내가 꾸준이 해왔던 일은 뭐였고, 뭘 할 때 즐거웠나를 떠올려봤다. 일기 쓸 때, 방에서 혼자 끙끙대며 말들을 지어낼 때, 밤바람 쐬며 걸어다닐 때, 누군가와 서로의 말 꼬투리를 잡고 잡으며 얘기하는 것,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그때 문득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상 한번 받은 것 말고는 누가 인정해준적도 없는 재능이었지만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글이든 쓰고 싶었다. 꿈은 꿈대로 나이를 먹어가고, '작가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끈기나 집념은 내 성향과 맞지 않다는 생각도 하고, 아직은 사는게 힘들어서 그렇지 조금만 나아지면 제대로 써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때 나도 누구처럼 멋진 글의 작가 나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다녔다.

 그러다 정말 맘껏 쓸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쓸 말이 없었다. 내가 쓰려고 했던건 그냥 나에 대한 것인데 그건 일기로도 족했다. 굳이 여러 그루의 나무를 베어가며 누군가에게 읽힐만한 글을 쓸 재주는 없었다. 게다가 김어준의 말처럼 그건 단지 꿈이란 단어 속으로 숨어버린 20대의 알리바이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자신이 가장 후회스러운건 어렸을 때 공무원 시험 준비를 안 한거란 얘기를 했다. 밤낮으로 일하고, 잠이 늘 부족해 기운이 없다고 호소하는 그분을 볼 때마다 그에게 필요한건 후회가 아니라 지금 도전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P에게 그 얘기를 하자, P는 '그럼, 아치는 뭘 하고 싶어요'라고 되물었다. 글쎄, 나는 이제 뭘 하고 싶은걸까. 남에 대해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과연 나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까.

 책 보고, 음악 들으며 놀고 싶다고 했고, 수영을 배우고 싶고, 또 다른 뭔가에 대해서 얘기를 했지만 P는 흡족해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이랬노라고, 나의 알리바이가 나를 사로잡게 된 일이 있었노라고. P는 예쁜 말을 할줄 아는 사람이기에 서슴없이 아치는 잘 할거라고 말해줬다. 내가 아무리 핑계를 대고, 그렇게 하고 싶은건 아니라고 돌려 말해도, 내 속에 박힌 이야기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 아치, 지금은 말고 나중에라도 꼭 써요. 그리고 내가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이 온다면 참 좋겠어요.

 나는 나 때문에 글을 쓰고, P 때문에 글을 쓴다. 남들 다 노력할 때 뒷짐 지고 '정말 하고 싶은 일' 운운하던 나의 어렸던 알리바이를 위해 글을 쓰고, 그때 그 단언들을 믿어준 친구를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나는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곳이지만 가끔씩 내 서재를 찾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큰 목소리는 어림없겠지만, 지금처럼 앞으로도 조용하고 꾸준한 목소리로 속삭여야지.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0-08-1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하고 꾸준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Arch의 말을 내가 계속 듣고 있어요. 그러니 나중에 P가 누리게 될 행운을 저도 좀 주세요.

Arch 2010-08-19 22:28   좋아요 0 | URL
알고 있어요. 제가 이만큼이나 쓸 수 있는건 다 다락방 때문이에요. 다락방은 P만큼이나 친절하군요!

hnine 2010-08-1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꿈을 이루세요!

Arch 2010-08-19 22:28   좋아요 0 | URL
늘 고마워요. hnine님

2010-08-18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9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0-08-19 22:39   좋아요 0 | URL
설마요^^

차좋아 2010-08-18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내 서재를 찾아주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저도 포함 되는거 같은 말이라 기분이 좋아요)

가끔식 오지만 아치님도 가끔씩 올리는 바람에 아치님의 글은 다 볼 수 있어요 ㅎㅎ
나중에 아치님을 책으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 봅니다. ^^

Arch 2010-08-19 22:41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이 찾아주시는구나~

아, 괜히 말했어. 괜히... 전 감히 제 글을 책으로 낼 수 없을 것 같아요. 컨셉 자체가 없으니까.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