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하나 뿐인 자동차를 아이들과 옆지기에게 양보한 남자는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 야타족도 아닌데 '타실래요'라고 묻길래 어설프게 뒷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여름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한남대교의 강바람은 끝내준다는 감상과는 별개로 나는 더운 날 차를 못갖고 다녀 좀 억울하단 남자의 엄살이 얄미웠다. 단지 돈을 번다는 이유로 양육에서 한 발짝 떨어져 '여가'란걸 갖는 남자에 비해 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며 병원과 학원, 그 밖의 장소로 움직이는 엄마들의 노곤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마들처럼 힘들진 않지만 낮 시간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학 중인 조카를 돌보는 내 입장도 그리 녹록치는 않다. 아이의 등하교 시간과 학원 가는 시간에 딱딱 맞춰서 뒷바라지를 하다보면 내 시간을 갖는 게 얼마나 큰 사치인지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양육을 등한시하는 집 밖의 남자들이 늘상 즐겁다는건 아니다. 집 안과 밖을 벗어나 누군가의 일과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긴 싫은 정도랄까.
얼마 전에 일하는 곳에 꼬마 손님이 왔다. 부모들이 사장님과 얘기하는 동안 나는 요 꼬마 손님이랑 얘기를 했다. 내가 이렇게 아이들과 잘 노는 사람이었던가. 아이의 티셔츠에 있는 소니 캐릭터를 보고, 있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소니에게 전화를 한다고 설레발을 쳤다. 과자를 가지고는 글자를 만들고, 집을 만들었다. 얼음을 좋아하는 아이와 제빙기 옆에서 얼음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지켜봤다. 나는 덩치 큰 호랑이가 돼서 어슬렁거렸으며 이빨 빠진 호랑이 할머니가 돼서 아이에게 익살맞은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간혹 조카들은 내게 말실수처럼 선생님이라고 한다. '친구 같은 이모'보다는 잔소리 많고, 잔소리의 대부분을 '조용히 좀 해'에 할애하는 이모. 언젠가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없는걸 확인하고서 자신도 모르게, 채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생진심을 담아
-와, 짱이다.
라고 했단다. 흑
그리고 가끔씩 민은 날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아동 전문가에 의하면 양육자를 선생님으로 부르는건 뭔가를 지속적으로 지시하고, 강제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런 말 하나도 안 믿는다고 뻥쳐도 소용없게 됐다.
곰 말고 이모가 되고 싶다. 아이를 갖을지, 결혼을 할지, 제대로 살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이모만은 되고 싶다. 그 주문이 때론 이기적이고, 언제든 발을 빼려는 수작이고, 내가 이모로서의 자질이 썩 훌륭한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모는 이모대로 자기 노릇을 할 일이지만, 아이를 낳는 문제는 세계관에 따른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아이를 안 낳는다는 말에 무조건 모든 생물에겐 종족번식의 본능이 있다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부치던 '아는 사람1'에게는 다음과 같은 책을 권할 요량이다. 해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윤,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던 남자. 난, 내 아이가 자라난 후의 세계를 결코 낙관할 수 없어. 스스로는 낙관할 수 없으면서, 힘들겠지만, 넌 여기서 한번 살아볼래. 물어보지도 않고 아이를 낳는다는 거, 황당하도록 무책임한 거지. 방긋거리며 웃으면 예쁘겠지. 서툰 걸음걸이를 보면 왈칵 연민이 솟겠지. 처음 아빠, 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엔 삶이 고해라는 걸 잊을 수 있을 테고. 그런 순간적이고 이기적인 즐거움을 위해 한 생명을 세상에 던져놓는다는 거, 그거 너무 무책임한 거야.
소설 속 윤은 아이를 낳았다. 그렇다면 윤의 세계관은 믿을 수 없는 게 되는걸까. 내가 만나왔던 연인의 변화를 바라는 지점은 꼭 이런 것과 닮았단 생각이 든다. 세계관이고 뭐고 어떤 상대를 만나냐에 따라 달라지는거면 왜 지금 달라지지 못하느냔 우격다짐. 결국 누구든 가능하지만 나한테는 안 된다는 그 세계관의 문제가 연애의 걸림돌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어떨까.
예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 저런 아이들을 낳아서 흠 없이 티 없이 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후손 친화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후손을 낳는다는 문제는 유전자만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같이 물려주는 것이다. 내가 보는 이 세계의 전망이 불확실하고 심란한데 어떻게 내 아이에게 무리한 희망을 선전 하겠는가. 희망이 아니라면 점잖게 냉소하는 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
나는 또 한 명의 냉소주의자를 길러내고 싶지 않다. 나까지 거들지 않아도 이미 우리 사회에는 누군가가 키워야 할 아이들이 많다. 정부는 출산율 저하의 심각성을 교조적으로 떠벌리고 있는데, 그들이 계산한 출산율이 청소년 출산이나 비혼모 출산도 포함되는지 궁금하다. 혹시라도 살다 살다 이제는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아이 키우는 재미라도 있어야겠다 싶어진다면, 늙어감에 대한 공포와 권태를 잊게 해줄 뭔가가 절실해진다면, 그때는 태어나버렸지만 갈 곳 없는 아이를 데려다 키우고 싶다.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이모 혹은 고모가 되고 싶다. 끈끈한 건 됐고, 말이나 통하면 좋겠다. 의무로 묶이기보다 우정으로 엮일 수 있는 사이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이모 고모와 사촌들이 꼭 있어야 한다. 당근과 순무를 사야하고 헛간과 창고가 있어야 한다. 시장에 가고 대장간에 가야한다. 어슬렁거리고 잠을 자야 하고 좀 모자라고 바보 같아야 한다.
에머슨도 그랬다잖은가. 이모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굴라쉬 브런치의 작가쪽으로 맘이 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