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늦었다. 늦은 다음에 훌륭한 강의를 한다면야 시간 개념은 미심쩍지만 강사 능력까지 의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변명이 아주 길었다. 자신이 왜 늦었는지에서부터 오늘 무슨 일이 있었고, 자기가 해온 일이 어떤거였는지, 나로선 전혀 관심 없는 내용을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였다.  

 졸음이 왔고, 짜증이 났다. 전날 늦게 잔데다 아침부터 페달질을 했더니 몸도 노곤노곤해지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다 교육법을 알려준다면서 오만가지 주제들을 다 갖고 들어가니 정신도 없었다. 15년 강사 경력이 무색할 정도로 중구난방인 강의를 들으며 갑자기 생각이 나는 뭘 한다고 공부를 하고 있는지에까지 미치자 폴짝 뛸 정도로 답답해졌다.  

 질문할 기회만 노리다 강사가 '남성이 여성보단 인정 욕구가 더 크다'란 말을 홱 낚아챘다. 성별적인 성향은 사람마다 다른데 그렇게 범주화할 수 있냐고. 여자는 차근차근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대체적인 비율상 그렇단 얘기에서 무슨 말 끝엔가 페미니즘은 결국 휴머니즘의 다른 말이란게 자신의 가치관이란 말까지 나왔다. 흥미로웠다. 성별적인 양육 태도에 대한 질문에서도 반대 성의 역할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좋다는 얘기도 괜찮았다.  

 나중에 강의 소감을 묻길래 실례를 무릎쓰고 말했다. '처음에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평이한 내용만 나와서 지루했다, 교육이론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는데 그 부분은 지나쳐서 아쉬웠다. 지적 자극을 원했지만 강사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한건지는 대충 알았다' 등등의 얘기. 지루했지만 어느 정도 감은 잡았단 소린데 결국 감은커녕 감나무조차 구경하지 못했다는걸 알았다.

 강의할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지점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감정적으로 소통되길 바라는가하면, 다른 사람은 사고를, 정보를 많이 주는 강의를 원한다. 강의에서 정보를 통해 의식을 바꾸는건 정말 어려운 목표이다. 처음 도입 부분을 길게 잡은건 정서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내가 오픈해야 편안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전달하려는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와닿지 않는다.

 무능한건 나였다.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볼 수 없을 정도로 닫힌건 바로 나였다. 닫힌 문 앞에서 아무리 그럴싸한 정보와 자극을 준다고 열릴리 없었다. 
 

 강사의 강의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인상 깊었던 강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전에 성매매와 성폭력에서 느꼈던 지적 자극과는 달랐지만, '행복한 세상, TV 동화' 같은 이야기에 흔들리는게 또 나란 인간이었다. '나, 지금 당신 강의 안 들어요'를 온몸으로 말하던 내가 참 부끄러웠다. 강의가 끝난 후 강사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자, 자신도 그렇게 말해줄 수 있어서 고맙다고는 했지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왜 나는 남들 다 알아서 잘하는건 이렇게 못난 방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걸까.

 강의법엔 다른 차원이 있고, 섣부르게 속단하진 말자는 식으로 정리하고 어제 다시 수업에 갔는데 어떤 분이 나를 불러선 참 고마웠단 얘기를 했다. 들어본즉슨, 내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해줬다는거다. 그 강사가 전 시간에 다른 강의도 했는데 아주 지루해서 폴짝 뛸 뻔했다고,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은 얘기를 왜 매 시간마다 하며 왜 매 시간마다 늦는지 알 수 없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결국 난 누군가의 방어 기제에 놀아난걸까. 아니면 내게 말을 건 수업보다 핸드폰 진동에 집중하는 분의 말을 믿어야할까. 그런데 뭐 꼭 둘 중 하나만 믿을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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