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 바벨의 도서관 17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박혜숙 옮김, 이승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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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큼 이력이 낯설고 흥미로운 작가들이 있다. 빌리에 드 릴아당이라는 프랑스 작가는 낯선 어감에 오히려 흥미가 끌렸다. 환상적이면서 낭만적인 이야기를 구사하는 19세기 작가를 만나는 건 쉽지 않다. 단편소설은 짧고 강렬한 이야기를 전하는 데 알맞은 양식이다. 이 작품집에서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잇는 단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베라’는 포우의 ‘리지아’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칼로 자기를 베어낸 듯 가까운 연인을 잃은 사람이 미치지 않고 자아를 지키는 방법은, 연인이 아직 살아있다는 환상 뿐이다. 환상, 혹은 의지의 힘으로 인간은 혹독한 일상을 견딘다. 마술은 뇌에서 시작해서 삶 전체를 지배한다. 헛것 또는 거짓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면, 부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문득 고개를 쳐드는 의심 하나에도, 환상의 성은 산산이 부서진다.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기 쉽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다.


‘이자보 여왕’은 권력의 속성을 보여준다. 크나큰 권력은 서서히 조여드는 덫을 치고 기다린다. 진실보다 중요한 건, 진실이라 드러난 증거다. 가장 잔혹한 건 인간의 마음이다. 서로를 애무하던 손길도 한 순간의 감정의 어긋남으로 칼날같이 차갑게 변한다. 사랑이 깊은 만큼 증오도 깊다는 건 오래된 역설이다.


‘어느 슬픈 작가의 슬픈 이야기’는 이야기의 역설을 보여준다.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건 모순된 말이다. 실제와 허구,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의 위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소설은 현실의 복제인가? 그렇다면 그건 꾸며낸 이야기라고 볼 수 없다. 있을 법한 이야기, 개연성 있는 허구와 같은 수식들은 소설이 항상 현실의 그림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극적인 사건을 ‘소설 같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다.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은 병리학적인 증세를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정신 영역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현대에서야 이런 편집증 증상이 낯설지 않다. 죽음, 혹은 살인에 광적으로 열광하는 그 남자는, 기묘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을 가둘 만큼 돈이 많은’ 그 남자는 큰 돈을 쏟아부어 기꺼이 취미를 즐긴다. 예의바르고 업무에 충실해보이는 겉모습 뒤에는, 잔악한 한 인간의 초상이 있다. 그의 직업이 진짜가 아니라는 점이 소름끼치는 진실이다.


‘체일라의 모험’은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신비롭고 독특한 이야기다. 암살자를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을 주는 대신 엄청난 재산과 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하는 체일라라는 사람이 있다. 이 제안 앞에서 왕은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질문 자체에 답이 존재하듯, 어떤 제안에도 결론이 존재한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은 인간의 잔인함을 돌아보게 만든다. 제목에서 이미 밝히듯,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은 한 줌의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다. 가느다란 빛에 의지해서 목숨을 건지려는 이를 희롱하는, 그 고문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간악한 짓이다. 죄수에게 일생을 건 모험이, 간수들에게는 한낮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이 단편집의 소설들이 ‘잔혹한 이야기’에서 발췌했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겹치는 작품들이 꽤 있어도 충분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작품들이다. 현재 국내에는 이 두 작품만이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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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는 거울 바벨의 도서관 25
조반니 파피니 지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 바다출판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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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는 건 즐겁다. 미지의 작가가 읽는 즐거움을 주었을 때의 감격은 더욱 크다. 우리가 모르는, 훌륭한 작가들은 세계 도처에 있을 것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좋은 작품을 찾아내는 건 모래 속 보석을 발견하는 것처럼 어렵지만 보람있는 일이다. 보르헤스가 기획한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대부분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그건 보르헤스가 ‘쾌락적 독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보르헤스는 책을 읽을 때 ‘미학적 흥분을 느끼고, 모든 평과 의견을 무시한다’고 말한다.(칠일 밤, 보르헤스) 또한 보르헤스는 ‘매혹이란 작가가 가져야할 근본적인 자질’이라고 말했다. 매혹이 없으면, 나머지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렇다면 매혹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매혹은 독서의 쾌락, 재미라는 면과도 통한다고 본다. 하지만 재미를 느끼는 지점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재미는 학습이 필요하기도 하다. 아무런 문학적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보르헤스를 읽기란 어렵다. 그 학습이란 고리타분하거나 현학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재미를 위한 징검다리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반니 파피니라는 작가의 ‘도망가는 거울’은 매혹적인 텍스트였다. 이 작가의 작품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으며, 번역된 소설도 없다. 에세이가 번역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유명세와 작품의 질은 인과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조반니의 작품은 무엇보다 대단히 ‘현대적’이다. 끔찍하게 민감한 자아의 분열을 이처럼 잘 나타낸 작품은 드물다. 먼저 ‘연못 안의 두 이미지’를 보자. 어렸을 때의 자신과 만난 화자의 이야기다. 자기 자신과의 만남, 도플갱어란 주제는 보르헤스의 작품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화자는 ‘영혼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고향에 두고 떠난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와 연못 속에 비친 그와 해후한다. 과거의 나와의 대화는 현재의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와 오랫동안 얘기하는 동안 그가 우스운 생각과 이제는 죽은 이론들, 지금의 나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사물들과 사람들에 대한 지엽적인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는 걸 알았다.’(24)

게르만 민족의 파토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고집, 삶의 비밀들을 전혀 모르는 무지는 처음에는 나를 즐겁게 했지만 점차 지치게 했고, 내 마음에서 경멸 섞인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동정심은 조금씩 거부감으로 변했다.(25)


화자는 예전의 자신을 비웃고 경멸한다. 당시의 나는 과거의 나를 경멸했는데, 또 나는 그 남자를 경멸하는 것이다. 경멸하던 사람과 경멸받던 사람이 같은 이름을 쓰고 같은 곳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는 영원의 이미지와도 비슷하다. 과거의 나를 냉정하게 평가하듯, 미래의 나 또한 지금의 나를 미워하고 부정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계속 반복될 것이다. 두 자아 사이의 단절은 끔찍하다. 지금의 내 생각과 고통을 과거의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한편 ‘너무나 부조리한 이야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소설로 써낸 공포스러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외면과 내면의 삶’을 그대로 그려낸 책이 있다면, 누구도 그 책을 읽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충실하고 고독하고 추악하고 끔찍한 보고서이다. 우리는 우리의 진짜 목적과 숨겨진 의도, 잊으려고 애쓴 기억과 은폐된 진실을 똑바로 볼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도 우리의 평판을 신경쓴다. 가짜 고백과 가짜 회고가 판치는 게 증거다. 누군가에게 완전하게 간파당한다면, 그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신에게 낱낱이 읽힌 인간이 살아갈 의욕을 갖길 바랄 수 있을까?


‘정신적인 죽음’은 인간 정신의 승리에 대한 찬양이다. 정신의 힘만으로 자살하려는 한 청년이 있다. 그가 꿈꾸는 것은, ‘땅에 묻히기 전에 이미 시체가 되어 있는 것, 죽음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것이 되도록 자살하는 것’,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힘만으로 죽는’ 자살이다. 의지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자살을 한다. ‘진지하고 강하게, 지속적으로 죽고 싶어 해야’ 이룰 수 있다는 그 자살은 정신적인 모험의 기록이다.


‘병든 신사의 마지막 방문’은 호접몽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오래된 주제는, 이 소설에서 공포스럽게 반복된다. ‘병든 신사’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꾸는 악몽과 유사하다. ‘노란빛이 감도는 독특한 피부와 여자 같은 가벼운 걸음걸이, 눈에 자주 떠오르던 당혹스러운 표정’은, 꿈 속 인물의 이미지다. 그의 손이 닿으면 물건들은 꿈의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변한다. 그것은 일종의 ‘병’처럼 느껴진다. 사라지기 전날, 그는 화자를 찾아와 대화를 나눈다. 항상 아파보이던 그는, 자신의 ‘증세’를 깨달았다. 그는 누군가가 꾸는 꿈이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를 꿈꿀 때만 그는 존재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의문에 마주친다. ‘나를 꿈꾸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나 꿈 속의 인물은 꿈을 꾸는 자를 볼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꿈꾸는 자는, 일종의 창조자인 셈이다. 하지만 온전한 창조자라고 할 수도 없다. 병든 신사는 자기 의지로 꿈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는 창조자가 꿈을 깨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는 온갖 범죄를 저질러 꿈을 악몽으로 만든다. 하지만 창조자는 꿈을 깨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꿈꾸는 자에게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로 마음먹는다. 왜 그는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꿈’에 속해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에 공포스러워한다.


‘난 더 이상 지금의 나이고 싶지 않다’는 불가능한 욕망을 토로한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 현재의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해진 까닭일 것이다. 화자는 자아를 버리고 새 자아로 이사를 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악마라면 그에게 자살을 권할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원하는 건, ‘존재하고 싶지만 뭔가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화자가 자신이 아니길 원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절대 내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넌 누구냐’는 사람들에게서 하룻동안 완전히 잊혀진 한 사람의 이야기다. 친구들은 정색한 얼굴로 화자에게 예의바르게 묻는다. 실례지만 누구시냐고. 화자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지만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없는 존재’란 육신이 없는 존재보다 훨씬 끔찍하다. ‘죽음보다 더 무섭고 불가사의한’ 경험인 것이다. 영혼이 삭제된 사람은 자신에게 묻는다. ‘넌 누구냐?’라고.


‘추억을 구걸하는 거지’는 ‘보통 사람’에 대한 정의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런데 보통 사람의 평범한 삶이 화자에게 준 감정은 공포였다. ‘그런 단조롭고 평범하고 규칙적이고 예상 가능하고 절제되고 공허한 삶은 너무나 날카로운 슬픔으로, 눈물을 터트리며 도망가고 싶을 만큼 너무나 강렬한 공포로 나를 가득 채웠다’(113) 그의 행복은 무채색이고, 그는 거대한 기계의 위대한 톱니바퀴다. 조용하고 규칙적인 그의 일생은 화자에게 불가사의한 악몽처럼 느껴진다.


‘자살대행’은 친구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자살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서른세살이 되도록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면, 그 삶은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서른세살은 ‘성스러운 나이, 신성한 나이, 완벽한 나이’다. ‘이 시기에 위대한 것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은 천 년을 산다 해도 더 나은 일을 하지 못할 거야. 서른세 살에 자신의 발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다가올 미래를 위해 어떤 전망도 내놓을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의무를 지고 있는 셈이지’(125)라고 말한다. 그는 철저히 무가치한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희망을 품은 유일한 사람인 친구를 위해 자살한다. 친구가 더는 희망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하지도, 공부하지도 않고, 페스트 같은 인간들이랑 어울리면서 말이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 단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는 거지’(127)


조반니의 이 작품들은 소개만으로는 매혹을 전달할 수 없다. 가장 흥미로웠던 ‘돌려받지 못한 하루’는 시간을 재료로 만들어낸 놀라운 작품이다. 조반니의 작품이 더 번역되어 이 흥미로운 만화경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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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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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전업소설가'인 그녀는, 매일 아침 9시에 기상해서 4시까지 소설을 쓰고, 저녁에는 산책과 독서를 한다. 그런 생활을 해 오며 꾸준히 소설을 써서 소설집 한 권과 장편소설 여러 권을 썼다. 예전에 신문에서 그녀의 당선소감을 읽고 약간 놀랐다. 천편일률적으로 '누구누구에게 감사한다'는 말이 가득한 당선소감이 아니라, '나는 나에게 감사한다'였다. 긴 시간의 심연과 고독을 묵묵히 견딘 나에게, 감사한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감탄했다. 무엇보다 그걸 잘 못 견디는 사람이 나였으므로. 그러므로 그런 그녀가 쓴 소설에 어쩐지 더 관심이 갔던 건지도.


지금 외로운 사람, 혼자라는 사실에 고독한 사람, 사랑에 실패한 사람, 가족들에게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 그들에게, 몇 시간 동안의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소설. (그리고 반전도. 반전을 읽기 싫으면 이 글을 건너뛰시길)


한때 말더듬이였던 한 남자가 여행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안내견이었던, 이제는 눈이 멀어 그가 안내해줘야 하는 맹인견 와조와 함께. 그는 더는 일을 하지 않고 통장잔고에 남아 있는 돈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 사진은 찍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그들에게 주소를 묻고, 편지를 쓴다. 사람들은 숫자로 분류되고, 그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그는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에게, 누군가에게 답장이 왔느냐고 매일 전화한다. 하지만 친구는 언제나 편지가 없다고 말한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런 문단이 이어진다. 편지가 오지 않으므로 그의 여행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다, 한 여자와 만난다. 만남이 있어야 소설이진행되긴 하겠지만,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소설을 쓰고 자신이 직접 그 소설을 파는 소설가. 그 여자와 그는 연애 감정따위 없이도 담담하게 함께 어울린다. 그리고 소통, 한다. 여행은 셋이 하게 된다. 여자와 남자, 그리고 눈 먼 개 한 마리.


그들이 묵었던 고시원에서 불이 나고, 늙은 맹인견 와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하지만 사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 남겨진 거였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소통을 간절하게 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편지는, 엄청나게 많이 와 있었다. 그의 옆집 아주머니가 대신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편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소통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길에서 만난 낯모르는 여행자가 보낸, 연필로 써 보낸 편지를, 그들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여행은 무의미한 게 아니었다는 거다. 모두가 그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그가 왜 답장하지 않는지를 궁금해했다. 사실 모두가 편지하고 싶었던 거다.


갑작스럽게 혼자가 된 지금. 혼자라는 게 대체 어떤 것인지 잠시 잊고 있었던 나에게, 이 소설은 혼자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주었다. 혼자라는 건, 혼자이긴 하지만, 사실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혼자이기 ‹š문에 흐르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와조만큼 사랑스러운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그 아이들이 내 곁에서 숨쉬는 한, 나는 소통을 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혼자라는 자각과 함께 시간과 여유를 얻었는지 모른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나날이 이어지겠지만, 나는 여행을 떠나야겠다. 고여 있던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 세상으로 던져넣어야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소중하고, 그걸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던 마음은,상황이 바뀌게 되니 얼마나 또 빨리 바뀌는지. 나는 언제나 현재의 나를 지켜야 하니까. 나를 견뎌내야 하니까. 그래서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 내 삶을 묵묵하게 살아가야 하니까. 그래서 주인공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다. 나 역시 내 안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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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개정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선집 2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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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꽂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대표작인 '재주꾼 리플리'는 아직 못봤다. 대신 민음사에서 출간된 단편전집 네 권을 읽고 있다. 냉소적이며 풍자적인 단편들이 딱 맘에 든다. 여성이면서 동시에 지독한 여성혐오자였다는 그녀의 단편들은 섬뜩하고 예리하다.

특히 중산층의 허위를 낱낱이 폭로하는 단편들은 수작.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는 단지 싫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따돌려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패거리가 등장한다. 별 이유도 없이 친구를 매도하고 아내와 직업을 잃게 한 그들은 모두 우아한 공범.

'노인입양' 기분전환과 가족 코스프레를 위해 양로원에서 노부부를 데려온 부부. 노인들은 집에 도착하자 적대적인 악마로 변한다. 돌려보내려 해도 양로원은 이미 포화 상태다. 위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던 그들은 비극을 외면하며 안락한 삶으로 복귀한다.

'로마에서 생긴 일' 미모, 권력, 부, 명예를 가진 부부가 권태로움에 지쳐 서로를 미워하고 평생 원수로 남는 이야기. 평온하고 행복해보이는 남들의 삶에 온갖 추하고 더러운 음모들이 가득하다는 것. 그들의 몸값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검은 집' 전통과 추억 속에 있는 과거의 집. 모두가 하나씩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진실은 어둠에 가려진 집. 무모한 젊은이가 그 집의 비밀을 밝혀내려고 시도하지만, 그 대가는 쓰다. 과거 조심. 함부로 들어가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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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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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방범을 세 번 읽었다세 권원고지 육천 매라는 분량에 걸맞게다시 읽기는 고된 작업이다나는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다그런데도 앞부분을 읽기 시작하다보면처음부터 다시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휩싸인다나는 범인을 알고범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다그런데도 나는 다시이야기를 탐독한다그건 이 소설에서 범인을 찾는 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1부가 사건의 개요라면, 2부는 사건의 실체다. ‘진범이 누구인지 폭로해버리는 것이다그 사실을 알고서도 모방범의 정교한 세계가 끊임없이 생각의 가지를 뻗게 한다범인을 찾는 탐정도범인이나 피해자 자체도 주인공이라고 하기 어렵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순적이고 병리적인 세계바로 그 세계가 주인공이다그리고 그 세계의 적나라한 모습은 3부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모방범의 진범은 사이코패스 범죄의 전형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인구의2%에 달한다는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으로 감정이 결여된 장애를 가진 것으로 설명된다.원인은 아직 밝혀진 바 없다그들의 감정은 백지 상태에 가깝다쾌감과 불쾌감만이 그들이 제대로 구별해낼 수 있는 감정이다그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건 사회화의 결과이거나 연극에 가깝다문제는 그들의 장애가 다른 사람에게 지극한 피해를 끼친다는 데에 있다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무서운 성향이다쉽사리 범죄자가 되지 않는 건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양심과 도덕에 구애받기 때문이다또한 타인이 당한 고통을 상상할 능력이 있기에 악행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사이코패스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다양심이란 안전핀이 없는 그들은 발각될 위험이 없다면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또한 감정의 폭이 좁은 그들은 극단적인 쾌감을 추구한다남을 지배하며 괴롭히는 건 그들이 스스로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수단이다그 중에서도 타인의 목숨을 좌우하는 건마치 신이라도 된 듯한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진정한 악은 이유 따위는 없어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원한애증그런 이유가 있다면 피해자도 납득을 할 수 있겠지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그거야말로 완벽한 이야.(2)


다만 악을 행하고 싶은완전한 악을 실천하고 싶은 이유로 모방범의 진범은 살인을 계획한다스스로 우월하고선택받은 인간이라 믿는 피스는 거대하고 끔찍한 연극의연출자임을 선언한다광기어린 살인극을 자신의 영리함과 독창성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알리고 싶은 욕망이라니이 얼마나 끔찍한가피스는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장기판의 말로밖에 보지 않는다그는 자신이 역할을 부여한 배우들이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흡족한 모습으로 바라본다그가 선택한 배우들은 죽음을 선고받았고부수적으로 그들의 가족들의 고통도 역할극의 묘미였다그는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과 울분을 희롱하며 쾌감을 느꼈다그리고 공범이자 또 하나의 배우인 히로미의 인생을 파탄으로 이끌었다.


순서를 거슬러 올라가면비극은 히로미의 가족사에서 비롯된다죽은 누나의 이름을 물려받는 히로미는 평생 누나의 그림자 속에서 몸을 빼앗기는 악몽에 시달렸다피스가 선천적인 범죄자형인 사이코패스라면히로미는 후천적인 환경으로 인해 삐뚤어졌다물론 악행에 있어 그들의 차이가 극명한 것은 아니다또한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범죄자가 되었다는 건 어떠한 변명도 될 수 없다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누구나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다범죄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고과오일 뿐이다다만 후천적인 범죄자에게 환경의 개선이나 정신 치료라는 수단이 있었다면비극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가정 폭력은 사적 영역이기에 방관되기 쉽다어린 시절에 입은 치명적인 상처가 끔찍한 살인자가 되는 트라우마로 이어진다고 해도그걸 막을 수단이 뚜렷하지 않다타인의사소한’ 고통에 관심을 갖기에는우리 사회는 지극히 무감하다각자의 고통이 너무 중요하고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 희귀하기에자신의 고통을 돌볼 여유조차 없다그런 히로미에게 손을 내민 건 두 사람이었다히로미의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고 그를 사랑했던 가즈야키와 히로미를 자신의 연극배우로 선택한 피스히로미가 피스를 선택한 건 그 편이 더 그럴싸해보였기 때문이다감정을 꾸미는 영리한 사이코패스는 히로미의 과시욕을 충족시켜주기에 더할 나위없는 친구였다히로미의 우발적인 살인을 피스가 계획적인 살인으로 이어지게 한 것에 반해가즈야키는 그것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난독증과 어눌한 인상 때문에 무시당하곤 하던 가즈야키야말로 히로미를 악에서 꺼내어줄 유일한 친구였던 것이다가즈야키가 히로미와 함께 죽었을 때피스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새로운 극을 준비했을 뿐이다히로미가 피스에게 끌려다닌 건완벽한 악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었다누나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공포 때문이었다타인의 공포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쾌락을 추구하는 피스에게살인이란 그저 인형을 부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배우들에게 남은 삶이 있고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계획 살인이 끝난 후에도 피스는 멈추지 않는다세상을 상대로 도박이라도 벌이듯자신의 범죄를 드러내는 책을 쓴다그는 자신의 살인이 얼마나 뛰어난 계획의 일부였는지를 광고하고 싶어한다이러한 피스의 광기는사이코패스라는 면 외에도 유년 시절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다사생아로 태어난 그에게 존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당위는 그에게피스라는 가면을 쓰게 했다그러나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안간힘은 결국 타인에 대한 의존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누군가 따끔하게 깨우쳐줄 어른이 없었기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비판은 피스가 여전히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그런 면에서 피스도 히로미와 같은 처지일지 모른다.


한편 이 소설에서는 또다른 계획 살인이 등장한다피스의 살인은 절대악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했다그러나 신이치의 가족을 죽인 히구치 일당의 목적은 오직 돈이었다신이치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괴로워한다아버지에게 돈이 생긴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가 그 같은 사고가 났다는 자책감 때문이다무신경한 말이나 행동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바꿔버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신이치를 괴롭히는 건 또 있었다바로 히구치의 딸인 메구미의 존재였다메구미는 집요하게 신이치를 스토킹하며아버지를 만나줄 것을 요구한다아버지의 살인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신이치가 아버지를 용서해줘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다메구미의 존재는 신이치에게 악몽 그 자체였다메구미의 천진무구하기까지 한 악랄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이 소설은 피해자의 가족뿐 아니라 가해자의 가족도 섬세한 시선으로 조명하고 있다메구미 역시 이 비극의 피해자임에는 틀림없다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우리가 어떻게 처신을 하리라 자신하기는 어렵다얄궂게도연쇄살인사건의 진범으로 오인된 가즈야키의 동생인 유미코 역시메구미와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유미코는 더 나아가 오빠의 무고함을 증명하려 한다이 무모한 시도에 대해 사람들이 싸늘한 반응을 보일수록유미코의 간절함은 더해간다피스가 이런 간절함을 볼모로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은 간악하기 이를 데 없다유가족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오빠의 무죄를 주장하려는 유미코는 자신의 모순 때문에 지옥에서 살아야만 한다작가의 시선은 이들의 고통에게까지 머물고 있다.그리고 한 살인사건의 당사자이면서 다른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던 신이치는상처투성이인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그것이 모방범이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서도 끝내 놓지 않는 인간다운 가치다.


또 시게코를 통해 언론이나 출판계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도 작가는 한몫한다르포 작가인 시게코는 사라진 여자들이라는 르포를 쓰기 위해 취재를 시작한다그러나 흥미로운 르포를 써야 한다는 당위와 피해자 가족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모순 사이에서 갈등한다사건을 종합하고 가해자의 인격을 분석하는 그녀의 작업은그저 제삼자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피해자 가족인 요시오 할아버지는 그녀가 늘어놓은살인범들에 대한 그럴싸한 문장들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소중한 손녀딸을 앗아간 범인들의 입으로 직접 그 이유를 듣지 않고서는 용납할 수 없고이해할 수도 없다논리로 무장한 심리 분석은 정작 피해자 가족의 마음에 생채기만 낼 뿐이다오히려 살인범을 둘러싼 요란스러운 행태들을 접할 때마다 묵은 상처가 다시 헤집힌다그렇다면 과연 르포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시게코의 조사가 결국 진범을 잡아내는 데 역할을 한 건 사실이나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르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독자의 알권리는 피해자나 유가족을 어느 정도는 침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건의 전모를 밝히겠다는 야심은 오히려 피스 같은 사이코패스에게 역이용당하기 쉽다대중의 관음증에 전적으로 복무하는 르포들이 이미 넘쳐나고 있다그 책 속에서 피해자들은 수전 손택이 일갈했듯 영원히 살해당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방범은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진상뿐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심리와 사회 구조까지 면밀히 들여다보는 놀라운 소설이다이러한 점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치밀한 두뇌 게임 이상의 의의를 남기는 사회 소설이라 칭할 수 있게 한다인간의 어둡고 괴이한 심연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응시하려는 그 태도는 범죄에 대한 우리의 윤리 의식을 되돌아보게 한다가해자와 피해자로 이분된 사건에 대해 우리는 쉽게 선악 판단을 내린다그러나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에서 보이듯진실이란 그저 각각의 조각난 입장일 뿐일지도 모른다그러므로 판단은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 시작해야 한다가해자의 가족피해자의 가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진실이란 얼마나 다른가제삼자의 시각에서 함부로 발설한 말들이거짓 선동의 깃발로 쓰이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그러나 우리는 기준 자체가 사라져버린 회색지대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범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그 기준은 인류가 쌓아온 윤리 의식이라는약하지만 디딜 수밖에 없는 지반 위에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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