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방범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모방범’을 세 번 읽었다. 세 권, 원고지 육천 매라는 분량에 걸맞게, 다시 읽기는 고된 작업이다. 나는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앞부분을 읽기 시작하다보면,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휩싸인다. 나는 범인을 알고, 범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이야기를 탐독한다. 그건 이 소설에서 범인을 찾는 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1부가 사건의 개요라면, 2부는 사건의 실체다. ‘진범’이 누구인지 폭로해버리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서도 ‘모방범’의 정교한 세계가 끊임없이 생각의 가지를 뻗게 한다. 범인을 찾는 탐정도, 범인이나 피해자 자체도 주인공이라고 하기 어렵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순적이고 병리적인 세계, 바로 그 세계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적나라한 모습은 3부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모방범’의 진범은 사이코패스 범죄의 전형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인구의2%에 달한다는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으로 감정이 결여된 장애를 가진 것으로 설명된다.원인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들의 감정은 백지 상태에 가깝다. 쾌감과 불쾌감만이 그들이 제대로 구별해낼 수 있는 감정이다. 그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건 사회화의 결과이거나 연극에 가깝다. 문제는 그들의 장애가 다른 사람에게 지극한 피해를 끼친다는 데에 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무서운 성향이다. 쉽사리 범죄자가 되지 않는 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양심과 도덕에 구애받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이 당한 고통을 상상할 능력이 있기에 악행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이코패스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다. 양심이란 안전핀이 없는 그들은 발각될 위험이 없다면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감정의 폭이 좁은 그들은 극단적인 쾌감을 추구한다. 남을 지배하며 괴롭히는 건 그들이 스스로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수단이다. 그 중에서도 타인의 목숨을 좌우하는 건, 마치 신이라도 된 듯한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진정한 악은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있다면 피해자도 납득을 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거야말로 완벽한 ‘악’이야.(2권)
다만 악을 행하고 싶은, 완전한 악을 실천하고 싶은 이유로 ‘모방범’의 진범은 살인을 계획한다. 스스로 우월하고, 선택받은 인간이라 믿는 ‘피스’는 거대하고 끔찍한 연극의‘연출자’임을 선언한다. 광기어린 살인극을 자신의 영리함과 독창성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알리고 싶은 욕망이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가! 피스는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장기판의 말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역할을 부여한 배우들이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흡족한 모습으로 바라본다. 그가 선택한 ‘배우들’은 죽음을 선고받았고, 부수적으로 그들의 가족들의 고통도 역할극의 묘미였다. 그는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과 울분을 희롱하며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공범이자 또 하나의 ‘배우’인 히로미의 인생을 파탄으로 이끌었다.
순서를 거슬러 올라가면, 비극은 히로미의 가족사에서 비롯된다. 죽은 누나의 이름을 물려받는 히로미는 평생 누나의 그림자 속에서 몸을 빼앗기는 악몽에 시달렸다. 피스가 선천적인 범죄자형인 사이코패스라면, 히로미는 후천적인 환경으로 인해 삐뚤어졌다. 물론 악행에 있어 그들의 차이가 극명한 것은 아니다. 또한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범죄자가 되었다는 건 어떠한 변명도 될 수 없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누구나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다. 범죄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고, 과오일 뿐이다. 다만 후천적인 범죄자에게 환경의 개선이나 정신 치료라는 수단이 있었다면, 비극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 폭력은 사적 영역이기에 방관되기 쉽다. 어린 시절에 입은 치명적인 상처가 끔찍한 살인자가 되는 트라우마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걸 막을 수단이 뚜렷하지 않다. 타인의‘사소한’ 고통에 관심을 갖기에는, 우리 사회는 지극히 무감하다. 각자의 고통이 너무 중요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 희귀하기에, 자신의 고통을 돌볼 여유조차 없다. 그런 히로미에게 손을 내민 건 두 사람이었다. 히로미의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고 그를 사랑했던 가즈야키와 히로미를 자신의 연극배우로 선택한 피스. 히로미가 피스를 선택한 건 그 편이 더 그럴싸해보였기 때문이다. 감정을 꾸미는 영리한 사이코패스는 히로미의 과시욕을 충족시켜주기에 더할 나위없는 친구였다. 히로미의 우발적인 살인을 피스가 계획적인 살인으로 이어지게 한 것에 반해, 가즈야키는 그것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난독증과 어눌한 인상 때문에 무시당하곤 하던 가즈야키야말로 히로미를 악에서 꺼내어줄 유일한 친구였던 것이다. 가즈야키가 히로미와 함께 죽었을 때, 피스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새로운 극’을 준비했을 뿐이다. 히로미가 피스에게 끌려다닌 건, 완벽한 악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었다. 누나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공포 때문이었다. 타인의 공포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쾌락을 추구하는 피스에게, 살인이란 그저 인형을 부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배우’들에게 남은 삶이 있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계획 살인이 끝난 후에도 피스는 멈추지 않는다. 세상을 상대로 도박이라도 벌이듯, 자신의 범죄를 드러내는 책을 쓴다. 그는 자신의 살인이 얼마나 뛰어난 계획의 일부였는지를 광고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피스의 광기는, 사이코패스라는 면 외에도 유년 시절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에게 존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당위는 그에게‘피스’라는 가면을 쓰게 했다. 그러나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안간힘은 결국 타인에 대한 의존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누군가 따끔하게 깨우쳐줄 어른’이 없었기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비판은 피스가 여전히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면에서 피스도 히로미와 같은 처지일지 모른다.
한편 이 소설에서는 또다른 계획 살인이 등장한다. 피스의 살인은 ‘절대악’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신이치의 가족을 죽인 히구치 일당의 목적은 오직 돈이었다. 신이치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괴로워한다. 아버지에게 돈이 생긴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가 그 같은 사고가 났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무신경한 말이나 행동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바꿔버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신이치를 괴롭히는 건 또 있었다. 바로 히구치의 딸인 메구미의 존재였다. 메구미는 집요하게 신이치를 스토킹하며, 아버지를 만나줄 것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살인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신이치가 아버지를 용서해줘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메구미의 존재는 신이치에게 악몽 그 자체였다. 메구미의 천진무구하기까지 한 악랄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소설은 피해자의 가족뿐 아니라 가해자의 가족도 섬세한 시선으로 조명하고 있다. 메구미 역시 이 비극의 피해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처신을 하리라 자신하기는 어렵다. 얄궂게도,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으로 오인된 가즈야키의 동생인 유미코 역시, 메구미와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 유미코는 더 나아가 오빠의 무고함을 증명하려 한다. 이 무모한 시도에 대해 사람들이 싸늘한 반응을 보일수록, 유미코의 간절함은 더해간다. 피스가 이런 간절함을 볼모로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은 간악하기 이를 데 없다. 유가족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오빠의 무죄를 주장하려는 유미코는 자신의 모순 때문에 지옥에서 살아야만 한다. 작가의 시선은 이들의 고통에게까지 머물고 있다.그리고 한 살인사건의 당사자이면서 다른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던 신이치는, 상처투성이인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것이 ‘모방범’이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서도 끝내 놓지 않는 인간다운 가치다.
또 시게코를 통해 언론이나 출판계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도 작가는 한몫한다. 르포 작가인 시게코는 ‘사라진 여자들’이라는 르포를 쓰기 위해 취재를 시작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르포를 써야 한다는 당위와 피해자 가족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모순 사이에서 갈등한다. 사건을 종합하고 가해자의 인격을 분석하는 그녀의 작업은, 그저 제삼자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피해자 가족인 요시오 할아버지는 그녀가 늘어놓은, 살인범들에 대한 그럴싸한 문장들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소중한 손녀딸을 앗아간 범인들의 입으로 직접 그 이유를 듣지 않고서는 용납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논리로 무장한 심리 분석은 정작 피해자 가족의 마음에 생채기만 낼 뿐이다. 오히려 살인범을 둘러싼 요란스러운 행태들을 접할 때마다 묵은 상처가 다시 헤집힌다. 그렇다면 과연 르포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시게코의 조사가 결국 진범을 잡아내는 데 역할을 한 건 사실이나,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르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독자의 알권리는 피해자나 유가족을 어느 정도는 침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건의 전모를 밝히겠다는 야심은 오히려 피스 같은 사이코패스에게 역이용당하기 쉽다. 대중의 관음증에 전적으로 복무하는 르포들이 이미 넘쳐나고 있다. 그 책 속에서 피해자들은 수전 손택이 일갈했듯 ‘영원히 살해당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방범’은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진상뿐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심리와 사회 구조까지 면밀히 들여다보는 놀라운 소설이다. 이러한 점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치밀한 두뇌 게임 이상의 의의를 남기는 사회 소설이라 칭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어둡고 괴이한 심연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응시하려는 그 태도는 범죄에 대한 우리의 윤리 의식을 되돌아보게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이분된 사건에 대해 우리는 쉽게 선악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에서 보이듯, 진실이란 그저 각각의 조각난 입장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판단은,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 시작해야 한다. 가해자의 가족, 피해자의 가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진실이란 얼마나 다른가. 제삼자의 시각에서 함부로 발설한 말들이, 거짓 선동의 깃발로 쓰이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그러나 우리는 기준 자체가 사라져버린 회색지대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범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 기준은 인류가 쌓아온 윤리 의식이라는, 약하지만 디딜 수밖에 없는 지반 위에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