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는 거울 바벨의 도서관 25
조반니 파피니 지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 바다출판사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는 건 즐겁다. 미지의 작가가 읽는 즐거움을 주었을 때의 감격은 더욱 크다. 우리가 모르는, 훌륭한 작가들은 세계 도처에 있을 것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좋은 작품을 찾아내는 건 모래 속 보석을 발견하는 것처럼 어렵지만 보람있는 일이다. 보르헤스가 기획한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대부분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그건 보르헤스가 ‘쾌락적 독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보르헤스는 책을 읽을 때 ‘미학적 흥분을 느끼고, 모든 평과 의견을 무시한다’고 말한다.(칠일 밤, 보르헤스) 또한 보르헤스는 ‘매혹이란 작가가 가져야할 근본적인 자질’이라고 말했다. 매혹이 없으면, 나머지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렇다면 매혹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매혹은 독서의 쾌락, 재미라는 면과도 통한다고 본다. 하지만 재미를 느끼는 지점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재미는 학습이 필요하기도 하다. 아무런 문학적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보르헤스를 읽기란 어렵다. 그 학습이란 고리타분하거나 현학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재미를 위한 징검다리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반니 파피니라는 작가의 ‘도망가는 거울’은 매혹적인 텍스트였다. 이 작가의 작품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으며, 번역된 소설도 없다. 에세이가 번역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유명세와 작품의 질은 인과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조반니의 작품은 무엇보다 대단히 ‘현대적’이다. 끔찍하게 민감한 자아의 분열을 이처럼 잘 나타낸 작품은 드물다. 먼저 ‘연못 안의 두 이미지’를 보자. 어렸을 때의 자신과 만난 화자의 이야기다. 자기 자신과의 만남, 도플갱어란 주제는 보르헤스의 작품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화자는 ‘영혼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고향에 두고 떠난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와 연못 속에 비친 그와 해후한다. 과거의 나와의 대화는 현재의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와 오랫동안 얘기하는 동안 그가 우스운 생각과 이제는 죽은 이론들, 지금의 나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사물들과 사람들에 대한 지엽적인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는 걸 알았다.’(24)

게르만 민족의 파토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고집, 삶의 비밀들을 전혀 모르는 무지는 처음에는 나를 즐겁게 했지만 점차 지치게 했고, 내 마음에서 경멸 섞인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동정심은 조금씩 거부감으로 변했다.(25)


화자는 예전의 자신을 비웃고 경멸한다. 당시의 나는 과거의 나를 경멸했는데, 또 나는 그 남자를 경멸하는 것이다. 경멸하던 사람과 경멸받던 사람이 같은 이름을 쓰고 같은 곳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는 영원의 이미지와도 비슷하다. 과거의 나를 냉정하게 평가하듯, 미래의 나 또한 지금의 나를 미워하고 부정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계속 반복될 것이다. 두 자아 사이의 단절은 끔찍하다. 지금의 내 생각과 고통을 과거의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한편 ‘너무나 부조리한 이야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소설로 써낸 공포스러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외면과 내면의 삶’을 그대로 그려낸 책이 있다면, 누구도 그 책을 읽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충실하고 고독하고 추악하고 끔찍한 보고서이다. 우리는 우리의 진짜 목적과 숨겨진 의도, 잊으려고 애쓴 기억과 은폐된 진실을 똑바로 볼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도 우리의 평판을 신경쓴다. 가짜 고백과 가짜 회고가 판치는 게 증거다. 누군가에게 완전하게 간파당한다면, 그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신에게 낱낱이 읽힌 인간이 살아갈 의욕을 갖길 바랄 수 있을까?


‘정신적인 죽음’은 인간 정신의 승리에 대한 찬양이다. 정신의 힘만으로 자살하려는 한 청년이 있다. 그가 꿈꾸는 것은, ‘땅에 묻히기 전에 이미 시체가 되어 있는 것, 죽음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것이 되도록 자살하는 것’,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힘만으로 죽는’ 자살이다. 의지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자살을 한다. ‘진지하고 강하게, 지속적으로 죽고 싶어 해야’ 이룰 수 있다는 그 자살은 정신적인 모험의 기록이다.


‘병든 신사의 마지막 방문’은 호접몽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오래된 주제는, 이 소설에서 공포스럽게 반복된다. ‘병든 신사’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꾸는 악몽과 유사하다. ‘노란빛이 감도는 독특한 피부와 여자 같은 가벼운 걸음걸이, 눈에 자주 떠오르던 당혹스러운 표정’은, 꿈 속 인물의 이미지다. 그의 손이 닿으면 물건들은 꿈의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변한다. 그것은 일종의 ‘병’처럼 느껴진다. 사라지기 전날, 그는 화자를 찾아와 대화를 나눈다. 항상 아파보이던 그는, 자신의 ‘증세’를 깨달았다. 그는 누군가가 꾸는 꿈이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를 꿈꿀 때만 그는 존재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의문에 마주친다. ‘나를 꿈꾸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나 꿈 속의 인물은 꿈을 꾸는 자를 볼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꿈꾸는 자는, 일종의 창조자인 셈이다. 하지만 온전한 창조자라고 할 수도 없다. 병든 신사는 자기 의지로 꿈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는 창조자가 꿈을 깨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는 온갖 범죄를 저질러 꿈을 악몽으로 만든다. 하지만 창조자는 꿈을 깨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꿈꾸는 자에게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로 마음먹는다. 왜 그는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꿈’에 속해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에 공포스러워한다.


‘난 더 이상 지금의 나이고 싶지 않다’는 불가능한 욕망을 토로한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 현재의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해진 까닭일 것이다. 화자는 자아를 버리고 새 자아로 이사를 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악마라면 그에게 자살을 권할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원하는 건, ‘존재하고 싶지만 뭔가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화자가 자신이 아니길 원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절대 내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넌 누구냐’는 사람들에게서 하룻동안 완전히 잊혀진 한 사람의 이야기다. 친구들은 정색한 얼굴로 화자에게 예의바르게 묻는다. 실례지만 누구시냐고. 화자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지만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없는 존재’란 육신이 없는 존재보다 훨씬 끔찍하다. ‘죽음보다 더 무섭고 불가사의한’ 경험인 것이다. 영혼이 삭제된 사람은 자신에게 묻는다. ‘넌 누구냐?’라고.


‘추억을 구걸하는 거지’는 ‘보통 사람’에 대한 정의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런데 보통 사람의 평범한 삶이 화자에게 준 감정은 공포였다. ‘그런 단조롭고 평범하고 규칙적이고 예상 가능하고 절제되고 공허한 삶은 너무나 날카로운 슬픔으로, 눈물을 터트리며 도망가고 싶을 만큼 너무나 강렬한 공포로 나를 가득 채웠다’(113) 그의 행복은 무채색이고, 그는 거대한 기계의 위대한 톱니바퀴다. 조용하고 규칙적인 그의 일생은 화자에게 불가사의한 악몽처럼 느껴진다.


‘자살대행’은 친구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자살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서른세살이 되도록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면, 그 삶은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서른세살은 ‘성스러운 나이, 신성한 나이, 완벽한 나이’다. ‘이 시기에 위대한 것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은 천 년을 산다 해도 더 나은 일을 하지 못할 거야. 서른세 살에 자신의 발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다가올 미래를 위해 어떤 전망도 내놓을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의무를 지고 있는 셈이지’(125)라고 말한다. 그는 철저히 무가치한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희망을 품은 유일한 사람인 친구를 위해 자살한다. 친구가 더는 희망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하지도, 공부하지도 않고, 페스트 같은 인간들이랑 어울리면서 말이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 단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는 거지’(127)


조반니의 이 작품들은 소개만으로는 매혹을 전달할 수 없다. 가장 흥미로웠던 ‘돌려받지 못한 하루’는 시간을 재료로 만들어낸 놀라운 작품이다. 조반니의 작품이 더 번역되어 이 흥미로운 만화경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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