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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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소설가이며 에세이스트인 그의 이 책은,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현대인의 '불안'을 탐구하고 있다. 다 아는 얘기긴 해도 체계적으로 정리된 글을 읽는 것은 반갑다. 대단히 획기적이거나 놀라운 생각을 제시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이 책은 불안의 유래, 의미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면서 독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고 있다.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답이 없는 세상이다. 결국 자신의 일상 속으로 되돌아오고 말겠지만, 불안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잠깐의 위안이 될 수는 있다. 다만 죽음을 생각하며 염세적이 되는 것은 긍정적인 영향 같지는 않다. 죽음 이후의 사후 세계를 전혀 믿지 않으며, 죽음 후에는 오로지 영원한 무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를 이루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 후의 영광이 내게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신경 쓰는 이 '살아 있는 나'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살아서 숨쉬는 이 수많은 '죽음 뒤의 무를 예약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이루려 하는 것일까? 


높이 치솟아 가는 욕망과 이전투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저승까지 돈을 싸 가지고 가지 못하면서도 돈을 계속 모으는 것은, '더 많은 돈'이 '더 많은 명예'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라고 보통은 정의했다. 그렇기에 부자는 더 부자가 되려고 안달을 한다는 것이다. 명예의 기준이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종류의 명예를 얻을 생각이 없어도,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원한다. 더 많은 돈이 안락한 삶을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더 많은 돈이 목표인 삶이, 괴로워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삶보다 더 나아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돈이란 목표는 너무나 단순명쾌하고 즐거우며 쉽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는 시간을 줄일수록 돈을 버는 시간은 많아진다. 돈을 버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따라서 걱정도 줄어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제대로 사는 걸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 그러나 그렇게 불안을 따라가며 살아간 인생을 후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을 던져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에 후회 없을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이정표가 되어 주는 별이 사라진 지금, 발 붙이고 있는 땅은 혼란과 불안만을 가중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21)


우리는 무력하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부모의 돌봄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했다. 아기는 물론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세속적인 보답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아기는 그냥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즉 발가벗겨진 상태의 정체성으로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는 것이다. 아기는 그 통제할 수 없는,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특성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애정은 성취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예의를 지킨다든가, 학교나 다른 곳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든가, 계급이나 명성을 얻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훌륭한 행동으로 남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근저에 깔린 감정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 부엌 바닥에 집짓기 블록을 늘어놓기만 해도, 부드럽고 통통한 몸을 뒤치며 믿음이 담긴 눈으로 말똥말똥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를 끌어안아주었던 그 관대하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다시 붙잡고 싶기 때문이다.(30)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안 되지, 얘야.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도 싫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5)


사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38)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 인구 대다수는 농민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가난했고, 영양 상태가 부실했고, 추위와 공포에 시달렸고,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고통을 겪다가 죽곤 했다. 평생 일을 해도 그들의 손에 남는 가장 값비싼 소유물은 암소나 염소나 항아리에 불과했다. 기근은 늘 가끼이에 있었고 병은 어디에나 만연했다.(45)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56)


그러나 어떤 것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심리를 생각해보면 이런 박탈감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떤 것-예를 들어 부나 존중-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건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고, 중세 조상의 생활과 비교하여 판단할 수도 없다.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가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다고 강조하는 소리를 들어봤자 전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오직 우리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만큼 가졌을 때, 또는 그보다 약간 더 가졌을 때만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56)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58)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일반 병사는 상사나 상병에게 느끼는 것에 비교하면 장군에게는 전혀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뛰어난 작가 역시 평범한 삼류작가보다는 자신에게 좀 더 접근한 작가들로부터 질투를 더 받는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 데이비드 흄(59)


왜 어떤 사람은 땅을 갈아야 할 운명이고 어떤 사람은 연회장에서 잔치를 즐길 운명이냐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지배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창조주의 의지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 국가의 모든 기관은 인간 신체의 여러 기관에 비유할 수 있다. 통치자는 머리이고, 의회는 심자이며, 법원은 허리이고, 관리와 판사는 눈, 귀, 혀이고, 재무 담당자들은 배와 내장이고, 군대는 손이며, 농민과 노동자는 발이다. 이 이미지에 따르면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는 바꿀 수 없는 역할이 할당되어 있으며, 농민이 영주의 저택에 살면서 정부의 일에 대해 발언을 하는 것은 발가락이 눈이 되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해괴망측한 일이었다.(62)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게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귀족 계급의 지원을 받는 왕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 사회는 그 참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맛보기 어려운 몇 가지 행복을 누렸다. 민중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신분 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도자와 동등해지기를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갔지만 반감을 품지도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신이 정해준 불가피한 고난이라고 생각했다. 농노는 자신의 열등한 위치가 불변의 자연 질서의 결과라고 여겼다. 사회는 불평등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지는 않았다.(67)


가난한 시민은 부자 시민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했으며, 언젠가는 그들의 뒤를 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늘 틀린 것은 아니었다. 초라한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큰 부를 일군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예외가 규칙이 될 수는 없었다. 미국에도 여전히 최하층 빈민이 있었다. 그러나 귀족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기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68)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71)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은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감이기도 하다.(71)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80)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82)


경제적인 능력주의 사회에서 상속이나 다른 유리한 조건 없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개인은 과거 아버지에게서 돈과 저택을 물려받았던 귀족은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개인적 정당성의 요소를 확보했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 실패는 과거에 삶의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던 농민은 다행스럽게도 겪을 필요가 없었던 수치감과 연결되었다. 경제적 능력주의와 더불어 어떤 영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 ‘불운하다’고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되었다. 따라서 빈자들은 이제 부자들의 자선과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자수성가한 강건한 개인들의 눈에는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 사회진화론자들은 모든 인간이 처음에는 돈, 일자리, 존경이라는 빈약한 자원을 놓고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쟁에서 일부는 우위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부당한 이점이나 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뒤처진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은 더 힘이 세며, 그들의 씨는 더 강하며, 그들의 정신은 더 빈틈없다.(113)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119)


전통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위대한 야망은 이러한 방정식의 전체적인 역전을 제도화하고, 세습 특권과 세습 비특권을 없애 개인적 성취가 지위를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개인적 성취란 주로 경제적 성취를 의미했다.(123)


고대 그리스인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재능을 뮤즈라는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서사시, 역사, 연애시, 음악, 비극, 찬가, 춤, 희극, 천문학을 담당하는 뮤즈가 다 따로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든 그 사람은 자신의 재능이 진정한 자기 것이 결코 아니며, 이 예민한 신들의 마음이 바뀌면 한 방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125)


사람은 거짓되고, 음험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신의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된 일은 없을 것이다. - 구이차르디니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와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 마키아벨리(130)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며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 쇼펜하우어(165)


이렇게 인간성을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_-;) 도덕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합리성과 진실한 마음을 갖추고, 관습이나 허영이나 격식 같은 상류 사회의 소도구 없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만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대가로 우리는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샹포르(166)


이 세상에서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은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167)


교양은 새로 나온 책을 비평하는 사람에게는 바람직한 특질이며, 순문학을 하는 사람에게도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일상생활이나 정치에 적용할 경우 이것은 편협한 흠잡기, 이기적 편안함의 추구, 우유부단한 행동을 의미한다. 교양인은 살아 있는 인간들 가운에 가장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 뻔한 현학과 양식 결여라는 면에서 어떤 사람도 그와 동급이 될 수 없다. 그에게는 어떤 가정도 비현실적이지 않으며, 어떤 목적도 비실용적이지 않다. - 해리슨(171)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력, 용기, 지능, 체력이다. (248)


물자를 아주 많이 소유하는 것은 이 물자가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명예를 제공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일이 된다. (250)


부자가 되는 사람이나 빈자가 되는 사람이나 딱히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다. (..) 즉 소득과 명예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다. 수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운과 환경도 있고, 병과 공포도 있고, 우연과 뒤늦은 발달도 있고, 적절한 시운과 불행도 있다.(256)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268)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직업에 포함된 많은 것이 편집되고 오직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만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269)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에 대한 공격의 핵심은 이것이 우선순위를 엄청나게 왜곡하여, 물질적 축적 과정을 가장 놓은 수준의 성취로 치켜세웠다는 것이다.(269)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 러스킨(271)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298)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용기를 얻어 사회의 기대 가운에 정당성이 없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해골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300)


바니타스 미술의 목적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으로 그 소유자를 우울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경험의 구체적인 면에서 결함을 찾아낼 용기를 주고, 동시에 사랑, 선, 신실, 겸손, 친절 등의 미덕에 좀 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질 자유를 주었다.(306)


현자, 귀족, 권력가, 왕, 정복자/죽음은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왜 한 시간의 영광을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쓰는가?/부의 냇물에서 거닐고 명성이 높이 치솟으면 뭐하는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도 “여기 그가 누워 있다”에서 끝이 나고/가장 고귀한 노래도 “흙에서 흙으로”가 마무리를 하는데. - 에드워드 영(309)


문장의 자랑, 권력의 허세, 모든 아름다움, 모든 부가, 똑같이 불가피한 순간을 기다린다. 영광의 길은 무덤으로 통할 뿐 - 토머스 그레이(310)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질 운명이다. 영원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들 가운데 중요하다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 우리의 불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획과 관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가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따라서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315)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든 가장 힘 센 인간과 커다란 자연-큰 사막, 높은 산, 빙하와 대양-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320)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인간적인 깨달음이다.(330)


스위스에서는 가장 큰 도시에 가도 낯선 사람들과 함께 버스나 열차를 타는 일을 피하고 싶은 욕구가 로스앤젤레스나 런던만큼 강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취리히의 최고 수준은 전차 네트워크 때문이다. 취리히의 전차는 청결하고, 안전하고, 따뜻하며, 그 정확성과 기술적 솜씨라는 면에서 교훈적이기도 하다. 불과 몇 프랑이면 효율적이고 당당한 전차를 타고 황제도 부러워할 만한 안락함을 느끼며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으니 굳이 혼자서 여행을 할 이유가 없다.(333)


샤를 보들레르는 시인, 그리고 더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전사’가 되지 않고는 어떤 일을 하든 영혼이 망가진다고 선언했다.(356)


개인 변호사나 직물 제조업자나 영리한 은행가의 활동적이고, 근면하고, 품위 있고, 긍정적인 생활은 부로 보답을 받지 부드러운 감각으로 보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의 심장은 조금씩 굳어간다. 주말마다 2000명의 노동자에게 주급을 주는 사람들은 이런 책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늘 유용하고 긍정적인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스탕달(359)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소로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즐겨 쓰기 좋아했다.(363)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그들은 돈과 공적인 지위가 궁극적으로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사람과 몇 분간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오직 부르주아적 영웅들의 공적만 보도하면서 다른 대안적 야심의 가치를 은근히 우습게 여기는 잡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의 평정이 흔들리고 우리의 헌신적인 태도가 도전에 부딪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364)


보헤미안들의 주장에 따르면, 상업적 성공 능력보다 어떤 사람의 윤리적 상상력의 한계를 명백히 보여주는 표시도 없다.(366)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에머슨의 말에 따르면, 어떻게 살고, 옷을 입고, 먹고,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고귀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에머슨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순응이니 조화니 하는 이야기는 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372)


다다의 창립자 트리스탄 차라는 1915년에 취리히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똑똑한 사람은 표준적 유형이 되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백치다. 다다는 모든 곳에서 백치적인 것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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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이영조 지음 / 풍림 / 198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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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등학교 때 읽고 전율했던 이 소설을, 서점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1987년에 발행된 책인데, 재판을 하지 않아서 책이 없는 것이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해서, 바로 샀다. 내가 읽었던 그 판이 맞다. 그리고 감동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1987년에 번역된 것이라 말투나 외래어 표현 등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많았지만, 내용이 좋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랴. 도대체 이렇게 좋은 책은 왜 번역을 안 하고 내버려 두는 것일까?


레이몽 훠스카. 그는 1297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 600년 간의 이야기를, 배우인 레진느에게 들려주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불사의 인간이라니, 정말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레이몽이 만난 숱한 사람들은 불사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불사인 그를 저주하고, 그의 곁을 떠난다. 사랑하던 여인도, 아들도 마찬가지다.


배우인 레진느는 자신의 삶을 좀 더 열정적으로, 치열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녀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두 사람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나는 말을 나누고 있는 나, 또 하나는 말을 듣고 있는 나. 그래서 한 사람은 살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나를 사랑할 수 있을 터인데! 난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터인데. (16)’ 더구나 그녀는 자기 존재가 보잘것 없다는 것에 대해 미치도록 절망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성인이 지나치게 많았고, 성녀 또한 남아돌고 있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평등하고 보편적인 자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25)’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는 많은 인간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그리고 그녀 역시 무엇 하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릴 이 호텔의 변함 없는 방을 증오했다.(29)’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다만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외한 정도로만 사랑을 줄 수 있다. ‘그녀는 그의 계산된 상냥함, 지성이 뒷받침된 헌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넋도, 몸도 그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해서 그녀가 품을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그에게 쏟고 있었다.(34)’


그리고 우연히,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는 레이몽을 관찰하다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금 ‘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 레이몽은 거부한다. 그러나 레진느는 끊임없이 그를 독촉한다. 그는 ‘나는 살고 있어. 그런데도 나는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소. 나는 결코 죽지 않을 테지. 그래서 내게는 미래도 없어. 나는 그 누구도 아닌 것입니다. 내게는 결국 역사도 없고, 얼굴도 없는 것입니다.(49)’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윽고 ‘나를 밤과 무관심에서 구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여자들 속에서 당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세계가 다시금 그 모양을 되찾을 것입니다. 눈물이나 미소나, 기대나 두려움이 생겨날 테지요. 나는 산 인간이 되는 겁니다.(61)’ 그는 또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로 끝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레진느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아름다움과 젊음이 덧없으며 그녀 존재가 하나의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녀는 시도하고 있었다. 한 집안의 주인역의 연기를, 영광의 연기를, 유혹의 연기를. 그것은 모두 오직 하나의 연기, 존재의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104)’


그리고 이윽고 그는 레진느에게, 자신의 600년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어느 거지가 떠벌리는 불사의 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먼저 생쥐에게 시험해본다. 그리고 그걸 마시기를 반대하는 까뜨린느의 말을 무시하고, 결국 불사의 몸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음을 겪는다. ‘나의 아내는 죽어 있었다. 그 아들도, 손자도. 나의 모든 반려는 죽어 있었다. 나만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닮은 것은 이제는 세상 천지에 아무 것도 없었다. 과거는 내게서 떼어내어져 버렸다. 이제는 나를 묶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억도, 사랑도, 의무도.(153)’


나는 눈을 떴고, 지루해 있었다. 나는 침대 밑으로 뛰어 내렸다.

- 하지만 이 세상에서 무얼 바랄 수 있지?

- 많이 있습니다.

나는 웃어젖혔다. 그녀를 만족시키기란 손쉬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까뜨린느를 파묻은 그날, 이제는 아무 것도, 그 어디에도 나를 기다리는 것이 없어진 그날처럼 팔에 힘이 없는 것을 느꼈다.(165)


그는 까뜨린느의 죽음 이후, 아들을 통해 기쁨을 느끼고자 한다. 그는 아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키고, 전쟁으로 인해 그를 잃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격리하여 보호한다. 그리고 ‘이 아이의 운명을 만들어 준 것은 나인 것이다. 앙뜨완느가 웃는 소리를 들으면,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뛰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생명을 준 것이다. 또한 세계를 준 것이다.(170)’라고 생각하며 만족감을 느낀다. 그리고 길에서 만난 베아트리스를 성에 머무르게 하며, 그녀와 앙뜨완느가 우정을 누리게 한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앙뜨완느를 사랑하고, 앙뜨완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레이몽의 비밀을 모르는데도, 레이몽에게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당당하다. 나이는 고작 ‘22세! 그러나 그녀는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녀는 몇 세기 전부터 이 세상에 살고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이 세상을 자기집 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재판하고 있었다.(176)’


앙뜨완느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증명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레이몽은 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억지로 베아트리스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그의 비밀을 알게 된 베아트리스는, 평생 그에게 다정한 키스 한 번 해주지 않았다.


- 아뇨, 당신은 악마는 아닙니다. 나는 악마를 믿지 않아요.

- 그렇다면?

- 당신은 인간이 아닌 거예요.

그녀는 느닷없이 사나운 투로 말했다.

- 당신은 죽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쓰러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그녀의 눈 안쪽에 나를 보았다. 죽어 있는 나를. 겨울도, 꽃도 모르는 삼나무처럼 죽어 있는 나를.(180)

- 당신 곁에서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걸 모르시나요? 당신은 모든 욕망을 죽여버려요. 그저 줄 뿐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아기의 장난감밖엔 주지를 못해요. 앙뜨완느가 죽음을 택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당신은 그 사람한테 다른 생존법을 허용치 않았던 거죠.(182)

- 정말 나를 사랑할 수는 없는가?

- 그 얘기는 그만두도록 해요.

그녀는 이내 말했다.

- 나를 사랑해준다면, 만사는 달라질 텐데.

- 훨씬 전부터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됐어요.

-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아.

나는 흐린 큰 거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주름살 하나 없는 장년의 사나이. 이 근육이 우람스러운 몸은 피로를 몰랐다. 나는 그 무렵의 어떤 사나이보다도 컸다.

- 나는 그렇듯 보기 싫은 인간인가?

나는 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 앞에 마주앉았다.

- 네가 앙뜨완느 가운데에 사랑한 것이 내게는 아마 없는 모양이지? (..) 나는 알고 있어. 그 애는 아름답고, 너그럽고 용기가 있는 데다가 높은 긍지를 갖고 있었지. 내게는 그런 덕이 하나도 없나?

- 당신이 나쁘신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고 있는 거죠.(..)앙뜨완느가 호수로 뛰어들었을 때, 또 돌격의 선두에 섰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목숨을 걸고 이기에 그를 찬미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용기란 뭔가요? 당신은 당신의 부귀, 당신의 시간, 당신의 노고를 아낌없이 줍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남에게 주는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 정도의 숱한 목숨을 갖고 계십니다. 나는 그 사람의 긍지도 사랑했어요. 그러나 당신은 예외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그걸 알고 계십니다. 그래가지고는 내 마음은 움직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녀는 증오도, 연민도 담지 않은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말을 통해 오랫동안 잊어왔던 과거의 목소리, 고뇌를 담아 말한 까뜨린느의 목소리를 들었다.

- 내가 하는 것, 나라는 인간은 내가 불사라는 이유로 네 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거냐?

- 그래요. 그렇습니다. 저 여자가 노래하는 것을 들어보세요. 만약 저 여자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저 여자의 노래는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을 걸요.

- 그렇다면 저것은 하나의 저주가 아닌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렇지만 나는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살아 있어. 너를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있지. 미래 영겁에서 나는 다시는 너를 만날 수는 없는 것이지. 만나는 것은 너와는 다르지.(..)

- 당신 몸이 무서운 거예요. 그것은 다른 종족의 거입니다.

- 너하고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구.

눈물이 그녀의 눈에 솟아나왔다.

- 모르시나요? 나는 영원히 썩지 않는 손으로 애무를 당하는 일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차라리 더럽다고 말해 버리는 편이 낫겠군.

-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요.

나는 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저주받은 손을.

- 이 백년 동안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어. 지금은 알았지. 베어트리스, 너는 자유야. 만약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떠나가라구. 만일 한 사나이를 사랑하게 된다면 아무런 뉘우침 없이 그 사나이를 사랑하도록 하라구.(187)

- 용서해다오.

나는 입술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갖다댔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른 몇 백만이라는 여자 중의 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애정도, 회한도 지나가버린 것의 맛이 났다.(195)


베아트리스는 결국 그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모르는 곳에서 죽는다. 그는 조국을 위해 전쟁을 하고, 정복하고, 영토 확장을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죽어가고, 그에게 삶은 점점 의미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 설령 황제라 할지라도 한 인간에게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01)’라는 대답만이 그의 진실일 뿐이다. 인민을 생각하라는 신하의 말을 듣고 그는 외친다. - 나의 인민? 그것은 벌써 거듭 죽었어! 어찌 내가 그들과 맺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은 결코 똑같은 인민이 아니라구.(195)

그는 점점 불사의 인간이 겪는 실존적 인식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죽은 자는 이미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었다. 세계는 늘 마찬가지로 가득차 있다. 하늘에는 언제나 똑같은 태양이 빛나고 있다. 가엾은 인간은 하나도 없었고, 아까워할 것은 그 무엇 하나 없었다.(229)’ 그리고 그는 생명을 지닌 자들의 놀라운 결정을 수없이 보고 겪는다. ‘그래서 이 불행한 인디언들은 차라리 즉시 죽기로 결정한 겝니다. 그들은 속히 죽기 위해 흙이나 돌을 먹었지요. 그리고 천국에서 스페인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위험을 피하고자 세례를 받을 것을 거부했습니다.(247)’


그는 한 사나이와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 싶어한 적도 있다. 그는 그 사나이의 꿈을 실현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운명이 다른’ 존재였다.

- 아아, 나는 정말 불사의 몸이 되고 싶소!

그는 정열적으로 말했다.

- 나 역시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 그렇게 되면 나는 꼭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 걸. 나는 지구의 모든 강을 내려가, 모든 대륙의 지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 아니. 자네는 곧 중국에 흥미를 잃게 될 걸. 그 무엇에 대해서도 흥미를 품지 않게 될 거야. 세계에 자네는 다만 외톨이가 되어버릴 테니까.(..)나는 한 번도 친구를 가진 적이 없었어. 인간들은 나를 늘 이국인이나 또는 죽은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지.(272)

- 자네 왜 훨씬 전부터 그 일기에 아무 것도 적어넣지 않았지?

- 자네가 날 바보취급하기 때문이야?

- 내가 자네를 바보취급한다?

- 물론 자네는 아무 말도 안 했지. 그렇지만 나는 자네의 눈을 보고 있었다고. 자네의 시선 밑에 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야. 자네는 먼 곳에서 날 바라보고 있어. 자네는 벌써 내 죽음 저쪽에 있지. 자네에게 있어서 나는 일개의 죽은 인간이야.(281)


또 다른 사랑은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프랑스. 활발하게 사회적 활동을 하는 마리안느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을, 그는 망설인다. 그는 살롱에서 이렇게 말한다.

- 당신네들은 두 사람 모두 잘못돼 있소. 이성도, 선입관도 인간에게 있어 유용한 것은 못되지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절 수 없는 만큼, 무엇 하나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없는 거죠.(..)그들은 행복해지려는 희망조차 바라지 않을 걸요. 그들은 시간이 자기를 죽이는 것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겝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호들갑스러운 말로 자기를 속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지요.(294)

- 우리는 30년, 40년 사랑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까뜨린느나 베아트리스가 쉬고 있는 것과 똑같이 무덤 속에 그녀의 관은 누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망령이 될 것이다.(330)


그래서 그는 자신이 불사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숨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 채로, 그를 사랑하고, 시간이 흐른다.

- 알아요? 만일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는 일이 있다면, 나 자살해버리고 말 거예요.

나는 그녀를 더한층 힘껏 안았다.

- 나 역시 당신 뒤에까지 살아 있지는 않겠어.(330)

- 그녀는 또 다시 책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죽어야 할 운명을 짊어질 종족이라는 사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충격, 하나의 전략, 결국 마차의 바퀴가 하나 빠진다든가, 말발굽에 채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물러빠진 뼈는 가루가 되고, 심장은 멈추며, 그들은 영원히 죽어 버리는 것이다.(332)

- 나는 그녀가 지상에서 그녀의 일 따위는 생각해낼 수조차 없게 될 무렵의 일을 정열적으로 말하고 있는 걸 듣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334)

- 내게는 풍파를 피할 만한 곳도 없고, 미래도 없고, 또한 현재도 없었다. 마리안느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원히 제외된 자였다.(334)

- 만일 그녀가 불사의 나를 사랑해준다면, 나는 모든 과거와 희망이 없는 미래에도 불구하고 진정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340)

- 자연은 영원히 그 비밀을 우리에게 밝히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의문을 생각해내고, 이어 답을 만들어낸 것은 우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험관 밑바닥에서 우리 자신의 사상밖에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343)

-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쳤어요. 당신도 생사를 걸어, 당신을 내게 맡긴 거라 믿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은 고작 몇 년 동안만 내게 당신을 빌려주고 있었군요. 나는 다른 숱한 여자 중의 하나군요. 언젠가는 내 이름조차 생각해내지를 못하게 될 거야.

- 마리안느! 내가 당신 것이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나? 나는 이제껏 이렇게, 누군가의 것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또 앞으로 아마 다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할 거야.(..)당신을 알기 전까지 나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테지? 나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만든 것은 당신이야. 당신이 나를 버리면 나는 또다시 망령이 되어버릴 거야.

- 당신은 죽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절대로 진짜 망령은 될 수 없어요. 그리고 한 순간도 당신은 나하고 똑같은 인간이 아니었던 거죠. 모두가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당신은 다른 세계 안에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내게 있어 당신이라는 사람은 없어져 버린 거예요.

- 천만에. 우리가 피차를 발견한 것은 바로 지금이라구. 그럴 것이 우리는 이제야말로 진실 속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니까.

- 당신과 나 사이에 진실이란 하나도 있을 수 없다구요. 두 사람의 죽는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있을 때라면, 두 사람은 몸도, 마음도 사랑으로 단련이 돼요. 사랑은 두 사람의 본질 자체라구요. 그렇지만 당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우연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구요.

- 내 운명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려고 해 봤소?

- 정말 무서운 일이예요.

- 나를 도와주려고는 생각지 않나?

- 당신을 도와요? 십년이나 이십년을 돕는단 말이군요. 그런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죠?

- 몇 세기 동안 당신은 내게 힘을 줄 수가 있지.

- 그 뒤에는? 또 한 사람 다른 여자가 당신을 도우러 오나요? 그럴 정도라면, 다시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345)

- 까뜨린느의 말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죠?

- 서너 개쯤 될까?

- 그럼 목소리는? 그 사람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마리안느의 손을 잡았다.

- 나는 당신을 사랑하듯이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어.

- 아아! 당신이 나를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긴 그게 좋은 거야. 이런 추억을 모조리 짊어진다면 너무 무거울 거야.

- 당신은 내 마음 속에서 다른 죽는 인간의 그 누구의 마음 속에서보다도 오래 살 수 있다구.

- 아뇨. 만일 당신이 죽는 인간이라면, 나는 당신 가슴 속에서 세계의 종말까지도 살아 있을 거예요. 그럴 것이 당신의 죽음은 내게 있어서 세계의 종말일 테니까요. 그런데도 나는 종말이 없는 세계 속에서 죽으려 하고 있는 거예요.(350)

- 나는 당신이 부럽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나에 대해서도 부러워하지는 마세요.(351)

- 거짓말은 이제 그만 좀 해 둬요! 이제 끝장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구요. 나는 이제 곧 저 세상으로 떠난단 말예요. 나 혼자 떠난다구요. 그런데도 당신은 이 세상에 남아 그대로 있는 거예요. 영원히.

그녀는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 나 혼자! 당신은 내가 혼자 떠나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힘껏 쥐었다. 그 얼마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도 함께 죽겠어. 우리는 같은 무덤에 묻힐 거야. (352)

나는 땅 위에 누웠다. 눈을 감고, 온갖 힘을 짜내어 열려진 문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과거가 존재를 계속하도록 현재가 태어나는 것을 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하루, 하룻밤 이어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전율했다. 암 것도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뚜렷이 묘지의 꽃 사이에서 꿀벌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미 문은 열려진 것이다.

나는 저린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아, 이제 너는 무엇을 하느냐? 일어나서 살기를 계속하려는가?(354)

마리안느와 함께 하나의 세계가 멸망해버렸다. 그것은 이제 영원히 떠올라오지는 않을 것이다.(355)


그리하여, 그는 이제는 불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겠다는 한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 당신이 나를 잊으시는 미래도, 내가 존재치 않았던 과거도, 나는 모두 받아들이겠어요. 그것은 당신의 일부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미래와 과거를 가지고 이 곳에 계신 것은 바로 당신이예요. 나는 흔히 그 생각을 했었지요. 시간이 우리를 떼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구요.(413)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사랑의 힘으로 수세기 이래 나는 비로소 과거나 미래를 잊고, 완전히 현존하고, 완전히 살아 있는 자기를 찾아냈다. 나는 그 곳에 있었다. 한 여자가 사랑하고 있는 한 남자였다. 다른 운명을 지니고는 있지만, 이 지구에 속하는 한 사나이였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에 닿았다. 단 한 마디로 이 죽은 껍데기는 터지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금 생명이 끓어넘치는 용암이 흘러내리고, 세계는 새로운 양상을 띠며 기대와 기쁨과 눈물이 생겨날 것이다.

-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며칠, 또는 몇 년이 흘러간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주름 투성이의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모든 빛깔은 탁해지고, 하늘은 빛을 잃고, 향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 그것은 헛일이요. 모든 것은 헛일이요.

- 나는 당신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가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불사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이 지니는 뜻의 중대함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런 사랑이 가능했다. 만일 내가 아직도 인간의 탈을 쓸 수 있다면, 이렇게도 말했을 것이다. ‘이 여자는 내가 알게 된 여자 중에서 가장 마음이 넓고, 가장 정열적인 여자다. 가장 고귀하고, 가장 순수한 여자다’라고.

그러나 이런 말은 이제 내게 있어 아무런 뜻도 없었다. 로르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나의 손은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 그 아무 것도 아니오. 당신은 모릅니다.(414)


마지막으로 레진느에게도 그는 말한다. 그의 불사가 얼마나 지독한 형벌인지를. 죽지 않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며, 살 권리도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만이 전부인 것이라는 사실을.


- 인간이 모두 죽어버리고, 지구는 흽니다. 하늘에는 아직 달이 있고, 새하얀 지구를 비치고 있지요. 나는 생쥐와 함께 다만 혼자 있는 거죠.

그는 매우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아주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의 눈길이었다.

- 어떤 생쥐?

- 저주를 받은 작은 생쥐지요. 이제 인간은 없어지고, 그 쥐 한 마리만 영원히 빙글빙글 돌고 있을 걸요. 그 놈에게 그런 운명을 준 것은 나지요.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죄악입니다.(425)


이토록 매력적인 작품을 재판하지 않는 출판사들은 각성 좀 해야 한다.이 소설을 읽고도 불사를 꿈꿀 수 있을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도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 온갖 예술, 철학이 그에게는 한낱 공허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죽지 않는 그는, 인간과 함께 할 수 없다. 그 얼마나 끔찍한 고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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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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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예술 장르의 영원한 소재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사람은 특별하고 전인격적인 관계를 희구하게 되며, 그 대상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인기 있는 사랑 이야기는 여전히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닌가 싶다. 낡디 낡은 이야기라서 문제인 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몇 가지 원형적 이야기의 재조합일 테니 말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없다. 이미 그건 하나의 담론으로 굳어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배경이 그다지 좋지 않고 하는 일도 별 신통치 않은 여자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합을 한다는 게 기본 플롯이다. 그 사실 자체야 전혀 흰 눈으로 볼 게 아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란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문제는 왜 언제나 ‘그런 남자’여야 하냐는 거다. 여주인공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재력이나 권력이 없는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곧 사랑이 결혼이라는 제도적 테두리 속에서 비로소 인정받고, 성공적인 결혼이 바로 성공적인 삶이라고 믿는 관념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정이현의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반어와 익살로 우리 시대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정면으로 비웃는다. 소설이 드라마와 다른 점은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완전히 배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진행형인 드라마는 시청자의 입김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나 소설은 이미 완성된 채로 독자 앞에 선보인다.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배반하지 않는 것처럼 한다는 점에 오히려 통쾌함이 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공통점은 이미 이 세계 속에서 남자와의 권력다툼이나 인정다툼을 포기했다는 데 있다. 남자가 이 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건 너무도 명백한 현실이다. 따라서 그 현실에 속한 ‘강한 여자’가 되는 게 그녀들의 현명한 목표가 된다. ‘강한 여자’란 결국 ‘강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고, 더 근본적으로는 금전적 풍요로움을 획득한 여자다. 거기에는 이미 규정된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항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시선을 이동하는 그녀들은 시대의 흐름을 잘 따라가는 세련되고 지적인 여자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강한 여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일단 아름다움을 갖춰야 한다. 그 아름다움은 자연적이든 인공적으로 획득되었든 간에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 존재한다. 아름다움과 동시에 젊음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즉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신선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정숙함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여자는 유리잔’이라면서 ‘금가는 순간 끝장나는 것이 여자의 몸’이라고 주장한다. 강한 남자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소속된 순결하고 지고지순한 여자를 원한다. 그것이 재력과 학력 등의 자본을 소유한 남자의 당연한 요구 사항이다. 마지막으로는 명민함이다. 다른 조건을 갖추고 있는 여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민하고 섬세한 전략을 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은 강한 남자를 대하는 십계명까지 만들어서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전략적으로’ 고수하였던 순결이, 정작 증명하고픈 순간에 실체가 없었음이 드러난다.


한편 「트렁크」의 주인공은 사회적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는 여자다. 상사와의 불륜도 그녀에게는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점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거기에는 사랑도 없고, 낭만도 없다. 그래서 그녀의 눈부신 성공을 증명해주는 차 트렁크에 난데없이 나타난 시체는 다만 넘어가야 할 장애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체를 처리하는 데는 ‘남자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은폐에 성공해야만 한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순수」에서는 세 번의 결혼에서 모두 남편을 잃은 여자의 독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에게는 살인의 동기도, 살인을 할 능력도 없다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남편들의 죽음은 결국 그녀에게 경제적 풍요로움과 일상의 자유를 안겨주었다. 남편들은 그녀의 삶을 위해서는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변태적이고 이기적이며 악마적인 남편들을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도 살해할 수 있는 법. 그것이 또한 강한 여자의 전략이 아니겠는가.


이 여자들의 사랑에는 달콤함도, 부드러움도 없다. 자신의 몸은 보다 높은 상품 가치를 지니기 위해 가꿔야 할 도구이며, 합법적으로 팔아넘긴 매물에 불과하다.「소녀 시대」의 되바라진 여자 아이는 일찌감치 자신의 상품 가치를 파악하고, 포르노 사진을 찍는 중년의 사내와 부모에게 돈을 얻어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자신을 도구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는 이미 인간다움을 망각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자아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들의 성공과 실패는 슬플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지위 상승을 할 수 있는 수단이 결혼밖에 없다는 사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그 지위 상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표면적으로 보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 보다 큰 차, 보다 비싼 옷을 입고 밥을 먹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안락하고 풍요로운 생활만을 보장받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경제적 지위 향상이라는 획일적 목표를 향해 일률적으로 달려가는 오늘날의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형성된 계급은 부르디외가 지적했듯 아비투스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입지를 강화한다. 삶과 소비가 밀접한 관계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부는 새로운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을 형성한다. 단순한 구매 행위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방식에까지 아비투스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또한 ‘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을 소유하는 것은, 보다 인간답고 세련되고 최첨단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반대로 ‘짝퉁’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삶은 인간다운 삶과 거리가 멀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짝퉁을 소비하는 행위는 명품을 지향하지만 그럴 만한 경제적 조건이 되지 못하는 서글픔을 반영할 뿐이다. 그러나 애초에 명품을 소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부유하지 않은 삶에 자격지심을 가질 이유도 없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여자들은 ‘보다 좋은 삶’을 위해 지구력 있게 나아가지만, 정작 그들은 이미 만들어진 허구적 삶의 그림자를 반영할 따름이다.


한편 정이현은 강한 여자들과는 애초에 출발점과 지향점이 다른 여자들을 통해 보다 인간다운 관계맺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무궁화」와 「신식 키친」의 주인공은 제도적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전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이고, 후자는 거식증에 걸린 비대한 육체를 가진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다 풍요로운 삶을 지향하는 여자들 사이에서 소외된 지 오래다. 누구도 그들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데에도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이다. 소외된 여자들은 사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죽고, 세상의 흐름에서 비껴나 있기 때문에 또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빛의 한 가운데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소외된 사람이, 삶의 질곡 속에서 숨죽이며 신음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강한 여자들이 결국 강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는 타인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는 낭만이 없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조차 없다. 더구나 자기 자신만의 사랑의 완성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가부장 사회와 폐해를 뿌리치기는커녕 더 굳건히 뿌리내리게 만드는 여자들은 다만 구태의 산물일 뿐이다. 진정으로 강한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단단히 둘러싸고 있는 갑옷을 직시하고, 그것을 벗겨내기 위한 연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연대야말로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찾기 위한 유일한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이현의 소설은 반어적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조롱한다. 그대 강한 여자들이여, 냉정하게 자신을 뒤돌아보라. 지금, 그대들은 진정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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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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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에 등장하는 소록도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은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록도의 주민은 크게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눌 수 있다. 지배받는 자는 또 관리자와 노동자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 곳의 주민들은 모두 나환자다. 즉 그들은 다시 지배받는 자 중에서도 건강인과 환자로 다시 분류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인 ‘나환자’는 지배받는 자 중에서도 환자이며, 인간 중에서도 더욱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 환자들은 치명적인 배반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배반을 당한다는 것은, 배반한 인간에게 건 자신의 인격 모두가 손상되는 사건이다. 그 손상은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는 비극을 양산해낸다. 배반은 의심과 회의를 낳으며,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경향을 형성한다. 특히 배반은 배반당한 자가 배반하는 자를 따르고 인정했던 만큼 더 지독하게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배반을 당한 인간이 그 배반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또한 천형과도 같은 질병(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을 가진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삶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나병 환자라는 특수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현재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모든 사회 구조의 문제 또한 같이 제기하고 있다.


소설은 한 퇴역군인이 소록도로 부임하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한다. 조백헌이라는 새 원장은 부임하자마자 반갑지 않은 선물을 받는데, 그것은 주민의 탈출 사건이다. 그는 탈출 사건에 대해 조사해보려고 하지만 원생들은 그에게 냉담할 뿐이다. 조원장은 패배감과 좌절감, 불신에 가득 차 있는 주민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장로회를 조직하고 섬 규율을 변경하며, 미감아 아동 학교를 통합하는 등 제도를 개선하거나 신설한다. 그러나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축구 시합을 통해 주민들을 통합시키려 한다. 그의 시도는 성공하여 주민들은 한 마음이 되었고, 조원장은 이윽고 토지간척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주민들은 조원장에게 그가 또 다른 배반의 역사를 만들지 않겠노라는 서약을 하게 하고, 동시에 자신들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뒤 간척공사에 뛰어든다. 그러나 힘든 노역으로 솟아오른 땅이 태풍 때문에 가라앉고 주민의 희생이 끊이지 않자 주민들은 원장을 찾아와 죽이려 한다. 그러나 양쪽의 서약이란 것을 이유로 들어 원장은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간척사업을 가로채려 원장을 다른 곳으로 발령낸다. 원장은 몇 년이 지나 한 주민으로 다시 소록도를 찾는다. 그리고 병자와 건강인인 두 주민의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소설이 끝난다.


소설은 대부분 조원장의 행동과 생각을 쫓아가는 데 할애한다. 즉 이 소설을 정리한다면 조원장의 소록도 일대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때로는 전지적 관점에서, 때로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때로는 다른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조원장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이상욱의 눈에 비춰지는 조원장이 있다. 이상욱의 눈에 비친 조원장의 첫 이미지는 권위적이지만(그의 권총이 이를 상징한다) 허례허식을 싫어하는(원장 부임 행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인물(소록도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관찰한다)이다. 소록도 주민들의 이상한 무관심에 의아해하는 조원장에게 정보를 주는 사람은 의료과장인 이상욱이다. 이상욱은 처음부터 조원장도 다른 원장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경계한다. 그는 특별히 ‘동상’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 ‘동상’이란 소록도를 낙토로 만들겠다던 주정수 원장이 오히려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소록도를 증오와 배반의 땅으로 만든 사건의 증거물이다. 이상욱이 조원장에게 소록도의 내력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상욱의 태도는 조원장이 또 다른 주원장이 되지 않게 하려는 배려나 또 다른 배반을 남기지 않기 위한 조심스러운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보면 이상욱은 조원장이 당연히 자신의 동상을 세우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것은 이상욱이 지닌 어떤 성향과도 관련이 있어보인다. 더 나아가 이는 소설 속에서 제시되는 나환자의 성향이나 이상욱의 지식인적인 성향이 혼재되어 있다. 이상욱의 시나리오에는 조원장이 배반하고 그 배반의 역습을 당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배반당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도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이상욱의 시선에 의해 조원장은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힌다. 심지어 조원장은 이상욱의 ‘과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언질을 던짐으로써 그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상대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권력자의 공공연한 협박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욱은 축구 시합 이후 열광하는 주민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런데 주민들의 열기에 통합되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조원장의 모습을 보고 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는 주민들이 조원장을 향한 살기를 누그러뜨리는 순간 나서서 그를 처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후 그는 건강임에도 불구하고 섬을 ‘탈출’해나가서 끝까지 조원장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황노인이나 신문기자인 이정태의 눈에 비친 조원장도 있다. 앞부분에서는 조원장이 또 배반을 감행하는 인물인가에 대한 이상욱의 의혹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조원장을 ‘거인’으로 바라보고 소록도에 관한 기사를 썼던 이정태가 있다. 한편 황노인은 가장 인간다운 시선으로 조원장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조원장을 ‘하늘에서 내려주신’ 분이라고까지 말한다. 물론 그것은 조원장의 초월적 권위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의 열정과 의지에 감복해서이다. 이 세 가지 시선은 소설 속에서 엇갈리며 조원장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판단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도록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시선들과 정황들을 모아서 조원장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온당할 것이다.


조원장은 앞부분에서는 권위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이중성은 이상욱으로 하여금 그를 불안하게 느끼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념을 가진 권력자의 경우, 모든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상황보다 신념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원장은 자신은 결코 배반하여 배반당한 주원장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며, 소록도에 진정한 낙원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감 만큼이나 끈기있고 열정적인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또한 조원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위급한 순간에서도 비겁해지지 않는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조원장의 강한 자의식과 끈질긴 추진력이 배반의 모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원장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5000명의 섬 사람들을 관리하고 다스릴 권한은 그의 수중 하에 있었다. 그의 정책을 거부해도 그 자체를 갈아치울 권한은 주민들에게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장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을 할 수 없는 주민들의 입장에서 원장은 근본적으로 자신들과 달랐다. 우선 원장이 되는 사람은 병을 앓지 않은 온전한 정상인이었다. 그는 나환자들이 그토록 거부하고 부정하는 ‘나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그들의 문제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들처럼’ 사고할 수는 없다. 이상욱에 말에 따르면, 원장은 ‘주민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입장’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주민들의 앞에 나서서 선동하고, 관리하는 권력가의 입장인 것이다. 다스리는 자는 아무리 낮은 곳으로 내려와도 자신이 다스리는 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위치에 따라 자동적으로 권위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소설의 말미에서 설파하고 있듯, 원장이 제시한 천국이란 그저 원장의 천국에 불과했다. 이전의 원장들이 상상했고, 만들기 위해 주민들을 배반해야 했던 ‘당신들의 천국’인 것이다. 한편 원장이 제시한 천국은 결국 나환자들의 수용소이며 감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상욱은 강조했다. 그 천국이 아무리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라도, 나환자라는 특수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천국이란 지옥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천국은 나환자들이 인간이라기보다는 환자라는 사실을 언제나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인들은 오지 않으며, 정상인들은 가치를 두지 않는 곳이 아무리 살기 좋다고 해도 이미 인간의 천국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원장이나 어떤 지도자도 그 이상의 낙원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조원장도 실패했다. 그의 간척사업은 흐지부지 끝났고, 나환자들은 여전히 섬을 탈출하거나 자살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낙원을 제시하고 건설할 수 있는 것일까.


신문기사 이정태는 한 민간인으로 소록도를 다시 찾은 조원장과의 대화에서, 그가 섬의 광기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조원장은 더 이상 관리자나 지배자가 아니라 섬과 운명을 같이 하는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섬을 다시 찾은 조원장은 이제 야심만만한 추진가가 아니었다. 섬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멈춰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섬의 일에 관여하여 비판하거나 바꾸려는 노력을 할 수 없었다. 섬의 일부가 된 그는 이미 섬의 의지에도 소속된 것이다. 이 섬의 의지란 나환자들이 끊임없이 부정하는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한 것이다. 나환자는 자신이 병으로 인해 저주받았다는 사실에 자포자기하면서도, 그 상황에 안주한다. 그들은 ‘원래부터 교육 수준이 낮았고, 유랑과 무위도식의 악습에 물들어 있던 무리들이었다. 절망하기 잘하고 까닭없이 반항하고, 그리고 원망과 질투가 강한 병적 심리의 소유자들이었다.’ 삶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타나토스적 충동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어떤 개선 의지도 비웃으며, 성과 없는 일의 결과에 무섭게 분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어떤 비극적인 결함이기도 하다. 불합리한 제도나 운명적인 재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현실 인식과 싸워야만 한다. 해봤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때때로 의지박약을 정당화해주며, 순응적인 운명론을 진리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습성은 일종의 광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접받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임을 포기하는 절망 속에서 느끼는 자기모멸의 쾌락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 소록도의 주민들은 결론적으로 또 하나의 배반을 맛 보았다. 조원장이 비록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하지 않았지만, 간척사업이라는 운명을 뒤엎기 위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그 실패는 조원장이나 국가나 이웃 마을 주민들 때문이 아니라, ‘무서운 복수심을 가지고 인간의 의지에 끈질기게 거역해 오고 있는 두려운 생명체’인 바다 때문이었다. 인간의 의지에 거역하는 자연 혹은 운명과 싸우는 것이 태초부터 주어진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시지프스 신화에서 보여주듯, 인간은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신의 벌이라고 해 두어야겠지만― 영원히 돌을 절벽까지 끌고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어차피 떨어질 수밖에 없는 돌이라고 그냥 멈추어 있는다면,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상욱이나 윤해원, 서미연 등은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멈추지 않는 존재들이다. 상욱과 미연은 미감아고, 윤해원은 자처하여 나병을 얻었다가 회복한 사람이다. 상욱과 미연이 자신을 태어나게 한 섬으로 되돌아온 것은 운명에 맞서겠다는 의지로도 볼 수 있다. 상욱은 끊임없이 조원장을 경계하고 섬의 운명에 대해 고심하는 것으로, 서미연은 건강인에 대한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는 윤해원에 대한 사랑으로 의지를 실현시킨다. 윤해원이 건강인으로서 섬을 찾아 간호하는 여자들을 괴롭혀 떠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자학이지만, 나병이라는 비극에 맞설 인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기확신의 발로이기도 그들은 인간이기에 앞서 나환자라는 인식이 그들의 삶을 규정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고립시키는 것에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보인다.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원장들이 추구한 비현실적이며 나환자차별적인 천국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소설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조원장처럼 병력이 전혀 없거나 이상욱이나 서미연처럼 미감이거나 자처해서 나병을 얻은 윤해원이다. 순전한 나환자는 오직 황노인 뿐이다. 황노인은 나환자들의 대표인데, 대표가 된 이유는 그가 나이가 굉장히 많은 축에 속하고 살아온 내력이 심상치 않으며 섬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작 나환자들 자신이 생각하는 천국이나 인간적인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되지 않은 것이다. 지배자의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섬 사람들과 결코 화합할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이상욱이다. 또한 나환자의 운명과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논하는 것도 정작 나환자들은 아닌 것이다. 여전히 나환자들은 소설 속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들 개개인의 내력이나 섬에서 일어난 무수한 비극적 사건들도 5000명이라는 단위 속에 묻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환자들은 마치 한 사람과도 같아 보인다. 함께 열기를 불태우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포기하는 존재들이며, 그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것은 황노인 같은 대표나 조원장 같은 지배자인 것이다.


나환자들 사이에서 저질러진 가장 큰 배반에 대해서도 ‘소설’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그 배반은 상욱의 아버지인 이순구가 섬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무사히 아이를 낳아 섬을 탈출시킬 수 있었던 사실을 망각하고 관리자로서 그들 위에 군림하려 했던 사건이다. 그리고 이순구는 살해당함으로써 배반의 대가를 치른다. 그래서 섬 사람들의 애정 속에서 태어났지만 동시에 섬 사람들을 배반한 죄과까지 물려받은 이상욱은, 나환자 문제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환자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그는 나환자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나환자 자신이 아니라 나환자를 관찰하고 규정하고 그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고통받고 핍박받는 나환자 자체라기 보다는 지식인에 가까운 존재다. 그래서 그는 조원장을 비판하는 동시에 나환자들도 비판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비판한다. 한편 신문기사 이정태는 마지막에 조원장을 찾아와 ‘객관적인 입장’에서 현재의 소록도에 대한 원장의 판단을 듣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 속에서 비판되고 또 옹호되는 나환자들은 정작 그 자신들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 그들은 목소리보다는 행동으로, 단체적인 행동으로 의사를 표시한다. 섬을 떠나지 못하도록 억지로 막는 시대도 아닌데, 굳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 뭍으로 가는 자유를 향한 의사표시가 그들의 거의 유일하게 가시적인 행동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환자인 인간의 자유와 본질이라는 문제에 매우 섬세하게 접근했지만, 그 시선이 여전히 지식인의 한계에 머물로 있다는 아쉬움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길고 사변적인 자유와 지배에 대한 이야기들도, 정작 나환자의 구체적인 삶 자체에는 별로 닿아 있는 것 같지 않다. 물론 이 소설에서 조원장은 나환자의 입장은 아니더라도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위치로 내려오는 상징적인 행동을 한다. 이는 그의 말 속에서도 강조되듯이 사랑과 신뢰로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가로막는 상하관계부터 없애야 한다는 것을 실천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해 언급하는 조원장의 태도에는 여전히 지배자의 관점이 남아 있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내내 고민한 문제일 것이다. 즉 뭔가 개선하고 앞장서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규정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조원장 자신도 지적하고 있지만, ‘자유와 사랑으로 행하는 권력자’란 지극히 이중적이며, 존재하기 어렵다. 이 딜레마를 해결해보기 위해서 소설은 공동체에서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설파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어떤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소설이 긴 철학적 대화를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오히려 나환자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통해 그 자유의 문제를 더 섬세하게 제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환자들이 항상 복수(複數)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도 그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리고 때때로 등장인물들이 서로에 대해서 초월적으로 정보를 알고 있다는 식의 설정도 다소 의문스럽다. 조원장이 이상욱의 내력에 대해 짐작하고, 한만이란 나환자가 이상욱의 과거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소설을 쓰고(이상욱이 그 소년이라는 전제 하에), 황노인이나 이상욱이 서로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발언들은 이청준의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작가의 고유한 작풍일 수도 있지만, 때때로 별다른 근거 없이 서로에 대한 정보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나오는 설정들은 무리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억압받고 지배받는 사람의 문제를 다룬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배반과 그들의 절망과 숙명적 자포자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굳이 나환자의 특수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는 면도 많다. 여전히 사회 구조 속에서 지배자의 위치는 굳건하고, 지배자에게 지배받으면서 자유를 얻는 방법이란 오리무중이다. 또한 인간의 자유 역시 규정짓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인간이 섬처럼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디까지나 사회 구조와 인간 관계 속에서 자유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딜레마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인간의 모습은 시지프스를 뛰어넘어 스스로 운명을 거부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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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 언니를 사랑하니?"
"저는 언니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요!"
뽈랴는 이상스러울 만치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진지해졌다.
"나도 사랑해 주겠니?
…뽈랴, 나는 로지온이라고 한단다. 언제든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다오.
당신의 종인 로지온도 용서하소서라고. 더 이상은 필요 없어."
"제가 평생토록 아저씨를 위해 기도할게요." 『죄와 벌』 중

사랑과 구원은 양립 가능한 개념일까. 나는 『죄와 벌』과 『백치』를 읽으면서 내내 기독교적 구원과 사랑이라는 테마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소실점을 향한 집중만큼이나 여러 인물과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의미들도 흥미로웠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백치』에서 연민이야말로 모든 인간 감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법칙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민과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또한 사랑과 구원의 관계는 어떤 식의 접점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랑받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의 주위에는 그의 기독교적 부활을 믿는 소냐와 무조건적인 애정을 베풀어주는 어머니와 두냐, 열렬하지만 이성적인 우정을 지니고 있는 라주미힌, 그의 가능성을 드높게 여기는 뽀르삐리가 있다. '위대한 권리'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범죄자 라스꼴리니꼬프의 양심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걸까, 난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인데! 오,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만약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이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범죄의 근원이 자신에 대한 존재증명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라스꼴리니꼬프를 제일 처음 움직인 것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었다. 다만 그는 세상의 부조리가 하나의 악을 제거하는 일을 정당화해준다고 믿었을 따름이다. 그는 관념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에라도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내면의 인간적 감정이 열렬히 끓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당포 노파와 그의 동생을 살해한 잔인성의 이면에는 가진 것을 서슴없이 털어서 남김없이 베푸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냐는 뭇사람을 연민하면서 바로 그 자신은 연민하지 못했던 까닭 때문에 그를 '불행한 사람'이라 부른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 이름이 상징하고 있듯 내적 분열형 인물이다. 그는 소냐를 통해 끊임없이 구원에 대해 기대하지만 관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소냐는 그에게 있어 가차없는 판결,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소냐는 그의 관념이 궁극적으로 헛되었다는 점을 자신의 존재 자체로 증명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절대로 언제까지나, 그 어느 곳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고 그를 따라가는 존재이다. 소냐는 유형 생활을 하는 그를 신앙으로 괴롭히거나 복음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즉 그를 끝까지 믿으며 그의 부활에 대해서 털끝만큼도 의심치 않는 가장 큰 사랑을 베푸는 존재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불현듯 무언가 그를 사로잡아서 그녀의 발에 몸을 던지게 한 것 같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안았다. …그녀는 이해했다. 그녀는 한 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가 그녀를 무한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그 순간에 도래했다는 것을….

라스꼴리니꼬프는 드디어 '갱생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의 갱생에는 그 자신의 노력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애정이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악마적 분신인 스비드리가일로프가 파멸해가는 모습을 보면 훨씬 도식적으로 보인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서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인간적 회의를 제거하고 니힐리스트적 범죄 행각을 덧붙인 존재이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양심적 회의가 눈곱만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구원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구원'은 기독교적 갱생이 아니라 다만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하는 일이며, 내키는 대로의 자선으로 발 밑에 꿇어앉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이다. 더구나 그는 두냐의 고귀한 성품을 파악하여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구원할 수 있도록 유도하려 한다.

당신 누이는 마침내 나를 가엾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사람이 가여워진 거지요. 아가씨의 마음에 가엾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 그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위험한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구원해 주고 싶어지니까요. 이성을 되찾게 해주고, 재기시키고, 더 고귀한 목적을 이루라고 이끌어 주고, 새로운 삶과 활동을 시작하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겁니다.

그러나 오빠의 범죄를 빌미로 한 협박은 그녀를 절대 타협할 수 없게 만들며, 자신의 열렬한 사랑조차 추악한 정념의 바닥으로 떨어뜨리게 한다. 그에게 권총을 들이댄 순간, 이제까지의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다웠던 두냐는 그가 끝내 얻을 수 없었던 구원에 대한 표상이다. 두냐에게 결코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심장은 아프게 죄어든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아무도 없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는 죽음 외에는 어떤 선택도 남아 있지 않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죄를 지었으나 이를 괴로워하는 '벌'을 받고 갱생하였으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끝내 회개할 자격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백치』에서 구원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백치』에서도 『죄와 벌』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사랑의 양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나스따시야를 사이에 둔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 공작을 사이에 둔 나스따시야와 아글라야의 구도를 단선적으로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진심어린 사랑과는 달리 『백치』에 등장하는 사랑은 하나 같이 왜곡되어 있다.


로고진은 거상의 아들이자 거세파 교도의 후예이며, 천박한 니힐리스트다. 표면적으로 가장 큰 정념의 소유자는 단연코 로고진이다. 나스따시야를 향한 로고진의 집념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여러 사건 속에서 쉼 없이 작용한다. 그런데 로고진이 매료되어 있는 이단 종교처럼, 나스따시야를 향한 사랑은 광신적인 종교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은 나스따시야에 대한 믿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향한 소유욕과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서 비롯된다. 로고진은 돈으로 그녀를 사거나 그녀의 원망(願望)을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는 형태로 사랑을 증명하는 수 밖에 없다.

로고진과 나스따시야는 서로 수모를 주고 받으며 고통을 배가시키는 관계이다.나스따시야는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로고진은 자신의 고통과 수치심을 대변해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로고진과 함께 있는 한 그녀는 천박하고 속물적인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녀는 그를 한껏 조롱하고 무시하고 그에게서 끊임없이 도망치는 방식으로 사랑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로고진은 나스따시야를 여왕처럼 고귀하게 대접하려 하지만, 그녀는 여왕과 동시에 학대 받는 하녀 역할을 자청한다. 로고진은 그가 갖는 가공할 정열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는 고작 절망적인 경멸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얼마나 나를 깔보았으면, 원한조차 가지지 않을까라고 토로한다. 용서해주지 않고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라는 로고진의 서슬 퍼런 협박에도 나스따시야는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며 그를 조소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왜 나스따시야는 세상을 바꿀 만한 미모를 지니고도 세상을 피해 암흑 속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는가. 나스따시야는 어린 시절 대부호이자 호색한인 또쯔끼의 눈에 띄어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또쯔끼는 십대인 그녀를 농락하고도 귀족적인 속물주의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체면을 지키려 하는 자다. 뛰어난 지성과 더불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니힐리즘을 지니고 독단적인 처사를 일삼는 그녀는 또쯔끼에게 점차 위협적인 대상이 된다. 심지어 또쯔끼는 그녀를 두려워하여 그녀에게 부유한 생활을 보장하며 환심을 사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물욕에도 길들여지지 않는다. 예빤친 장군의 장녀와 결혼하려던 또쯔끼는 나스따시야가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지참금을 주어 서둘러 가브릴라와 그녀를 결혼시키려 한다. 그러나 물욕도, 애정에 대한 욕구도 없는 나스따시야는 로고진과 가브릴라에 의해 자신의 몸값이 흥정되는 상황을 가학적인 쾌감으로 지켜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현현'이며 '가난한 기사', '백치'라는 수식이 따라붙는 미쉬낀 공작이다. 공작은 한 순간에 나스따시야의 절망적인 영혼을 알아보았으며, 그녀 에게 크나큰 연민을 느낀다. 나스따시야 역시 이 우스꽝스러운 '백치'의 등장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의 순진무구한 영혼을 꿰뚫어본다. 그녀는 공작이 일생에서 최초로 마음을 맡길 만한, 진정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 단언한다. 그러면서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달려 있는 유희적인 인생의 결정을 공작에게 위임한다. 그런데 공작은 광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그녀에게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나스따시야, 나는 로고진의 여자가 아닌 성스런 당신을 데려가는거요.…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 그리고 본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내가 당신에게가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영광을 베풀어주는 겁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고통을 받아 왔고 그런 지옥 속에서도 순결한 몸으로 빠져나왔어요. 그건 대단히 많은 걸 의미합니다. …나스따시야, 나는…당신을…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 누구도 당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당신의 삶이 완전히 파멸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무엇 때문에 당신은 그런 사실에 연연해 합니까? …당신에게는 많은 배려가 필요합니다. 내가 당신을 돌봐드리겠어요. 나는 아까 당신의 얼굴을 보고 당신이 나를 부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나는 당신을 평생 존경하며 살겠습니다.

공작의 이러한 선언은 무엇보다도 나스따시야의 영혼에 깊은 각인을 남긴다. 그러나 나스따시야는 공작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나스따시야는 공작이 자신과 결혼하면 인생을 파멸시켰다는 원망을 하리라고 장담하며, 아무 것도 믿지 않으니 맹세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작이야말로 그녀의 몽상 속에서 언제나 꿈꿔왔던, 그녀를 존중하며 진정으로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뿐, 나스따시야는 공작을 외면하고 로고진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난다. 모스끄바로 간 나스따시야는 막상 로고진과 결혼을 하게 되는 상황이 닥치자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그에게서 도망쳐 공작에게 간다. 그러나 그녀는 로고진보다 공작을 더욱 두려워하여 공작에게서도 역시 도망쳐버리고 만다.

공작은 수선스런 일련의 사건 뒤에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오면서 예빤친 장군의 막내딸인 아글라야에게 편지를 쓴다. 나스따시야에 대한 공작의 사랑 고백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글라야와 공작과의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도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분, 가장 필요한 분은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행복하신가요?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입니다.

나스따시야의 경우, 공작은 자신이 그녀를 돌볼 책임이 있으며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아글라야의 경우는 공작이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아글라야와 나스따시야는 동전의 양면처럼 매우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 드높은 자존심과 남다른 지성을 가졌다는 점, 천방지축인 '어린아이'와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녔다는 점,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을 지녔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부모와 형제의 틈 속에서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지만, 나스따시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리의 여자'였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나스따시야와 아글라야를 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스따시야에게 있어 공작이 '그리스도'라면, 아글라야에게는 '가난한 기사'다.

그 남자는 한번 이상을 세우면 그것을 믿고, 또 그 이상을 믿게 되면 평생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한 사람이예요. …자기의 숙녀가 누구이든 또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이 가난한 기사는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또한 그 기사는 자기가 그녀를 택했다는 것과 그녀의 순결한 아름다움을 믿어 영원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에 만족한다는 거지요. …나는 처음엔 이해도 못 하면서 웃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가난한 기사를 사랑해요. 무엇보다도 그의 공적을 찬양해요.

가난한 기사, 라는 칭호에는 이미 아글라야가 연적으로서 나스따시야를 의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아글라야는 공작이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고상하고, 훌륭하고, 선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자부심이 없음을 심하게 질타하며, 그와는 결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공작이 그녀에게 청혼할 의사가 없었다고 밝히는데, 이것은 그녀를 향한 존경심 때문이었지 결코 그녀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아글라야가 감히 '자신과 같은 남자'를 사랑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공작의 이러한 태도가 나스따시야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이 무렵의 공작에게 나스따시야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었지,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아글라야는 나스따시야가 그에게 그렇게 했듯, 재산이나 직업 등의 속물적 조건들을 가늠하며 자신에게 청혼할 것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공작은 그가 '필요로 하는' 아글라야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거의 환희에 가득차서 받아들인다. 그는 이번에는 아글라야를 사랑한다는, 열정에 가득찬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고슴도치를 선물이랍시고 보내는 등 공작을 조롱하며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아글라야는 공작의 마음 속에 크나큰 연민의 대상인 나스따시야가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행동에는 나스따시야의 심술궂음을 흉내냄으로서 공작의 연민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당신은 나의 거친 언사를 나무라지 않을 건가요. 언젠가…먼 훗날에라도." 라고 묻는 아글라야는 이미 공작을 향한 솔직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공작은 로고진을 찾아가 나스따시야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해명하려 한다. 이제까지 로고진과 나스따시야의 결혼을 반대하던 그의 입장과는 조금 모순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로고진은 절망에 가득차서 나스따시야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공작일 뿐이며, 그녀가 아글라야에게 수도 없이 편지를 했다고 전해준다. 나스따시야는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존재인 공작―진정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믿을 수 있는―이 아글라야와 결혼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이는 공작이 아글라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행복하냐고 물었던 것과도 연결된다. 사랑하는 사람―그들에게 있어 상대의 행복이란 자신의 불행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 나스따시야가 마지막이라며 공작을 찾아와 '당신은 행복해? 내게 한 마디만 해 줘 봐. 당신 지금 행복해? 오늘, 지금 말야?' 라고 묻는 장면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다만 나스따시야를 옹호하는 공작의 태도를 더 이상 인정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 불행한 여인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타락하고, 가장 죄가 많다고 깊이 믿고 있어요.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마세요. …내가 그와 같은 암흑을 그녀에게서 몰아내려고 시도했을 때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워했어요. …그 여인이 내게서 떠난 이유를 아시나요? 그녀가 저급한 여인이라는 것을 나에게 증명하기 위해서예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끊임없이 자신의 수치를 의식하는 배경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무서운 쾌감이 스며 있을 거예요. …나의 청혼에 대해 그녀는 누구에게도 오만한 연민이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며 자기만큼이나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기 따위는 거절한다고 선언했어요.

결국 아글라야는 공작과 함께 나스따시야를 찾아간다. 그녀의 긍지는 자신의 눈 앞에서 공작이 나스따시야를 외면하는 모습을 목격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글라야는 나스따시야에게 당신은 다만 자신의 수치를 사랑하고, 자기가 창피를 당하며 끊임없이 모욕에 시달리고 있다는 비뚤어진 생각 밖에 사랑할 줄 몰라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나스따시야가 공작과 자기 사이에 끼여들 아무런 권리도 없음을 주장하며, 악의적으로 나스따시야의 타락을 비난한다. 급기야 공작은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해야 하는 여자 사이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최대의 위기에 몰린다.

"이런 일이 결국 벌이지고 말았군요! 이 사람은…몹시 불행한 여자잖아요!"

아글라야는 동요하는 공작의 모습을 한순간도 견뎌 낼 수 없었다. 공작은 결국 나스따시야를 선택했다. 공작은 그리스도로 남게 된 것이다. 나스따시야는 공작과 결혼하기를 희망하지만 결국 그녀는 공작에게서 또다시 도망친다. 결혼식을 한 시간 앞두고 그녀는 군중 속에 있던 로고진에게 소리친다.

"살려 줘! 날 데려가! 어디든 원하는 대로, 지금 당장에!"

왜 나스따시야는 외롭고 긴 줄다리기 끝에 얻게 된 공작의 사랑을 또다시 길바닥에 내던져버릴 수 밖에 없던 것인가. 더구나 그녀는 로고진에게로 가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죽음을 예상하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나스따시야의 세상이란 협잡꾼들과 난봉꾼들이 드글거리는 도박판과도 같았으며, 그녀의 삶도 바로 도박과 마찬가지였다. 아글라야가 일갈했듯이 나스따시야에게 있어 증오하는 대상이 없는 삶이란 수치스러움을 안고 사는 삶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공작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녀 자신을 송두리째 부정한다는 의미다. 나스따시야에게는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보다 덜 괴로웠던 것일까. '누구든 죄가 없으면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녀는 단호하게 뿌리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으며 동시에 구차한 구원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노라는 극단적인 니힐리즘 때문인 것이다.

『백치』는 『죄와 벌』과는 달리 그 누구도 사랑으로 인해 구원받지 못한, 어찌 보면 매우 비관적인 작품이다. 미쉬낀 공작은 진정한 '가난한 기사'도, '그리스도'도 되지 못했으며 결국 처음의 백치 상태로 돌아갔을 따름이다. 그는 사랑하는 일도, 사랑받는 일에서도 실패하였으며, 어쩌면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연민과 사랑을 혼동하는 공작, 사랑을 뛰어넘는 불온한 증오를 지닌 로고진, 질투심에 사로잡혀 사랑을 농락하는 아글라야, 불행한 운명을 조롱하며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간 나스따시야는 모두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에게 평생토록 기도해주겠다는 꼴랴의 모습은 궁극적인 사랑과 구원에 대한 의미심장한 암시이다. 물론 미쉬낀 공작의 연민은 꼴랴 못지 않은 순도 높은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실패하였는데 그 까닭은 의심과 증오, 불온한 열정이 지배하는 니힐리즘적 풍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이 어떻게 서로를 구원하여 보다 높은 곳을 향한 다리를 놓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백치)가 홀바인의 그림처럼 사실적인 패배자로 남아 다시 죽음(無)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고통스러운 시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랑만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그것은 관념의 화신인 라스꼴리니꼬프도 끝내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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