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냐 언니를 사랑하니?"
"저는 언니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요!"
뽈랴는 이상스러울 만치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진지해졌다.
"나도 사랑해 주겠니?
…뽈랴, 나는 로지온이라고 한단다. 언제든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다오.
당신의 종인 로지온도 용서하소서라고. 더 이상은 필요 없어."
"제가 평생토록 아저씨를 위해 기도할게요." 『죄와 벌』 중

사랑과 구원은 양립 가능한 개념일까. 나는 『죄와 벌』과 『백치』를 읽으면서 내내 기독교적 구원과 사랑이라는 테마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소실점을 향한 집중만큼이나 여러 인물과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의미들도 흥미로웠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백치』에서 연민이야말로 모든 인간 감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법칙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민과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또한 사랑과 구원의 관계는 어떤 식의 접점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랑받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의 주위에는 그의 기독교적 부활을 믿는 소냐와 무조건적인 애정을 베풀어주는 어머니와 두냐, 열렬하지만 이성적인 우정을 지니고 있는 라주미힌, 그의 가능성을 드높게 여기는 뽀르삐리가 있다. '위대한 권리'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범죄자 라스꼴리니꼬프의 양심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걸까, 난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인데! 오,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만약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이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범죄의 근원이 자신에 대한 존재증명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라스꼴리니꼬프를 제일 처음 움직인 것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었다. 다만 그는 세상의 부조리가 하나의 악을 제거하는 일을 정당화해준다고 믿었을 따름이다. 그는 관념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에라도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내면의 인간적 감정이 열렬히 끓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당포 노파와 그의 동생을 살해한 잔인성의 이면에는 가진 것을 서슴없이 털어서 남김없이 베푸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냐는 뭇사람을 연민하면서 바로 그 자신은 연민하지 못했던 까닭 때문에 그를 '불행한 사람'이라 부른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그 이름이 상징하고 있듯 내적 분열형 인물이다. 그는 소냐를 통해 끊임없이 구원에 대해 기대하지만 관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소냐는 그에게 있어 가차없는 판결,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소냐는 그의 관념이 궁극적으로 헛되었다는 점을 자신의 존재 자체로 증명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절대로 언제까지나, 그 어느 곳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고 그를 따라가는 존재이다. 소냐는 유형 생활을 하는 그를 신앙으로 괴롭히거나 복음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즉 그를 끝까지 믿으며 그의 부활에 대해서 털끝만큼도 의심치 않는 가장 큰 사랑을 베푸는 존재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불현듯 무언가 그를 사로잡아서 그녀의 발에 몸을 던지게 한 것 같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안았다. …그녀는 이해했다. 그녀는 한 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가 그녀를 무한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그 순간에 도래했다는 것을….

라스꼴리니꼬프는 드디어 '갱생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의 갱생에는 그 자신의 노력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애정이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악마적 분신인 스비드리가일로프가 파멸해가는 모습을 보면 훨씬 도식적으로 보인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서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인간적 회의를 제거하고 니힐리스트적 범죄 행각을 덧붙인 존재이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양심적 회의가 눈곱만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구원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구원'은 기독교적 갱생이 아니라 다만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하는 일이며, 내키는 대로의 자선으로 발 밑에 꿇어앉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이다. 더구나 그는 두냐의 고귀한 성품을 파악하여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구원할 수 있도록 유도하려 한다.

당신 누이는 마침내 나를 가엾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사람이 가여워진 거지요. 아가씨의 마음에 가엾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 그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위험한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구원해 주고 싶어지니까요. 이성을 되찾게 해주고, 재기시키고, 더 고귀한 목적을 이루라고 이끌어 주고, 새로운 삶과 활동을 시작하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겁니다.

그러나 오빠의 범죄를 빌미로 한 협박은 그녀를 절대 타협할 수 없게 만들며, 자신의 열렬한 사랑조차 추악한 정념의 바닥으로 떨어뜨리게 한다. 그에게 권총을 들이댄 순간, 이제까지의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다웠던 두냐는 그가 끝내 얻을 수 없었던 구원에 대한 표상이다. 두냐에게 결코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심장은 아프게 죄어든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아무도 없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는 죽음 외에는 어떤 선택도 남아 있지 않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죄를 지었으나 이를 괴로워하는 '벌'을 받고 갱생하였으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끝내 회개할 자격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백치』에서 구원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백치』에서도 『죄와 벌』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사랑의 양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나스따시야를 사이에 둔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 공작을 사이에 둔 나스따시야와 아글라야의 구도를 단선적으로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진심어린 사랑과는 달리 『백치』에 등장하는 사랑은 하나 같이 왜곡되어 있다.


로고진은 거상의 아들이자 거세파 교도의 후예이며, 천박한 니힐리스트다. 표면적으로 가장 큰 정념의 소유자는 단연코 로고진이다. 나스따시야를 향한 로고진의 집념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여러 사건 속에서 쉼 없이 작용한다. 그런데 로고진이 매료되어 있는 이단 종교처럼, 나스따시야를 향한 사랑은 광신적인 종교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은 나스따시야에 대한 믿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향한 소유욕과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서 비롯된다. 로고진은 돈으로 그녀를 사거나 그녀의 원망(願望)을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는 형태로 사랑을 증명하는 수 밖에 없다.

로고진과 나스따시야는 서로 수모를 주고 받으며 고통을 배가시키는 관계이다.나스따시야는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로고진은 자신의 고통과 수치심을 대변해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로고진과 함께 있는 한 그녀는 천박하고 속물적인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녀는 그를 한껏 조롱하고 무시하고 그에게서 끊임없이 도망치는 방식으로 사랑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로고진은 나스따시야를 여왕처럼 고귀하게 대접하려 하지만, 그녀는 여왕과 동시에 학대 받는 하녀 역할을 자청한다. 로고진은 그가 갖는 가공할 정열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는 고작 절망적인 경멸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얼마나 나를 깔보았으면, 원한조차 가지지 않을까라고 토로한다. 용서해주지 않고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라는 로고진의 서슬 퍼런 협박에도 나스따시야는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며 그를 조소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왜 나스따시야는 세상을 바꿀 만한 미모를 지니고도 세상을 피해 암흑 속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는가. 나스따시야는 어린 시절 대부호이자 호색한인 또쯔끼의 눈에 띄어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또쯔끼는 십대인 그녀를 농락하고도 귀족적인 속물주의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체면을 지키려 하는 자다. 뛰어난 지성과 더불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니힐리즘을 지니고 독단적인 처사를 일삼는 그녀는 또쯔끼에게 점차 위협적인 대상이 된다. 심지어 또쯔끼는 그녀를 두려워하여 그녀에게 부유한 생활을 보장하며 환심을 사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물욕에도 길들여지지 않는다. 예빤친 장군의 장녀와 결혼하려던 또쯔끼는 나스따시야가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지참금을 주어 서둘러 가브릴라와 그녀를 결혼시키려 한다. 그러나 물욕도, 애정에 대한 욕구도 없는 나스따시야는 로고진과 가브릴라에 의해 자신의 몸값이 흥정되는 상황을 가학적인 쾌감으로 지켜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현현'이며 '가난한 기사', '백치'라는 수식이 따라붙는 미쉬낀 공작이다. 공작은 한 순간에 나스따시야의 절망적인 영혼을 알아보았으며, 그녀 에게 크나큰 연민을 느낀다. 나스따시야 역시 이 우스꽝스러운 '백치'의 등장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의 순진무구한 영혼을 꿰뚫어본다. 그녀는 공작이 일생에서 최초로 마음을 맡길 만한, 진정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 단언한다. 그러면서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달려 있는 유희적인 인생의 결정을 공작에게 위임한다. 그런데 공작은 광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그녀에게 청혼을 하기에 이른다.

나스따시야, 나는 로고진의 여자가 아닌 성스런 당신을 데려가는거요.…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 그리고 본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내가 당신에게가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영광을 베풀어주는 겁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고통을 받아 왔고 그런 지옥 속에서도 순결한 몸으로 빠져나왔어요. 그건 대단히 많은 걸 의미합니다. …나스따시야, 나는…당신을…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 누구도 당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당신의 삶이 완전히 파멸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무엇 때문에 당신은 그런 사실에 연연해 합니까? …당신에게는 많은 배려가 필요합니다. 내가 당신을 돌봐드리겠어요. 나는 아까 당신의 얼굴을 보고 당신이 나를 부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나는 당신을 평생 존경하며 살겠습니다.

공작의 이러한 선언은 무엇보다도 나스따시야의 영혼에 깊은 각인을 남긴다. 그러나 나스따시야는 공작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나스따시야는 공작이 자신과 결혼하면 인생을 파멸시켰다는 원망을 하리라고 장담하며, 아무 것도 믿지 않으니 맹세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작이야말로 그녀의 몽상 속에서 언제나 꿈꿔왔던, 그녀를 존중하며 진정으로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뿐, 나스따시야는 공작을 외면하고 로고진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난다. 모스끄바로 간 나스따시야는 막상 로고진과 결혼을 하게 되는 상황이 닥치자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그에게서 도망쳐 공작에게 간다. 그러나 그녀는 로고진보다 공작을 더욱 두려워하여 공작에게서도 역시 도망쳐버리고 만다.

공작은 수선스런 일련의 사건 뒤에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오면서 예빤친 장군의 막내딸인 아글라야에게 편지를 쓴다. 나스따시야에 대한 공작의 사랑 고백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글라야와 공작과의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도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분, 가장 필요한 분은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행복하신가요?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입니다.

나스따시야의 경우, 공작은 자신이 그녀를 돌볼 책임이 있으며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아글라야의 경우는 공작이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아글라야와 나스따시야는 동전의 양면처럼 매우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 드높은 자존심과 남다른 지성을 가졌다는 점, 천방지축인 '어린아이'와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녔다는 점,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을 지녔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부모와 형제의 틈 속에서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지만, 나스따시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리의 여자'였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나스따시야와 아글라야를 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스따시야에게 있어 공작이 '그리스도'라면, 아글라야에게는 '가난한 기사'다.

그 남자는 한번 이상을 세우면 그것을 믿고, 또 그 이상을 믿게 되면 평생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한 사람이예요. …자기의 숙녀가 누구이든 또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이 가난한 기사는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또한 그 기사는 자기가 그녀를 택했다는 것과 그녀의 순결한 아름다움을 믿어 영원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에 만족한다는 거지요. …나는 처음엔 이해도 못 하면서 웃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가난한 기사를 사랑해요. 무엇보다도 그의 공적을 찬양해요.

가난한 기사, 라는 칭호에는 이미 아글라야가 연적으로서 나스따시야를 의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아글라야는 공작이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고상하고, 훌륭하고, 선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자부심이 없음을 심하게 질타하며, 그와는 결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공작이 그녀에게 청혼할 의사가 없었다고 밝히는데, 이것은 그녀를 향한 존경심 때문이었지 결코 그녀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아글라야가 감히 '자신과 같은 남자'를 사랑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공작의 이러한 태도가 나스따시야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이 무렵의 공작에게 나스따시야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었지,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아글라야는 나스따시야가 그에게 그렇게 했듯, 재산이나 직업 등의 속물적 조건들을 가늠하며 자신에게 청혼할 것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공작은 그가 '필요로 하는' 아글라야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거의 환희에 가득차서 받아들인다. 그는 이번에는 아글라야를 사랑한다는, 열정에 가득찬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고슴도치를 선물이랍시고 보내는 등 공작을 조롱하며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아글라야는 공작의 마음 속에 크나큰 연민의 대상인 나스따시야가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행동에는 나스따시야의 심술궂음을 흉내냄으로서 공작의 연민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당신은 나의 거친 언사를 나무라지 않을 건가요. 언젠가…먼 훗날에라도." 라고 묻는 아글라야는 이미 공작을 향한 솔직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공작은 로고진을 찾아가 나스따시야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해명하려 한다. 이제까지 로고진과 나스따시야의 결혼을 반대하던 그의 입장과는 조금 모순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로고진은 절망에 가득차서 나스따시야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공작일 뿐이며, 그녀가 아글라야에게 수도 없이 편지를 했다고 전해준다. 나스따시야는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존재인 공작―진정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믿을 수 있는―이 아글라야와 결혼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이는 공작이 아글라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행복하냐고 물었던 것과도 연결된다. 사랑하는 사람―그들에게 있어 상대의 행복이란 자신의 불행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 나스따시야가 마지막이라며 공작을 찾아와 '당신은 행복해? 내게 한 마디만 해 줘 봐. 당신 지금 행복해? 오늘, 지금 말야?' 라고 묻는 장면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다만 나스따시야를 옹호하는 공작의 태도를 더 이상 인정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 불행한 여인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타락하고, 가장 죄가 많다고 깊이 믿고 있어요.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마세요. …내가 그와 같은 암흑을 그녀에게서 몰아내려고 시도했을 때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워했어요. …그 여인이 내게서 떠난 이유를 아시나요? 그녀가 저급한 여인이라는 것을 나에게 증명하기 위해서예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끊임없이 자신의 수치를 의식하는 배경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무서운 쾌감이 스며 있을 거예요. …나의 청혼에 대해 그녀는 누구에게도 오만한 연민이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며 자기만큼이나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기 따위는 거절한다고 선언했어요.

결국 아글라야는 공작과 함께 나스따시야를 찾아간다. 그녀의 긍지는 자신의 눈 앞에서 공작이 나스따시야를 외면하는 모습을 목격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글라야는 나스따시야에게 당신은 다만 자신의 수치를 사랑하고, 자기가 창피를 당하며 끊임없이 모욕에 시달리고 있다는 비뚤어진 생각 밖에 사랑할 줄 몰라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나스따시야가 공작과 자기 사이에 끼여들 아무런 권리도 없음을 주장하며, 악의적으로 나스따시야의 타락을 비난한다. 급기야 공작은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해야 하는 여자 사이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최대의 위기에 몰린다.

"이런 일이 결국 벌이지고 말았군요! 이 사람은…몹시 불행한 여자잖아요!"

아글라야는 동요하는 공작의 모습을 한순간도 견뎌 낼 수 없었다. 공작은 결국 나스따시야를 선택했다. 공작은 그리스도로 남게 된 것이다. 나스따시야는 공작과 결혼하기를 희망하지만 결국 그녀는 공작에게서 또다시 도망친다. 결혼식을 한 시간 앞두고 그녀는 군중 속에 있던 로고진에게 소리친다.

"살려 줘! 날 데려가! 어디든 원하는 대로, 지금 당장에!"

왜 나스따시야는 외롭고 긴 줄다리기 끝에 얻게 된 공작의 사랑을 또다시 길바닥에 내던져버릴 수 밖에 없던 것인가. 더구나 그녀는 로고진에게로 가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죽음을 예상하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나스따시야의 세상이란 협잡꾼들과 난봉꾼들이 드글거리는 도박판과도 같았으며, 그녀의 삶도 바로 도박과 마찬가지였다. 아글라야가 일갈했듯이 나스따시야에게 있어 증오하는 대상이 없는 삶이란 수치스러움을 안고 사는 삶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공작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녀 자신을 송두리째 부정한다는 의미다. 나스따시야에게는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보다 덜 괴로웠던 것일까. '누구든 죄가 없으면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녀는 단호하게 뿌리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으며 동시에 구차한 구원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노라는 극단적인 니힐리즘 때문인 것이다.

『백치』는 『죄와 벌』과는 달리 그 누구도 사랑으로 인해 구원받지 못한, 어찌 보면 매우 비관적인 작품이다. 미쉬낀 공작은 진정한 '가난한 기사'도, '그리스도'도 되지 못했으며 결국 처음의 백치 상태로 돌아갔을 따름이다. 그는 사랑하는 일도, 사랑받는 일에서도 실패하였으며, 어쩌면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연민과 사랑을 혼동하는 공작, 사랑을 뛰어넘는 불온한 증오를 지닌 로고진, 질투심에 사로잡혀 사랑을 농락하는 아글라야, 불행한 운명을 조롱하며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간 나스따시야는 모두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에게 평생토록 기도해주겠다는 꼴랴의 모습은 궁극적인 사랑과 구원에 대한 의미심장한 암시이다. 물론 미쉬낀 공작의 연민은 꼴랴 못지 않은 순도 높은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실패하였는데 그 까닭은 의심과 증오, 불온한 열정이 지배하는 니힐리즘적 풍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이 어떻게 서로를 구원하여 보다 높은 곳을 향한 다리를 놓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백치)가 홀바인의 그림처럼 사실적인 패배자로 남아 다시 죽음(無)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고통스러운 시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랑만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그것은 관념의 화신인 라스꼴리니꼬프도 끝내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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