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21)
우리는 무력하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부모의 돌봄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했다. 아기는 물론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세속적인 보답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아기는 그냥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즉 발가벗겨진 상태의 정체성으로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는 것이다. 아기는 그 통제할 수 없는,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특성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애정은 성취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예의를 지킨다든가, 학교나 다른 곳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든가, 계급이나 명성을 얻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훌륭한 행동으로 남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근저에 깔린 감정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 부엌 바닥에 집짓기 블록을 늘어놓기만 해도, 부드럽고 통통한 몸을 뒤치며 믿음이 담긴 눈으로 말똥말똥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를 끌어안아주었던 그 관대하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다시 붙잡고 싶기 때문이다.(30)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안 되지, 얘야.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도 싫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5)
사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38)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 인구 대다수는 농민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가난했고, 영양 상태가 부실했고, 추위와 공포에 시달렸고,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고통을 겪다가 죽곤 했다. 평생 일을 해도 그들의 손에 남는 가장 값비싼 소유물은 암소나 염소나 항아리에 불과했다. 기근은 늘 가끼이에 있었고 병은 어디에나 만연했다.(45)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56)
그러나 어떤 것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심리를 생각해보면 이런 박탈감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떤 것-예를 들어 부나 존중-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건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고, 중세 조상의 생활과 비교하여 판단할 수도 없다.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가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다고 강조하는 소리를 들어봤자 전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오직 우리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만큼 가졌을 때, 또는 그보다 약간 더 가졌을 때만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56)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58)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일반 병사는 상사나 상병에게 느끼는 것에 비교하면 장군에게는 전혀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뛰어난 작가 역시 평범한 삼류작가보다는 자신에게 좀 더 접근한 작가들로부터 질투를 더 받는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 데이비드 흄(59)
왜 어떤 사람은 땅을 갈아야 할 운명이고 어떤 사람은 연회장에서 잔치를 즐길 운명이냐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지배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창조주의 의지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 국가의 모든 기관은 인간 신체의 여러 기관에 비유할 수 있다. 통치자는 머리이고, 의회는 심자이며, 법원은 허리이고, 관리와 판사는 눈, 귀, 혀이고, 재무 담당자들은 배와 내장이고, 군대는 손이며, 농민과 노동자는 발이다. 이 이미지에 따르면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는 바꿀 수 없는 역할이 할당되어 있으며, 농민이 영주의 저택에 살면서 정부의 일에 대해 발언을 하는 것은 발가락이 눈이 되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해괴망측한 일이었다.(62)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게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귀족 계급의 지원을 받는 왕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 사회는 그 참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맛보기 어려운 몇 가지 행복을 누렸다. 민중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신분 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도자와 동등해지기를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갔지만 반감을 품지도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신이 정해준 불가피한 고난이라고 생각했다. 농노는 자신의 열등한 위치가 불변의 자연 질서의 결과라고 여겼다. 사회는 불평등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지는 않았다.(67)
가난한 시민은 부자 시민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했으며, 언젠가는 그들의 뒤를 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늘 틀린 것은 아니었다. 초라한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큰 부를 일군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예외가 규칙이 될 수는 없었다. 미국에도 여전히 최하층 빈민이 있었다. 그러나 귀족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기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68)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71)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은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감이기도 하다.(71)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80)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82)
경제적인 능력주의 사회에서 상속이나 다른 유리한 조건 없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개인은 과거 아버지에게서 돈과 저택을 물려받았던 귀족은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개인적 정당성의 요소를 확보했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 실패는 과거에 삶의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던 농민은 다행스럽게도 겪을 필요가 없었던 수치감과 연결되었다. 경제적 능력주의와 더불어 어떤 영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 ‘불운하다’고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되었다. 따라서 빈자들은 이제 부자들의 자선과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자수성가한 강건한 개인들의 눈에는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 사회진화론자들은 모든 인간이 처음에는 돈, 일자리, 존경이라는 빈약한 자원을 놓고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쟁에서 일부는 우위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부당한 이점이나 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뒤처진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은 더 힘이 세며, 그들의 씨는 더 강하며, 그들의 정신은 더 빈틈없다.(113)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119)
전통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위대한 야망은 이러한 방정식의 전체적인 역전을 제도화하고, 세습 특권과 세습 비특권을 없애 개인적 성취가 지위를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개인적 성취란 주로 경제적 성취를 의미했다.(123)
고대 그리스인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재능을 뮤즈라는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서사시, 역사, 연애시, 음악, 비극, 찬가, 춤, 희극, 천문학을 담당하는 뮤즈가 다 따로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든 그 사람은 자신의 재능이 진정한 자기 것이 결코 아니며, 이 예민한 신들의 마음이 바뀌면 한 방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125)
사람은 거짓되고, 음험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신의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된 일은 없을 것이다. - 구이차르디니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와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 마키아벨리(130)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며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 쇼펜하우어(165)
이렇게 인간성을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_-;) 도덕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합리성과 진실한 마음을 갖추고, 관습이나 허영이나 격식 같은 상류 사회의 소도구 없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만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대가로 우리는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샹포르(166)
이 세상에서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은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167)
교양은 새로 나온 책을 비평하는 사람에게는 바람직한 특질이며, 순문학을 하는 사람에게도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일상생활이나 정치에 적용할 경우 이것은 편협한 흠잡기, 이기적 편안함의 추구, 우유부단한 행동을 의미한다. 교양인은 살아 있는 인간들 가운에 가장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 뻔한 현학과 양식 결여라는 면에서 어떤 사람도 그와 동급이 될 수 없다. 그에게는 어떤 가정도 비현실적이지 않으며, 어떤 목적도 비실용적이지 않다. - 해리슨(171)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력, 용기, 지능, 체력이다. (248)
물자를 아주 많이 소유하는 것은 이 물자가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명예를 제공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일이 된다. (250)
부자가 되는 사람이나 빈자가 되는 사람이나 딱히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다. (..) 즉 소득과 명예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다. 수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운과 환경도 있고, 병과 공포도 있고, 우연과 뒤늦은 발달도 있고, 적절한 시운과 불행도 있다.(256)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268)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직업에 포함된 많은 것이 편집되고 오직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만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269)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에 대한 공격의 핵심은 이것이 우선순위를 엄청나게 왜곡하여, 물질적 축적 과정을 가장 놓은 수준의 성취로 치켜세웠다는 것이다.(269)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 러스킨(271)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298)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용기를 얻어 사회의 기대 가운에 정당성이 없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해골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300)
바니타스 미술의 목적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으로 그 소유자를 우울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경험의 구체적인 면에서 결함을 찾아낼 용기를 주고, 동시에 사랑, 선, 신실, 겸손, 친절 등의 미덕에 좀 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질 자유를 주었다.(306)
현자, 귀족, 권력가, 왕, 정복자/죽음은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왜 한 시간의 영광을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쓰는가?/부의 냇물에서 거닐고 명성이 높이 치솟으면 뭐하는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도 “여기 그가 누워 있다”에서 끝이 나고/가장 고귀한 노래도 “흙에서 흙으로”가 마무리를 하는데. - 에드워드 영(309)
문장의 자랑, 권력의 허세, 모든 아름다움, 모든 부가, 똑같이 불가피한 순간을 기다린다. 영광의 길은 무덤으로 통할 뿐 - 토머스 그레이(310)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질 운명이다. 영원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들 가운데 중요하다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 우리의 불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획과 관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가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따라서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315)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든 가장 힘 센 인간과 커다란 자연-큰 사막, 높은 산, 빙하와 대양-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320)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인간적인 깨달음이다.(330)
스위스에서는 가장 큰 도시에 가도 낯선 사람들과 함께 버스나 열차를 타는 일을 피하고 싶은 욕구가 로스앤젤레스나 런던만큼 강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취리히의 최고 수준은 전차 네트워크 때문이다. 취리히의 전차는 청결하고, 안전하고, 따뜻하며, 그 정확성과 기술적 솜씨라는 면에서 교훈적이기도 하다. 불과 몇 프랑이면 효율적이고 당당한 전차를 타고 황제도 부러워할 만한 안락함을 느끼며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으니 굳이 혼자서 여행을 할 이유가 없다.(333)
샤를 보들레르는 시인, 그리고 더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전사’가 되지 않고는 어떤 일을 하든 영혼이 망가진다고 선언했다.(356)
개인 변호사나 직물 제조업자나 영리한 은행가의 활동적이고, 근면하고, 품위 있고, 긍정적인 생활은 부로 보답을 받지 부드러운 감각으로 보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의 심장은 조금씩 굳어간다. 주말마다 2000명의 노동자에게 주급을 주는 사람들은 이런 책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늘 유용하고 긍정적인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스탕달(359)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소로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즐겨 쓰기 좋아했다.(363)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그들은 돈과 공적인 지위가 궁극적으로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사람과 몇 분간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오직 부르주아적 영웅들의 공적만 보도하면서 다른 대안적 야심의 가치를 은근히 우습게 여기는 잡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의 평정이 흔들리고 우리의 헌신적인 태도가 도전에 부딪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364)
보헤미안들의 주장에 따르면, 상업적 성공 능력보다 어떤 사람의 윤리적 상상력의 한계를 명백히 보여주는 표시도 없다.(366)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에머슨의 말에 따르면, 어떻게 살고, 옷을 입고, 먹고,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고귀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에머슨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순응이니 조화니 하는 이야기는 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372)
다다의 창립자 트리스탄 차라는 1915년에 취리히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똑똑한 사람은 표준적 유형이 되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백치다. 다다는 모든 곳에서 백치적인 것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