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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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에 등장하는 소록도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은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록도의 주민은 크게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눌 수 있다. 지배받는 자는 또 관리자와 노동자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 곳의 주민들은 모두 나환자다. 즉 그들은 다시 지배받는 자 중에서도 건강인과 환자로 다시 분류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인 ‘나환자’는 지배받는 자 중에서도 환자이며, 인간 중에서도 더욱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 환자들은 치명적인 배반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배반을 당한다는 것은, 배반한 인간에게 건 자신의 인격 모두가 손상되는 사건이다. 그 손상은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는 비극을 양산해낸다. 배반은 의심과 회의를 낳으며,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경향을 형성한다. 특히 배반은 배반당한 자가 배반하는 자를 따르고 인정했던 만큼 더 지독하게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배반을 당한 인간이 그 배반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또한 천형과도 같은 질병(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을 가진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삶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나병 환자라는 특수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현재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모든 사회 구조의 문제 또한 같이 제기하고 있다.


소설은 한 퇴역군인이 소록도로 부임하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한다. 조백헌이라는 새 원장은 부임하자마자 반갑지 않은 선물을 받는데, 그것은 주민의 탈출 사건이다. 그는 탈출 사건에 대해 조사해보려고 하지만 원생들은 그에게 냉담할 뿐이다. 조원장은 패배감과 좌절감, 불신에 가득 차 있는 주민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장로회를 조직하고 섬 규율을 변경하며, 미감아 아동 학교를 통합하는 등 제도를 개선하거나 신설한다. 그러나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축구 시합을 통해 주민들을 통합시키려 한다. 그의 시도는 성공하여 주민들은 한 마음이 되었고, 조원장은 이윽고 토지간척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주민들은 조원장에게 그가 또 다른 배반의 역사를 만들지 않겠노라는 서약을 하게 하고, 동시에 자신들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뒤 간척공사에 뛰어든다. 그러나 힘든 노역으로 솟아오른 땅이 태풍 때문에 가라앉고 주민의 희생이 끊이지 않자 주민들은 원장을 찾아와 죽이려 한다. 그러나 양쪽의 서약이란 것을 이유로 들어 원장은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간척사업을 가로채려 원장을 다른 곳으로 발령낸다. 원장은 몇 년이 지나 한 주민으로 다시 소록도를 찾는다. 그리고 병자와 건강인인 두 주민의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소설이 끝난다.


소설은 대부분 조원장의 행동과 생각을 쫓아가는 데 할애한다. 즉 이 소설을 정리한다면 조원장의 소록도 일대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때로는 전지적 관점에서, 때로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때로는 다른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조원장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이상욱의 눈에 비춰지는 조원장이 있다. 이상욱의 눈에 비친 조원장의 첫 이미지는 권위적이지만(그의 권총이 이를 상징한다) 허례허식을 싫어하는(원장 부임 행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인물(소록도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관찰한다)이다. 소록도 주민들의 이상한 무관심에 의아해하는 조원장에게 정보를 주는 사람은 의료과장인 이상욱이다. 이상욱은 처음부터 조원장도 다른 원장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경계한다. 그는 특별히 ‘동상’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 ‘동상’이란 소록도를 낙토로 만들겠다던 주정수 원장이 오히려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소록도를 증오와 배반의 땅으로 만든 사건의 증거물이다. 이상욱이 조원장에게 소록도의 내력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상욱의 태도는 조원장이 또 다른 주원장이 되지 않게 하려는 배려나 또 다른 배반을 남기지 않기 위한 조심스러운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보면 이상욱은 조원장이 당연히 자신의 동상을 세우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것은 이상욱이 지닌 어떤 성향과도 관련이 있어보인다. 더 나아가 이는 소설 속에서 제시되는 나환자의 성향이나 이상욱의 지식인적인 성향이 혼재되어 있다. 이상욱의 시나리오에는 조원장이 배반하고 그 배반의 역습을 당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배반당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도 포함되어 있다. 어쨌든 이상욱의 시선에 의해 조원장은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힌다. 심지어 조원장은 이상욱의 ‘과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언질을 던짐으로써 그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상대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권력자의 공공연한 협박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욱은 축구 시합 이후 열광하는 주민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런데 주민들의 열기에 통합되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조원장의 모습을 보고 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는 주민들이 조원장을 향한 살기를 누그러뜨리는 순간 나서서 그를 처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후 그는 건강임에도 불구하고 섬을 ‘탈출’해나가서 끝까지 조원장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황노인이나 신문기자인 이정태의 눈에 비친 조원장도 있다. 앞부분에서는 조원장이 또 배반을 감행하는 인물인가에 대한 이상욱의 의혹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조원장을 ‘거인’으로 바라보고 소록도에 관한 기사를 썼던 이정태가 있다. 한편 황노인은 가장 인간다운 시선으로 조원장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조원장을 ‘하늘에서 내려주신’ 분이라고까지 말한다. 물론 그것은 조원장의 초월적 권위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의 열정과 의지에 감복해서이다. 이 세 가지 시선은 소설 속에서 엇갈리며 조원장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판단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도록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시선들과 정황들을 모아서 조원장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온당할 것이다.


조원장은 앞부분에서는 권위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이중성은 이상욱으로 하여금 그를 불안하게 느끼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념을 가진 권력자의 경우, 모든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상황보다 신념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원장은 자신은 결코 배반하여 배반당한 주원장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며, 소록도에 진정한 낙원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감 만큼이나 끈기있고 열정적인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또한 조원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위급한 순간에서도 비겁해지지 않는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조원장의 강한 자의식과 끈질긴 추진력이 배반의 모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원장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5000명의 섬 사람들을 관리하고 다스릴 권한은 그의 수중 하에 있었다. 그의 정책을 거부해도 그 자체를 갈아치울 권한은 주민들에게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장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을 할 수 없는 주민들의 입장에서 원장은 근본적으로 자신들과 달랐다. 우선 원장이 되는 사람은 병을 앓지 않은 온전한 정상인이었다. 그는 나환자들이 그토록 거부하고 부정하는 ‘나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그들의 문제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들처럼’ 사고할 수는 없다. 이상욱에 말에 따르면, 원장은 ‘주민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입장’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주민들의 앞에 나서서 선동하고, 관리하는 권력가의 입장인 것이다. 다스리는 자는 아무리 낮은 곳으로 내려와도 자신이 다스리는 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위치에 따라 자동적으로 권위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소설의 말미에서 설파하고 있듯, 원장이 제시한 천국이란 그저 원장의 천국에 불과했다. 이전의 원장들이 상상했고, 만들기 위해 주민들을 배반해야 했던 ‘당신들의 천국’인 것이다. 한편 원장이 제시한 천국은 결국 나환자들의 수용소이며 감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상욱은 강조했다. 그 천국이 아무리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라도, 나환자라는 특수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천국이란 지옥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천국은 나환자들이 인간이라기보다는 환자라는 사실을 언제나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인들은 오지 않으며, 정상인들은 가치를 두지 않는 곳이 아무리 살기 좋다고 해도 이미 인간의 천국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원장이나 어떤 지도자도 그 이상의 낙원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조원장도 실패했다. 그의 간척사업은 흐지부지 끝났고, 나환자들은 여전히 섬을 탈출하거나 자살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낙원을 제시하고 건설할 수 있는 것일까.


신문기사 이정태는 한 민간인으로 소록도를 다시 찾은 조원장과의 대화에서, 그가 섬의 광기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조원장은 더 이상 관리자나 지배자가 아니라 섬과 운명을 같이 하는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섬을 다시 찾은 조원장은 이제 야심만만한 추진가가 아니었다. 섬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멈춰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섬의 일에 관여하여 비판하거나 바꾸려는 노력을 할 수 없었다. 섬의 일부가 된 그는 이미 섬의 의지에도 소속된 것이다. 이 섬의 의지란 나환자들이 끊임없이 부정하는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한 것이다. 나환자는 자신이 병으로 인해 저주받았다는 사실에 자포자기하면서도, 그 상황에 안주한다. 그들은 ‘원래부터 교육 수준이 낮았고, 유랑과 무위도식의 악습에 물들어 있던 무리들이었다. 절망하기 잘하고 까닭없이 반항하고, 그리고 원망과 질투가 강한 병적 심리의 소유자들이었다.’ 삶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타나토스적 충동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어떤 개선 의지도 비웃으며, 성과 없는 일의 결과에 무섭게 분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어떤 비극적인 결함이기도 하다. 불합리한 제도나 운명적인 재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현실 인식과 싸워야만 한다. 해봤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때때로 의지박약을 정당화해주며, 순응적인 운명론을 진리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습성은 일종의 광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접받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임을 포기하는 절망 속에서 느끼는 자기모멸의 쾌락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 소록도의 주민들은 결론적으로 또 하나의 배반을 맛 보았다. 조원장이 비록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하지 않았지만, 간척사업이라는 운명을 뒤엎기 위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그 실패는 조원장이나 국가나 이웃 마을 주민들 때문이 아니라, ‘무서운 복수심을 가지고 인간의 의지에 끈질기게 거역해 오고 있는 두려운 생명체’인 바다 때문이었다. 인간의 의지에 거역하는 자연 혹은 운명과 싸우는 것이 태초부터 주어진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시지프스 신화에서 보여주듯, 인간은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신의 벌이라고 해 두어야겠지만― 영원히 돌을 절벽까지 끌고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어차피 떨어질 수밖에 없는 돌이라고 그냥 멈추어 있는다면,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상욱이나 윤해원, 서미연 등은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멈추지 않는 존재들이다. 상욱과 미연은 미감아고, 윤해원은 자처하여 나병을 얻었다가 회복한 사람이다. 상욱과 미연이 자신을 태어나게 한 섬으로 되돌아온 것은 운명에 맞서겠다는 의지로도 볼 수 있다. 상욱은 끊임없이 조원장을 경계하고 섬의 운명에 대해 고심하는 것으로, 서미연은 건강인에 대한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는 윤해원에 대한 사랑으로 의지를 실현시킨다. 윤해원이 건강인으로서 섬을 찾아 간호하는 여자들을 괴롭혀 떠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자학이지만, 나병이라는 비극에 맞설 인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기확신의 발로이기도 그들은 인간이기에 앞서 나환자라는 인식이 그들의 삶을 규정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고립시키는 것에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보인다.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원장들이 추구한 비현실적이며 나환자차별적인 천국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소설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조원장처럼 병력이 전혀 없거나 이상욱이나 서미연처럼 미감이거나 자처해서 나병을 얻은 윤해원이다. 순전한 나환자는 오직 황노인 뿐이다. 황노인은 나환자들의 대표인데, 대표가 된 이유는 그가 나이가 굉장히 많은 축에 속하고 살아온 내력이 심상치 않으며 섬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작 나환자들 자신이 생각하는 천국이나 인간적인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되지 않은 것이다. 지배자의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섬 사람들과 결코 화합할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이상욱이다. 또한 나환자의 운명과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논하는 것도 정작 나환자들은 아닌 것이다. 여전히 나환자들은 소설 속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들 개개인의 내력이나 섬에서 일어난 무수한 비극적 사건들도 5000명이라는 단위 속에 묻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환자들은 마치 한 사람과도 같아 보인다. 함께 열기를 불태우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포기하는 존재들이며, 그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것은 황노인 같은 대표나 조원장 같은 지배자인 것이다.


나환자들 사이에서 저질러진 가장 큰 배반에 대해서도 ‘소설’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그 배반은 상욱의 아버지인 이순구가 섬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무사히 아이를 낳아 섬을 탈출시킬 수 있었던 사실을 망각하고 관리자로서 그들 위에 군림하려 했던 사건이다. 그리고 이순구는 살해당함으로써 배반의 대가를 치른다. 그래서 섬 사람들의 애정 속에서 태어났지만 동시에 섬 사람들을 배반한 죄과까지 물려받은 이상욱은, 나환자 문제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환자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그는 나환자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나환자 자신이 아니라 나환자를 관찰하고 규정하고 그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고통받고 핍박받는 나환자 자체라기 보다는 지식인에 가까운 존재다. 그래서 그는 조원장을 비판하는 동시에 나환자들도 비판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비판한다. 한편 신문기사 이정태는 마지막에 조원장을 찾아와 ‘객관적인 입장’에서 현재의 소록도에 대한 원장의 판단을 듣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 속에서 비판되고 또 옹호되는 나환자들은 정작 그 자신들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 그들은 목소리보다는 행동으로, 단체적인 행동으로 의사를 표시한다. 섬을 떠나지 못하도록 억지로 막는 시대도 아닌데, 굳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 뭍으로 가는 자유를 향한 의사표시가 그들의 거의 유일하게 가시적인 행동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환자인 인간의 자유와 본질이라는 문제에 매우 섬세하게 접근했지만, 그 시선이 여전히 지식인의 한계에 머물로 있다는 아쉬움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길고 사변적인 자유와 지배에 대한 이야기들도, 정작 나환자의 구체적인 삶 자체에는 별로 닿아 있는 것 같지 않다. 물론 이 소설에서 조원장은 나환자의 입장은 아니더라도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위치로 내려오는 상징적인 행동을 한다. 이는 그의 말 속에서도 강조되듯이 사랑과 신뢰로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가로막는 상하관계부터 없애야 한다는 것을 실천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해 언급하는 조원장의 태도에는 여전히 지배자의 관점이 남아 있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내내 고민한 문제일 것이다. 즉 뭔가 개선하고 앞장서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규정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조원장 자신도 지적하고 있지만, ‘자유와 사랑으로 행하는 권력자’란 지극히 이중적이며, 존재하기 어렵다. 이 딜레마를 해결해보기 위해서 소설은 공동체에서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설파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어떤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소설이 긴 철학적 대화를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오히려 나환자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통해 그 자유의 문제를 더 섬세하게 제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환자들이 항상 복수(複數)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도 그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리고 때때로 등장인물들이 서로에 대해서 초월적으로 정보를 알고 있다는 식의 설정도 다소 의문스럽다. 조원장이 이상욱의 내력에 대해 짐작하고, 한만이란 나환자가 이상욱의 과거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소설을 쓰고(이상욱이 그 소년이라는 전제 하에), 황노인이나 이상욱이 서로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발언들은 이청준의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작가의 고유한 작풍일 수도 있지만, 때때로 별다른 근거 없이 서로에 대한 정보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나오는 설정들은 무리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억압받고 지배받는 사람의 문제를 다룬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배반과 그들의 절망과 숙명적 자포자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굳이 나환자의 특수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는 면도 많다. 여전히 사회 구조 속에서 지배자의 위치는 굳건하고, 지배자에게 지배받으면서 자유를 얻는 방법이란 오리무중이다. 또한 인간의 자유 역시 규정짓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인간이 섬처럼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디까지나 사회 구조와 인간 관계 속에서 자유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딜레마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인간의 모습은 시지프스를 뛰어넘어 스스로 운명을 거부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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