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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이영조 지음 / 풍림 / 1986년 1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때 읽고 전율했던 이 소설을, 서점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1987년에 발행된 책인데, 재판을 하지 않아서 책이 없는 것이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해서, 바로 샀다. 내가 읽었던 그 판이 맞다. 그리고 감동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1987년에 번역된 것이라 말투나 외래어 표현 등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많았지만, 내용이 좋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랴. 도대체 이렇게 좋은 책은 왜 번역을 안 하고 내버려 두는 것일까?
레이몽 훠스카. 그는 1297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 600년 간의 이야기를, 배우인 레진느에게 들려주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불사의 인간이라니, 정말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레이몽이 만난 숱한 사람들은 불사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불사인 그를 저주하고, 그의 곁을 떠난다. 사랑하던 여인도, 아들도 마찬가지다.
배우인 레진느는 자신의 삶을 좀 더 열정적으로, 치열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녀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두 사람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나는 말을 나누고 있는 나, 또 하나는 말을 듣고 있는 나. 그래서 한 사람은 살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나를 사랑할 수 있을 터인데! 난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터인데. (16)’ 더구나 그녀는 자기 존재가 보잘것 없다는 것에 대해 미치도록 절망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성인이 지나치게 많았고, 성녀 또한 남아돌고 있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평등하고 보편적인 자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25)’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는 많은 인간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그리고 그녀 역시 무엇 하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릴 이 호텔의 변함 없는 방을 증오했다.(29)’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다만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외한 정도로만 사랑을 줄 수 있다. ‘그녀는 그의 계산된 상냥함, 지성이 뒷받침된 헌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넋도, 몸도 그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해서 그녀가 품을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그에게 쏟고 있었다.(34)’
그리고 우연히,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는 레이몽을 관찰하다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금 ‘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 레이몽은 거부한다. 그러나 레진느는 끊임없이 그를 독촉한다. 그는 ‘나는 살고 있어. 그런데도 나는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소. 나는 결코 죽지 않을 테지. 그래서 내게는 미래도 없어. 나는 그 누구도 아닌 것입니다. 내게는 결국 역사도 없고, 얼굴도 없는 것입니다.(49)’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윽고 ‘나를 밤과 무관심에서 구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여자들 속에서 당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세계가 다시금 그 모양을 되찾을 것입니다. 눈물이나 미소나, 기대나 두려움이 생겨날 테지요. 나는 산 인간이 되는 겁니다.(61)’ 그는 또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로 끝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레진느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아름다움과 젊음이 덧없으며 그녀 존재가 하나의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녀는 시도하고 있었다. 한 집안의 주인역의 연기를, 영광의 연기를, 유혹의 연기를. 그것은 모두 오직 하나의 연기, 존재의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104)’
그리고 이윽고 그는 레진느에게, 자신의 600년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어느 거지가 떠벌리는 불사의 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먼저 생쥐에게 시험해본다. 그리고 그걸 마시기를 반대하는 까뜨린느의 말을 무시하고, 결국 불사의 몸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음을 겪는다. ‘나의 아내는 죽어 있었다. 그 아들도, 손자도. 나의 모든 반려는 죽어 있었다. 나만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닮은 것은 이제는 세상 천지에 아무 것도 없었다. 과거는 내게서 떼어내어져 버렸다. 이제는 나를 묶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억도, 사랑도, 의무도.(153)’
나는 눈을 떴고, 지루해 있었다. 나는 침대 밑으로 뛰어 내렸다.
- 하지만 이 세상에서 무얼 바랄 수 있지?
- 많이 있습니다.
나는 웃어젖혔다. 그녀를 만족시키기란 손쉬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까뜨린느를 파묻은 그날, 이제는 아무 것도, 그 어디에도 나를 기다리는 것이 없어진 그날처럼 팔에 힘이 없는 것을 느꼈다.(165)
그는 까뜨린느의 죽음 이후, 아들을 통해 기쁨을 느끼고자 한다. 그는 아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키고, 전쟁으로 인해 그를 잃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격리하여 보호한다. 그리고 ‘이 아이의 운명을 만들어 준 것은 나인 것이다. 앙뜨완느가 웃는 소리를 들으면,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뛰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생명을 준 것이다. 또한 세계를 준 것이다.(170)’라고 생각하며 만족감을 느낀다. 그리고 길에서 만난 베아트리스를 성에 머무르게 하며, 그녀와 앙뜨완느가 우정을 누리게 한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앙뜨완느를 사랑하고, 앙뜨완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레이몽의 비밀을 모르는데도, 레이몽에게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당당하다. 나이는 고작 ‘22세! 그러나 그녀는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녀는 몇 세기 전부터 이 세상에 살고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이 세상을 자기집 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재판하고 있었다.(176)’
앙뜨완느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증명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레이몽은 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억지로 베아트리스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그의 비밀을 알게 된 베아트리스는, 평생 그에게 다정한 키스 한 번 해주지 않았다.
- 아뇨, 당신은 악마는 아닙니다. 나는 악마를 믿지 않아요.
- 그렇다면?
- 당신은 인간이 아닌 거예요.
그녀는 느닷없이 사나운 투로 말했다.
- 당신은 죽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쓰러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그녀의 눈 안쪽에 나를 보았다. 죽어 있는 나를. 겨울도, 꽃도 모르는 삼나무처럼 죽어 있는 나를.(180)
- 당신 곁에서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걸 모르시나요? 당신은 모든 욕망을 죽여버려요. 그저 줄 뿐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아기의 장난감밖엔 주지를 못해요. 앙뜨완느가 죽음을 택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당신은 그 사람한테 다른 생존법을 허용치 않았던 거죠.(182)
- 정말 나를 사랑할 수는 없는가?
- 그 얘기는 그만두도록 해요.
그녀는 이내 말했다.
- 나를 사랑해준다면, 만사는 달라질 텐데.
- 훨씬 전부터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됐어요.
-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아.
나는 흐린 큰 거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주름살 하나 없는 장년의 사나이. 이 근육이 우람스러운 몸은 피로를 몰랐다. 나는 그 무렵의 어떤 사나이보다도 컸다.
- 나는 그렇듯 보기 싫은 인간인가?
나는 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 앞에 마주앉았다.
- 네가 앙뜨완느 가운데에 사랑한 것이 내게는 아마 없는 모양이지? (..) 나는 알고 있어. 그 애는 아름답고, 너그럽고 용기가 있는 데다가 높은 긍지를 갖고 있었지. 내게는 그런 덕이 하나도 없나?
- 당신이 나쁘신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고 있는 거죠.(..)앙뜨완느가 호수로 뛰어들었을 때, 또 돌격의 선두에 섰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목숨을 걸고 이기에 그를 찬미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용기란 뭔가요? 당신은 당신의 부귀, 당신의 시간, 당신의 노고를 아낌없이 줍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남에게 주는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 정도의 숱한 목숨을 갖고 계십니다. 나는 그 사람의 긍지도 사랑했어요. 그러나 당신은 예외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그걸 알고 계십니다. 그래가지고는 내 마음은 움직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녀는 증오도, 연민도 담지 않은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말을 통해 오랫동안 잊어왔던 과거의 목소리, 고뇌를 담아 말한 까뜨린느의 목소리를 들었다.
- 내가 하는 것, 나라는 인간은 내가 불사라는 이유로 네 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거냐?
- 그래요. 그렇습니다. 저 여자가 노래하는 것을 들어보세요. 만약 저 여자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저 여자의 노래는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을 걸요.
- 그렇다면 저것은 하나의 저주가 아닌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렇지만 나는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살아 있어. 너를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있지. 미래 영겁에서 나는 다시는 너를 만날 수는 없는 것이지. 만나는 것은 너와는 다르지.(..)
- 당신 몸이 무서운 거예요. 그것은 다른 종족의 거입니다.
- 너하고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구.
눈물이 그녀의 눈에 솟아나왔다.
- 모르시나요? 나는 영원히 썩지 않는 손으로 애무를 당하는 일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차라리 더럽다고 말해 버리는 편이 낫겠군.
-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요.
나는 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저주받은 손을.
- 이 백년 동안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어. 지금은 알았지. 베어트리스, 너는 자유야. 만약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떠나가라구. 만일 한 사나이를 사랑하게 된다면 아무런 뉘우침 없이 그 사나이를 사랑하도록 하라구.(187)
- 용서해다오.
나는 입술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갖다댔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른 몇 백만이라는 여자 중의 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애정도, 회한도 지나가버린 것의 맛이 났다.(195)
베아트리스는 결국 그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모르는 곳에서 죽는다. 그는 조국을 위해 전쟁을 하고, 정복하고, 영토 확장을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만 죽어가고, 그에게 삶은 점점 의미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 설령 황제라 할지라도 한 인간에게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01)’라는 대답만이 그의 진실일 뿐이다. 인민을 생각하라는 신하의 말을 듣고 그는 외친다. - 나의 인민? 그것은 벌써 거듭 죽었어! 어찌 내가 그들과 맺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은 결코 똑같은 인민이 아니라구.(195)
그는 점점 불사의 인간이 겪는 실존적 인식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죽은 자는 이미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었다. 세계는 늘 마찬가지로 가득차 있다. 하늘에는 언제나 똑같은 태양이 빛나고 있다. 가엾은 인간은 하나도 없었고, 아까워할 것은 그 무엇 하나 없었다.(229)’ 그리고 그는 생명을 지닌 자들의 놀라운 결정을 수없이 보고 겪는다. ‘그래서 이 불행한 인디언들은 차라리 즉시 죽기로 결정한 겝니다. 그들은 속히 죽기 위해 흙이나 돌을 먹었지요. 그리고 천국에서 스페인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위험을 피하고자 세례를 받을 것을 거부했습니다.(247)’
그는 한 사나이와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 싶어한 적도 있다. 그는 그 사나이의 꿈을 실현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운명이 다른’ 존재였다.
- 아아, 나는 정말 불사의 몸이 되고 싶소!
그는 정열적으로 말했다.
- 나 역시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 그렇게 되면 나는 꼭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 걸. 나는 지구의 모든 강을 내려가, 모든 대륙의 지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 아니. 자네는 곧 중국에 흥미를 잃게 될 걸. 그 무엇에 대해서도 흥미를 품지 않게 될 거야. 세계에 자네는 다만 외톨이가 되어버릴 테니까.(..)나는 한 번도 친구를 가진 적이 없었어. 인간들은 나를 늘 이국인이나 또는 죽은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지.(272)
- 자네 왜 훨씬 전부터 그 일기에 아무 것도 적어넣지 않았지?
- 자네가 날 바보취급하기 때문이야?
- 내가 자네를 바보취급한다?
- 물론 자네는 아무 말도 안 했지. 그렇지만 나는 자네의 눈을 보고 있었다고. 자네의 시선 밑에 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야. 자네는 먼 곳에서 날 바라보고 있어. 자네는 벌써 내 죽음 저쪽에 있지. 자네에게 있어서 나는 일개의 죽은 인간이야.(281)
또 다른 사랑은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프랑스. 활발하게 사회적 활동을 하는 마리안느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을, 그는 망설인다. 그는 살롱에서 이렇게 말한다.
- 당신네들은 두 사람 모두 잘못돼 있소. 이성도, 선입관도 인간에게 있어 유용한 것은 못되지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절 수 없는 만큼, 무엇 하나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없는 거죠.(..)그들은 행복해지려는 희망조차 바라지 않을 걸요. 그들은 시간이 자기를 죽이는 것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겝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호들갑스러운 말로 자기를 속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지요.(294)
- 우리는 30년, 40년 사랑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까뜨린느나 베아트리스가 쉬고 있는 것과 똑같이 무덤 속에 그녀의 관은 누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망령이 될 것이다.(330)
그래서 그는 자신이 불사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숨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 채로, 그를 사랑하고, 시간이 흐른다.
- 알아요? 만일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는 일이 있다면, 나 자살해버리고 말 거예요.
나는 그녀를 더한층 힘껏 안았다.
- 나 역시 당신 뒤에까지 살아 있지는 않겠어.(330)
- 그녀는 또 다시 책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죽어야 할 운명을 짊어질 종족이라는 사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충격, 하나의 전략, 결국 마차의 바퀴가 하나 빠진다든가, 말발굽에 채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물러빠진 뼈는 가루가 되고, 심장은 멈추며, 그들은 영원히 죽어 버리는 것이다.(332)
- 나는 그녀가 지상에서 그녀의 일 따위는 생각해낼 수조차 없게 될 무렵의 일을 정열적으로 말하고 있는 걸 듣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334)
- 내게는 풍파를 피할 만한 곳도 없고, 미래도 없고, 또한 현재도 없었다. 마리안느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원히 제외된 자였다.(334)
- 만일 그녀가 불사의 나를 사랑해준다면, 나는 모든 과거와 희망이 없는 미래에도 불구하고 진정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340)
- 자연은 영원히 그 비밀을 우리에게 밝히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의문을 생각해내고, 이어 답을 만들어낸 것은 우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험관 밑바닥에서 우리 자신의 사상밖에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343)
-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쳤어요. 당신도 생사를 걸어, 당신을 내게 맡긴 거라 믿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은 고작 몇 년 동안만 내게 당신을 빌려주고 있었군요. 나는 다른 숱한 여자 중의 하나군요. 언젠가는 내 이름조차 생각해내지를 못하게 될 거야.
- 마리안느! 내가 당신 것이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나? 나는 이제껏 이렇게, 누군가의 것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또 앞으로 아마 다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할 거야.(..)당신을 알기 전까지 나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테지? 나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만든 것은 당신이야. 당신이 나를 버리면 나는 또다시 망령이 되어버릴 거야.
- 당신은 죽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절대로 진짜 망령은 될 수 없어요. 그리고 한 순간도 당신은 나하고 똑같은 인간이 아니었던 거죠. 모두가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당신은 다른 세계 안에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내게 있어 당신이라는 사람은 없어져 버린 거예요.
- 천만에. 우리가 피차를 발견한 것은 바로 지금이라구. 그럴 것이 우리는 이제야말로 진실 속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니까.
- 당신과 나 사이에 진실이란 하나도 있을 수 없다구요. 두 사람의 죽는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있을 때라면, 두 사람은 몸도, 마음도 사랑으로 단련이 돼요. 사랑은 두 사람의 본질 자체라구요. 그렇지만 당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우연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구요.
- 내 운명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려고 해 봤소?
- 정말 무서운 일이예요.
- 나를 도와주려고는 생각지 않나?
- 당신을 도와요? 십년이나 이십년을 돕는단 말이군요. 그런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죠?
- 몇 세기 동안 당신은 내게 힘을 줄 수가 있지.
- 그 뒤에는? 또 한 사람 다른 여자가 당신을 도우러 오나요? 그럴 정도라면, 다시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345)
- 까뜨린느의 말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죠?
- 서너 개쯤 될까?
- 그럼 목소리는? 그 사람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마리안느의 손을 잡았다.
- 나는 당신을 사랑하듯이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어.
- 아아! 당신이 나를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긴 그게 좋은 거야. 이런 추억을 모조리 짊어진다면 너무 무거울 거야.
- 당신은 내 마음 속에서 다른 죽는 인간의 그 누구의 마음 속에서보다도 오래 살 수 있다구.
- 아뇨. 만일 당신이 죽는 인간이라면, 나는 당신 가슴 속에서 세계의 종말까지도 살아 있을 거예요. 그럴 것이 당신의 죽음은 내게 있어서 세계의 종말일 테니까요. 그런데도 나는 종말이 없는 세계 속에서 죽으려 하고 있는 거예요.(350)
- 나는 당신이 부럽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나에 대해서도 부러워하지는 마세요.(351)
- 거짓말은 이제 그만 좀 해 둬요! 이제 끝장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구요. 나는 이제 곧 저 세상으로 떠난단 말예요. 나 혼자 떠난다구요. 그런데도 당신은 이 세상에 남아 그대로 있는 거예요. 영원히.
그녀는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 나 혼자! 당신은 내가 혼자 떠나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힘껏 쥐었다. 그 얼마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도 함께 죽겠어. 우리는 같은 무덤에 묻힐 거야. (352)
나는 땅 위에 누웠다. 눈을 감고, 온갖 힘을 짜내어 열려진 문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과거가 존재를 계속하도록 현재가 태어나는 것을 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하루, 하룻밤 이어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전율했다. 암 것도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뚜렷이 묘지의 꽃 사이에서 꿀벌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미 문은 열려진 것이다.
나는 저린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아, 이제 너는 무엇을 하느냐? 일어나서 살기를 계속하려는가?(354)
마리안느와 함께 하나의 세계가 멸망해버렸다. 그것은 이제 영원히 떠올라오지는 않을 것이다.(355)
그리하여, 그는 이제는 불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겠다는 한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 당신이 나를 잊으시는 미래도, 내가 존재치 않았던 과거도, 나는 모두 받아들이겠어요. 그것은 당신의 일부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미래와 과거를 가지고 이 곳에 계신 것은 바로 당신이예요. 나는 흔히 그 생각을 했었지요. 시간이 우리를 떼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구요.(413)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사랑의 힘으로 수세기 이래 나는 비로소 과거나 미래를 잊고, 완전히 현존하고, 완전히 살아 있는 자기를 찾아냈다. 나는 그 곳에 있었다. 한 여자가 사랑하고 있는 한 남자였다. 다른 운명을 지니고는 있지만, 이 지구에 속하는 한 사나이였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에 닿았다. 단 한 마디로 이 죽은 껍데기는 터지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금 생명이 끓어넘치는 용암이 흘러내리고, 세계는 새로운 양상을 띠며 기대와 기쁨과 눈물이 생겨날 것이다.
-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며칠, 또는 몇 년이 흘러간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주름 투성이의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모든 빛깔은 탁해지고, 하늘은 빛을 잃고, 향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 그것은 헛일이요. 모든 것은 헛일이요.
- 나는 당신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가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불사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이 지니는 뜻의 중대함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런 사랑이 가능했다. 만일 내가 아직도 인간의 탈을 쓸 수 있다면, 이렇게도 말했을 것이다. ‘이 여자는 내가 알게 된 여자 중에서 가장 마음이 넓고, 가장 정열적인 여자다. 가장 고귀하고, 가장 순수한 여자다’라고.
그러나 이런 말은 이제 내게 있어 아무런 뜻도 없었다. 로르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나의 손은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 그 아무 것도 아니오. 당신은 모릅니다.(414)
마지막으로 레진느에게도 그는 말한다. 그의 불사가 얼마나 지독한 형벌인지를. 죽지 않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며, 살 권리도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만이 전부인 것이라는 사실을.
- 인간이 모두 죽어버리고, 지구는 흽니다. 하늘에는 아직 달이 있고, 새하얀 지구를 비치고 있지요. 나는 생쥐와 함께 다만 혼자 있는 거죠.
그는 매우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아주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의 눈길이었다.
- 어떤 생쥐?
- 저주를 받은 작은 생쥐지요. 이제 인간은 없어지고, 그 쥐 한 마리만 영원히 빙글빙글 돌고 있을 걸요. 그 놈에게 그런 운명을 준 것은 나지요.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죄악입니다.(425)
이토록 매력적인 작품을 재판하지 않는 출판사들은 각성 좀 해야 한다.이 소설을 읽고도 불사를 꿈꿀 수 있을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도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 온갖 예술, 철학이 그에게는 한낱 공허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죽지 않는 그는, 인간과 함께 할 수 없다. 그 얼마나 끔찍한 고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