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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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의 아들은 종교의 문제를 다루면서 '구원'이나 '행복'의 문제를 뿌리깊이 파헤치고 있다. 제목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아들'-혹은 '신의 아들'이란 예수이다. 예수는 약혼자가 있는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뼈와 살을 가지고. 그러나 그는 여기에 또 하나의 신-혹은 신의 다른 모습-이 내려보낸 진정한 '사람의 아들'로써 아하스 페르츠를 등장시킨다. 이 소설은 아하스 페르츠의 신학적 방황과 궤를 같이 하는 70년대의 인물 민요섭과 그를 따르는 조동팔이 바깥 이야기로 등장한다. 


소설은 살해당한 민요섭의 행적을 쫓는 남경사의 눈으로 진행된다. 일종의 액자 소설로써, 민요섭이 남긴 아하스 페르츠의 일대기가 담긴 노트의 내용이 중간중간 발췌된다. 소설은 우리 종교의 가장 절실한 문제인 '지상의 구원'과 '천상의 구원'을 논하고 있다. 당장 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병과 고통에 신음하며, 이유 없는 죄과를 치르는 이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천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 뿐이다. 어린 시절, 남다른 기지와 총명함을 가진 아하스는 메시아임을 자처하는 광인을 만나 첫 번째로 이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째서 저 숱한 인간들을 고통과 신음속에 버려두는 것일까. 어째서 신을 저버리는 반역자는 생기고, 신을 애타게 불러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카인이나 유다의 배반, 저 소돔과 고모라의 독신, 신을 부정하고 현실의 삶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신은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말한다. 선한 의도를 심어두었으나, 결국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해선 인간에게 선택하게 하였다는 것, 그러나 왜 신은 그러한 결과를 알면서도-죄를 지을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리 자유의지가 있다하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미 그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들을 방치해두는가.


저 육신의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에게 선처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 고작 '고마우신 하나님'의 자비인지. 하나님은 행복한 사람들의 자기애적인 눈물겨운 찬양 속에서만 존재하시는 분인가. 빛 가운데서, 빛에 둘러싼 자들에 찬양을 받는 그 분은 우리 모두의 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처럼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한 때 내가 믿었던 신에 대한 의문들도 이 소설의 의문들에 많이 섞이게 되었다. 만일 신이 인류를 사랑하신다면, 고통받는 인류는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천국의 구원이 아닌, 여기 현실의 구원을. 만일 신께서 죄악을 만드셨다면, 그 죄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만약 죄악이 신의 뜻이 아니라, 어떤 다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신은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죄를 범하는 인간들에 대한 신의 딜레마이다.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해 충격적인 질문을 '신'에게 던진 것이다.


사막에서 예수를 유혹했다는 악마는 실은 진정한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였다는 말. 예수를 배반했다는 유다는 실은 진정한 눈뜸을 실행한 자라는 이야기. 아하스는 사막에서 예수에게 민중이 바라는 것은 육신을 달래줄 빵과 편안함이며, 당신은 그들을 교란시키고 세상의 제일 큰 독재자, 질투심 많은 신, 야훼의 명령을 전하는 자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신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는 것. 민요섭과 조동팔이 만든 신에 대한 '쿠아란타리아서'에서는 놀라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선과 지혜라는 두가지 면을 가진 신. 우리는 선 없는 지혜를 악이라 불렀고, 지혜없는 선을 선이라 부른 것이다.


그 두 가지 실체의 결합, 이들이 만든 새로운 성서인 '쿠아란타리아서'는 그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신 또한 한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을 제외하곤, 인간처럼 다양한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로마 신화적인 말. 사실 신의 분노와 질투는 성경 곳곳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 사람에게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지 환락이 꿈꾸고 있는 천국의 세계가 아니다. 그 천국에 대한 기대로 신의 시험을 통과한 욥의 신앙은 경건하기 보다는 음흉하다. 신은 인간의 절대적 숭배를 바라면서, 어째서 그 가난하고 비루한 인간들을 따스이 거두어주지 못하시는 것인지. 그 천국의 기대가 아무리 벅차고 황홀한 것이라고 해도, 육신의 괴로움으로 죽어가는 자에게 과연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끝까지 주장할 수 있을런지. 이 한 생이 지나 행복한 삶 가운데 신을 믿은 자들과 고생고생하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자들이 같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진정으로 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소설이 신에 관한 목마른 의문을 완전히 해갈시킨 것은 아니다. 또한 꽤 오래전에 쓰여진 작품이긴 하지만, 문체가 메마르고 남경사가 등장하는 한국에서의 이야기 진행이 너무 상투적이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조동팔은 자신들의 신의 경전을 만들려다 다시 '우리 주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간 민요섭을 살해했다는 것이 뒤늦게 발견된다. 결국 신에게로 돌아간 주인공의 모습은 씁쓸함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새로운 신에 대한 설명도 너무 적었고, 미흡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전체성에 대해 어떻게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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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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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구 위에 수십억 명의 인구가 바글거린다 해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공간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 존재할 뿐이다. 더구나 특별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면, 새로운 만남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 차단된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 깊고 절실하게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물론 사랑을 담는 마음의 자리가 너무 넓어 동시에 여러 명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소중한 것은 그가 내게 유일무이하며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고, 그와 만들어나가는 관계의 자장이 내 삶을 좌우하기 때문이 아닌가.


에쿠니 가오리의 『울 준비는 되어 있다』는 그러한 관계에 관한 여러 편의 체험기 같은 소설들이 모여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식물이나 동물, 하다못해 공기와도 관계를 맺는다. 온 세계가 바로 관계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관계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파장을 지니고 있는가. 사랑은 일상을 변화시키지만 또 정체시키기도 한다. 사랑은 일상을 황홀한 리듬으로 연주하지만, 연주가 끝난 다음에는 막막한 침묵이 남는다. 리듬이 없는 일상을 견디는 것은 오로지 남은 두 사람의 몫이다. 만약 한 사람의 몫으로만 남는다면 사랑이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에쿠니 소설의 인물들은 관계 속에서 언제나 결핍을 체험한다.「생쥐마누라」의 미요코는 남편에게 충실하지만,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함으로써 일상의 건조함을 견딘다. 백화점에서 독한 술을 혼자 마시면서 결코 누구도 자신을 고독한 사람으로 보길 원하지 않는 미요코는 오히려 더 외로워 보인다.「울 준비는 되어 있다」의 아야노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고, 합의 하에 헤어지고, 합의 없이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식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결국 심장의 일부가 죽었다고 느낀다. ‘빛나는 사랑을 했지만 그뿐’이라고 읊조리는 「손」의 레이코처럼, 사랑은 손가락에서 반지가 빠지듯 삶 속에서 힘없이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오기를 부리며 사랑하는 남자의 포옹을 거부하는 것은 그가 결국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 속에서 사랑은 이미 박제된 동물처럼 싸늘하고 미동 없는 무생물에 불과하다. 몽상적 여행가가 ‘그 어느 곳도 아닌 장소’를 꿈꾸듯이 사랑에 목마른 그들은 ‘그 어느 곳에도 없는 사람’을 꿈꾼다. 그것은 반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을 절실히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관계가 지속될수록 사랑하는 상대는 모호하고 퉁명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전진, 또는 전진이라 여겨지는 것」에서 ‘당신을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왜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라고 반문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라. 뭐든지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남편은 고양이를 버리는 낯선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남편에게도 아내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은가. 누군가를 잘 안다고 여기는 순간, 그는 이미 알 수 없는 심연 너머에서 물끄러미 이 편을 바라본다. 그러나 인간이 완전 소통을 하는 개미처럼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관계는 끔찍한 올가미가 되어버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알고 싶다는 욕망과 알 수 없다는 절망이 어쩌면 사랑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적 같은 사랑이 잠잠해진 뒤에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관계가 남는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아, 라는 자조는 곧 자기 자신을 상투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인생은 연애의 적이다’라는 치카의 말에 동의하는 건 관계가 결국 일상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와 직면해야만 하는 삶의 변화무쌍함 속에서 관계는 변하지 않는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 한편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단지 관성으로 지속되지 않기 위해서 관계는 또 변화해야 한다. 정체와 변화라는 딜레마 속에서 수많은 연인들은 피로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관계를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는 것만이 사랑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창조적인 삶은 늘 현재에 존재하며, 변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다. 사랑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 삶에 부대끼고 지친 한 사람에게 하루의 피로를 달래며 쉴 수 있는 어깨를 빌려주는 용기가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은가. 그것이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에쿠니의 주인공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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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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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매혹적이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향기같은 묘한 몽롱함을 주었다. 문장들은 각각 아름다웠고, 눈물겨웠다. 보석 같은 이야기였다. 작가의 독특한 ‘거리 두기’는 냉정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시선으로 삶을 관찰하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프랑스나 배트남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국의 나라 같다. 대상에 대해 지니고 있는 우리의 이미지란 얼마나 빈곤한 것인가.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는, 무궁무진한 것이 아닌가.


어린 배트남 황제 칸은 루이 16세에게 배트남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왕은 칸을 도울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칸을 어여삐 여기던 피에르 주교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두 척의 배를 준비했다. 선교사, 수녀, 무장한 군인들이 배트남을 향해 떠났다. 불행은 머지 않아 얼굴을 드러냈다. 낯선 기후와 쥐, 괴혈병, 콜레라 등이 그들을 위협했다. 피에르 주교는 배가 배트남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선원들, 수도사들이 하나씩 죽어 갔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잊혀지기 시작했다. 배트남에 도착한 이들은 두 세력으로 갈라졌다. 성직자들은 전쟁이 싫어 평화로운 마을에 남길 원했고 선장은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사이공으로 떠났다. 선장과 부하들은 곧 죽었다. 배트남 마을에 살게 된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생활 습관을 조금씩 버렸다. 수녀 한 명이 또 죽었다. 다시 황제가 된 칸의 아버지는 바딘에 와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아들이 죽은 보복을 했다. 며칠 전 떠난 세 사람의 성직자 외에는 남김없이 학살당했다. 한 명의 수녀 역시 죽고, 모두에게서 잊혀진 두 명의 성직자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6년 후, 둘은 병에 걸려 죽었다.


줄거리는 간략하다. 한 줄로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원정대가 배트남에 가서 학살당하거나 병에 걸려 모두 죽었다, 라고. 그러나 그 과정은, 낯선 문명 속에서 삶의 원초적인 모습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초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화가 거의 없고 감정이나 판단 표현이 절제되어 있기에 오히려 이야기의 진정성은 살아난다. 사랑하는 이들, 동행한 이들의 죽음에 슬퍼할 틈도 없다. 자연은 이들에게 아낌없이 삶에 충실할 것을, 대지에 충실할 것을 명령한다. 소박하고 행복한 배트남 사람들처럼 그들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카트린느 수녀가 글쓰기를 그만둔 것과 기도하기를 멈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명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들을 잡으러 온 무장한 군인들은, 성스러운 성직자가 아니라 섹스 후에 태연하게 잠들어 있는 두 육체를 보았다. 그들은 이미 프랑스인도, 성직자도, 타국인도 아니었다. 후회없이, 조바심없이 살아가는 자연인이었다. 군인들은 감동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삶은 간략하고 단순해졌다. 그들은 온전히 그들 자신으로 살 수 있었기에 더없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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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택시 - 프랑스 현대문학선 25 프랑스 현대문학선 25
레몽 장 지음, 이인철 옮김 / 세계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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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여주인>을 읽고 그 가벼운 유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던져뒀었는데, 이 책은 읽을 만하다. 통통 튀는 아이디어와 재기 있는 말솜씨가 단편에서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히 <벨라 B.의 환상>은 정말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다. 벨라라는 한 여자의 강박관념도 그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소동도 감칠맛 있었다. 특히 마지막의 반전은, 소설에서 반전이 보여주는 힘을 여실히 드러냈다.


<미라 또는 공원>도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권위적이고 정신병적이기까지 한 경찰서장은 한 공원에서 사기극을 벌인다. 경찰이 건달 변장을 하고, 한 여자에게 접근해서 폭행의 시도를 가한다. 그때 그 주위에 있던 남자 두 명과 아이 엄마, 부부는 그 일에 방관했다는 죄로 경찰서에 연행되어 간다. 경찰서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가 그 여자를 구할 수 없었던 ‘합리적인’ 이유를 대었고, 그 이유를 대지 못한 ‘나’는 억울하게 서장의 취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오페라택시>도 설정이 재미있다. 우연히 같은 택시에 동시에 올라탄 것이 계기가 되어 결혼하게 된 남녀가, 매번 결혼기념일마다 택시를 동시에 타는 연극을 벌인다. 그러다 어느 날 차를 도둑맞는다. 그리고 며칠 뒤에 차가 고스란히 돌아왔는데, 도둑이 차를 빌려서 미안하다면서 공연 티켓을 차에 꽂아 둔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에 다녀오니, 침대를 제외하고 집이 몽땅 털려 있었다. 참으로 지능적인 수법인데, 이걸 따라하면 성공률이 높을 것 같다는 생각도.


<P.K. 35km지점>은 두 명의 미인 히치하이커를 차에 태웠다가 강도를 당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겨우 도망쳐서 인근의 경찰서를 찾았는데, ‘근육질의 우람한’ 여자 경찰관이 자기의 이야기를 믿어주지도 않으면서 비웃으며 듣고 있는 걸을 보며, 결국 그 곳에서도 도망쳐 나온다는 이야기다.


<치마>도 뛰어난 단편이다.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사창가에 가서 아내더러 ‘10분만 기다리라’고 하며 창녀와 함께 건물로 들어가버린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 당황하던 그녀를, 한 멋진 남자가 자기 차에 태워 호텔로 데려간다. 일생 처음으로 그녀는 놀라운 섹스를 하고, 오르가즘을 느낀다. 그리고 남자가 권하는 차를 마신다. 호텔에 나와 길을 걷다 남편을 만난다. 남편은 ‘자기가 잠시 돌았다’고 말하면서 그녀에게 사죄한다. 정신분열적인 남편인 것이다. 추잡한 짓을 했다며 용서해달라면서 남편은, ‘ 차 시킬까?’라고 묻는다. 그녀는 이제까지 차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좀전에 호텔에서 마신 것을 제외하고는. 남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벌써 한 잔 마셨어요’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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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이혼
사토 겐이치 지음, 이정환 옮김 / 열림원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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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나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흥미로워해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다른 시간과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두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현재’를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현재’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세계에 대한 선험적인 지식이 나와 다르기에,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의 ‘과거’가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흥미는 ‘시험’을 거치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솔직히 지금도 누군가가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보라고 하면, 나는 제대로 할 수 없다. 물론 세계사 선생도 아닌데, 세세한 목록 나열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 머릿속에 체계적인 영상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다만 연표와 개별적 사건의 나열에 불과한 것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세계사나 국사 시험에 100점을 맞아도, 역사는 설명할 줄 모른다. 연표나 사건, 조약 이름, 사람 이름 따위는 시험을 보고 나면 그냥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때로 누군가는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이 책은 대부분의 역사책에 한 두줄로 간략하게 기술되고 말았을 ‘팩트’를 박진감 있는 ‘픽션’으로 엮어내고 있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일본어를 쓰는 일본 사람이라는 점이다. 외국의 역사를 다룬다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걸 얼마나 실제처럼 그려내는가에 승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거의 손색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역사를 꼼꼼하게 연구한 작가의 노력이 빚어낸 성과인 것이다. 큰 반전은 없지만 소설을 읽어볼 생각이라면, 줄거리는 모르는 편이 좋다.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조건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통속소설 같은 분명한 선악 구분도 크게 문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는 재미있다. 거기다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라는 설정이 흥미로움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것이 실제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긴박한 재판과정을 전개함으로써 독자에게 단숨에 읽기를 요구한다. 장정일이 말했던가. 단숨에 쓴 책은 단숨에 읽히게 되어 있다고. 손을 놓게 만드는 책에는 그만큼 열정이 빠져 있다고. 물론 아무리 재미있는 책을 만나 밤을 새고 싶어도 생업은 그런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노는 날’은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읽힌다’는 점만이 소설의 장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보다 많은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에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읽힌다’는 관점은 사실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범상치 않은 주인공 프랑수와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스무 살 무렵, 사랑하는 여자 벨린다와의 결혼과 수도사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첫장에 등장한다. 그리고 나서 다음 장에 마흔 일곱이 된 그가 등장한다. 그는 수도사 대신 변호사가 되어 있다. 물론 중세유럽의 법정이라는 것도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쫓겨난 영웅’이다. 그를 쫓아낸 것은 당시 국왕 루이 11세. 청춘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프랑수와는, 루이 11세의 딸이자 현재 루이 12세의 왕비인 잔 드 프랑스의 재판을 구경하러 먼 곳에서 왔다. 그는 폭군의 딸이 단죄받는 것을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그는, 옛 연인 벨린다의 동생인 오엔과 왕비의 합작에 의해 왕비의 변호를 맡게 된다. 일방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있던, 절름발이에 추녀인 이 왕비는 프랑수와에게 있어 ‘원수의 딸’이었지만, 그는 곧 폭군과 그녀를 연관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강하고 당당한 사람인데, 부당하게 모욕받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수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잃어버린 청춘’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재판에 가담한다. 그리고 법정은 프랑수와의 멋진 변론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다. 대중은 프랑수와와 왕비의 편이 되어, 최고 권력자인 루이 12세를 비웃는다. 


프랑수와의 성공담은 계속 이어진다. 프랑수와에 의해 국왕과 교황청은 궁지에 몰린다. 명민한 천재형인 그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실패까지도 계산하는 것이 진정한 영웅의 면모이니까. 재판은 그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다. 그러나 후에 밝혀지는 대로, 그는 ‘반쪽 영웅’이며, ‘고뇌하는 영웅’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싸구려 통속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된다. 비현실적인 천재가 아니라 개연성을 갖춘 불운한 천재의 성공담이 된다. 물론 프랑수와의 위기는 당연히 찾아온다. 주인공을 궁지에 빠뜨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자에게 계속해서 다음 장을 펼쳐보게 만드는 힘이 아닌가. 


그런데 가장 중요한 화두인 것처럼 여겨진 승소는,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어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된다. 천재는 결국 ‘인간적인 대안’을 선택한다. 재판을 하는 내내 그는 승소가 가져올 의미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것은 그의 삶과 사랑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실수로 인생을 포기하게 된 벨린다나 지극히 모자라보이는 왕과의 이혼을 한사코 거절하는 잔 드 프랑스를 이해하고, 또 다시 사랑하게 된다. 그렇기에 재판이란 건 사실 프랑수와가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만들고, 잔 드 프랑스라는 편견의 대상과 진정한 인간애를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중세 유럽의 법정이 생생했던 이유는, 어쩌면 재판과정이나 등장인물이 지극히 현대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상대적인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속의 영웅들도 일상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책 속에서 박제되어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읽어내는 것은 재미있는 시도다. 프랑수와를 둘러싼 인물들도 제각기 색깔 있는 조연 역할을 다 해내고 있다. 흥미진진한 읽을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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