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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이혼
사토 겐이치 지음, 이정환 옮김 / 열림원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국사나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흥미로워해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다른 시간과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두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현재’를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현재’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세계에 대한 선험적인 지식이 나와 다르기에,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의 ‘과거’가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흥미는 ‘시험’을 거치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솔직히 지금도 누군가가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보라고 하면, 나는 제대로 할 수 없다. 물론 세계사 선생도 아닌데, 세세한 목록 나열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 머릿속에 체계적인 영상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다만 연표와 개별적 사건의 나열에 불과한 것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세계사나 국사 시험에 100점을 맞아도, 역사는 설명할 줄 모른다. 연표나 사건, 조약 이름, 사람 이름 따위는 시험을 보고 나면 그냥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때로 누군가는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이 책은 대부분의 역사책에 한 두줄로 간략하게 기술되고 말았을 ‘팩트’를 박진감 있는 ‘픽션’으로 엮어내고 있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일본어를 쓰는 일본 사람이라는 점이다. 외국의 역사를 다룬다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걸 얼마나 실제처럼 그려내는가에 승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거의 손색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역사를 꼼꼼하게 연구한 작가의 노력이 빚어낸 성과인 것이다. 큰 반전은 없지만 소설을 읽어볼 생각이라면, 줄거리는 모르는 편이 좋다.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조건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통속소설 같은 분명한 선악 구분도 크게 문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는 재미있다. 거기다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라는 설정이 흥미로움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것이 실제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긴박한 재판과정을 전개함으로써 독자에게 단숨에 읽기를 요구한다. 장정일이 말했던가. 단숨에 쓴 책은 단숨에 읽히게 되어 있다고. 손을 놓게 만드는 책에는 그만큼 열정이 빠져 있다고. 물론 아무리 재미있는 책을 만나 밤을 새고 싶어도 생업은 그런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노는 날’은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읽힌다’는 점만이 소설의 장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보다 많은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에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읽힌다’는 관점은 사실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범상치 않은 주인공 프랑수와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스무 살 무렵, 사랑하는 여자 벨린다와의 결혼과 수도사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첫장에 등장한다. 그리고 나서 다음 장에 마흔 일곱이 된 그가 등장한다. 그는 수도사 대신 변호사가 되어 있다. 물론 중세유럽의 법정이라는 것도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쫓겨난 영웅’이다. 그를 쫓아낸 것은 당시 국왕 루이 11세. 청춘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프랑수와는, 루이 11세의 딸이자 현재 루이 12세의 왕비인 잔 드 프랑스의 재판을 구경하러 먼 곳에서 왔다. 그는 폭군의 딸이 단죄받는 것을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그는, 옛 연인 벨린다의 동생인 오엔과 왕비의 합작에 의해 왕비의 변호를 맡게 된다. 일방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있던, 절름발이에 추녀인 이 왕비는 프랑수와에게 있어 ‘원수의 딸’이었지만, 그는 곧 폭군과 그녀를 연관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강하고 당당한 사람인데, 부당하게 모욕받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수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잃어버린 청춘’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재판에 가담한다. 그리고 법정은 프랑수와의 멋진 변론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다. 대중은 프랑수와와 왕비의 편이 되어, 최고 권력자인 루이 12세를 비웃는다.
프랑수와의 성공담은 계속 이어진다. 프랑수와에 의해 국왕과 교황청은 궁지에 몰린다. 명민한 천재형인 그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실패까지도 계산하는 것이 진정한 영웅의 면모이니까. 재판은 그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다. 그러나 후에 밝혀지는 대로, 그는 ‘반쪽 영웅’이며, ‘고뇌하는 영웅’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싸구려 통속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된다. 비현실적인 천재가 아니라 개연성을 갖춘 불운한 천재의 성공담이 된다. 물론 프랑수와의 위기는 당연히 찾아온다. 주인공을 궁지에 빠뜨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자에게 계속해서 다음 장을 펼쳐보게 만드는 힘이 아닌가.
그런데 가장 중요한 화두인 것처럼 여겨진 승소는,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어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된다. 천재는 결국 ‘인간적인 대안’을 선택한다. 재판을 하는 내내 그는 승소가 가져올 의미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것은 그의 삶과 사랑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실수로 인생을 포기하게 된 벨린다나 지극히 모자라보이는 왕과의 이혼을 한사코 거절하는 잔 드 프랑스를 이해하고, 또 다시 사랑하게 된다. 그렇기에 재판이란 건 사실 프랑수와가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만들고, 잔 드 프랑스라는 편견의 대상과 진정한 인간애를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중세 유럽의 법정이 생생했던 이유는, 어쩌면 재판과정이나 등장인물이 지극히 현대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상대적인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속의 영웅들도 일상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책 속에서 박제되어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읽어내는 것은 재미있는 시도다. 프랑수와를 둘러싼 인물들도 제각기 색깔 있는 조연 역할을 다 해내고 있다. 흥미진진한 읽을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