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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의 아들은 종교의 문제를 다루면서 '구원'이나 '행복'의 문제를 뿌리깊이 파헤치고 있다. 제목에서 시사하는 것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아들'-혹은 '신의 아들'이란 예수이다. 예수는 약혼자가 있는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뼈와 살을 가지고. 그러나 그는 여기에 또 하나의 신-혹은 신의 다른 모습-이 내려보낸 진정한 '사람의 아들'로써 아하스 페르츠를 등장시킨다. 이 소설은 아하스 페르츠의 신학적 방황과 궤를 같이 하는 70년대의 인물 민요섭과 그를 따르는 조동팔이 바깥 이야기로 등장한다.
소설은 살해당한 민요섭의 행적을 쫓는 남경사의 눈으로 진행된다. 일종의 액자 소설로써, 민요섭이 남긴 아하스 페르츠의 일대기가 담긴 노트의 내용이 중간중간 발췌된다. 소설은 우리 종교의 가장 절실한 문제인 '지상의 구원'과 '천상의 구원'을 논하고 있다. 당장 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병과 고통에 신음하며, 이유 없는 죄과를 치르는 이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천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 뿐이다. 어린 시절, 남다른 기지와 총명함을 가진 아하스는 메시아임을 자처하는 광인을 만나 첫 번째로 이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째서 저 숱한 인간들을 고통과 신음속에 버려두는 것일까. 어째서 신을 저버리는 반역자는 생기고, 신을 애타게 불러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카인이나 유다의 배반, 저 소돔과 고모라의 독신, 신을 부정하고 현실의 삶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신은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말한다. 선한 의도를 심어두었으나, 결국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해선 인간에게 선택하게 하였다는 것, 그러나 왜 신은 그러한 결과를 알면서도-죄를 지을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리 자유의지가 있다하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미 그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들을 방치해두는가.
저 육신의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에게 선처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 고작 '고마우신 하나님'의 자비인지. 하나님은 행복한 사람들의 자기애적인 눈물겨운 찬양 속에서만 존재하시는 분인가. 빛 가운데서, 빛에 둘러싼 자들에 찬양을 받는 그 분은 우리 모두의 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처럼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한 때 내가 믿었던 신에 대한 의문들도 이 소설의 의문들에 많이 섞이게 되었다. 만일 신이 인류를 사랑하신다면, 고통받는 인류는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천국의 구원이 아닌, 여기 현실의 구원을. 만일 신께서 죄악을 만드셨다면, 그 죄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만약 죄악이 신의 뜻이 아니라, 어떤 다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신은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죄를 범하는 인간들에 대한 신의 딜레마이다.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해 충격적인 질문을 '신'에게 던진 것이다.
사막에서 예수를 유혹했다는 악마는 실은 진정한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였다는 말. 예수를 배반했다는 유다는 실은 진정한 눈뜸을 실행한 자라는 이야기. 아하스는 사막에서 예수에게 민중이 바라는 것은 육신을 달래줄 빵과 편안함이며, 당신은 그들을 교란시키고 세상의 제일 큰 독재자, 질투심 많은 신, 야훼의 명령을 전하는 자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신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는 것. 민요섭과 조동팔이 만든 신에 대한 '쿠아란타리아서'에서는 놀라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선과 지혜라는 두가지 면을 가진 신. 우리는 선 없는 지혜를 악이라 불렀고, 지혜없는 선을 선이라 부른 것이다.
그 두 가지 실체의 결합, 이들이 만든 새로운 성서인 '쿠아란타리아서'는 그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신 또한 한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을 제외하곤, 인간처럼 다양한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로마 신화적인 말. 사실 신의 분노와 질투는 성경 곳곳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 사람에게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지 환락이 꿈꾸고 있는 천국의 세계가 아니다. 그 천국에 대한 기대로 신의 시험을 통과한 욥의 신앙은 경건하기 보다는 음흉하다. 신은 인간의 절대적 숭배를 바라면서, 어째서 그 가난하고 비루한 인간들을 따스이 거두어주지 못하시는 것인지. 그 천국의 기대가 아무리 벅차고 황홀한 것이라고 해도, 육신의 괴로움으로 죽어가는 자에게 과연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끝까지 주장할 수 있을런지. 이 한 생이 지나 행복한 삶 가운데 신을 믿은 자들과 고생고생하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자들이 같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진정으로 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소설이 신에 관한 목마른 의문을 완전히 해갈시킨 것은 아니다. 또한 꽤 오래전에 쓰여진 작품이긴 하지만, 문체가 메마르고 남경사가 등장하는 한국에서의 이야기 진행이 너무 상투적이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조동팔은 자신들의 신의 경전을 만들려다 다시 '우리 주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간 민요섭을 살해했다는 것이 뒤늦게 발견된다. 결국 신에게로 돌아간 주인공의 모습은 씁쓸함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새로운 신에 대한 설명도 너무 적었고, 미흡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전체성에 대해 어떻게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