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작품이고 무엇이 작품이 아닌가. 어제의 화두이다. 친구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눈 이야기였는데, 스티븐 킹의 소설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이 그 대상이었다. 나는 스티븐 킹의 소설이라면 <스탠 바이 미>밖에 읽지 않았으므로 적극적으로 동의를 하기는 어려웠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이라는 그 느낌만은 알고 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이 원작인 드라마들을 워낙 재미있게 봐 왔으니. 드라마로 말하더라도 스티븐 킹의 이야기는 완벽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에 따른 흡입력이 내가 생각하는 스티븐 킹의 이미지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히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는데, 사실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심지어 그 유명한 소설 제목인 <빅 픽처>도 생각나지 않아서, 검색해서 알려줄게 친구야. 했던 더글러스 케네디.
오늘 검색하려고 알라딘 검색창에 써넣은 이름은 마이클 더글러스이다. 몇 번 헛발질을 하다가 어쨌든 더글러스 케네디라는 이름을 찾았고, 한 여름 미쳐서 읽었던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들을 검색해보았다. 기분에 너댓권 읽은 것 같은데 아마도 아래 세 권 정도인 듯.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었는데 일단 번역 된 작품수가 많았고 한결같이 너덜너덜 했으며 읽고 싶은 책은 늘 대출중이었던 기억.
<빅 픽처>, <위험한 관계>,<모멘트>
내가 친구에게 추천해준 책은 <위험한 관계>이다. 여자의 심리를 특히 산후 우울증을 앓는 부분을 어찌나 섬세히 잘 묘사했는지 더글러스가 출산의 경험이 있나 의심해봤을 정도였고 읽은지 몇 년 되었지만 정말 생생하게 기억나는 작품이다. 이번 기회에 더글러스 케네디의 이력을 조금 검색했더니, 참 이 사람 하루키 다음으로 부러운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성장하여 런던에서 살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가. 나오는 소설들 마다 속속 베스트셀러가 되고, 런던, 파리, 몰타에 집이 있어 세 군데를 오가며 산단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희곡이었고 자기 극단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세계 50여개국을 여행하며 여행기를 쓰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력의 소유자. 내가 가진 이미지 잘 나가는 미국인,은 맞지만 활동 근거지와 소설을 쓰는 마인드는 미국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겠다.
알라딘 판매량 순으로 검색하니 빅픽처- 모멘트- 픽업- 빅 퀘스천- 템테이션- 비트레이얼- 더잡 -위험한 관계- 스테이트 오브 유니언- 파리 5구의 여인= 파이브데이즈- 행복의 추구- 리빙 더 월드 순이다. 일단 14권이 번역된 걸로.
무엇이 작품이고 무엇이 작품이 아닌가를 이야기하며 더글러스 케네디를 떠올린 것은 스티븐 킹과 같은 맥락에서 작품이 아니다 (라고 하기엔 좀 미안한 감이) 쪽에 비중을 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예술성을 추구했다기 보다 재미를 추구했다는 이유이다. 그러면 예술성은 무엇이고 재미는 무엇인가. 예술성을 기반한 재미는 있을 수 없는가, 과연 스티븐 킹이나 더글러스 케네디가 예술성이 없는 재미만을 추구했는가 하는 것은 몇 작품을 더 읽고 따져 볼 일이다. 어쨌든 공장에서 매뉴얼에 맞춰 대량 생산 되긴 하였지만, 집에서 공들여 만든 수제과자보다 맛있다면 고객은 맛있는 쪽에 손이 더 가게 마련이다. 유쾌하고 속시원한 독서경험이 보장된 더글러스 케네디의 작품을 일단 더 읽어 보는 걸로. 가장 최근에 나온 픽업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10월 6일
내려야 할 시간이 되어 친구와 이야기를 길게 나누진 못했는데, 결국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은 스티븐 킹이나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과는 다른 류라는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긴데, 다니자키 준이치의 <미친 사랑>은 한 남자의 자기 아내와의 사랑에 대한 고백체 소설이다. 잘 짜여진 구조 안에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돋보이는 킹류의 소설들에 비하면 지리멸렬에 지지부진한 찌질함이 있지만 다 읽고 나면 아, 참 멋있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감상한 느낌. 좋은 작품은 감동을 준다. 라는 말에 대입을 해보면 사실 <미친 사랑>을 읽고 감동을 받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건 작품이다에 한 표를 던질 수 있는 것은 한 시대의 인간과 사회적 정경을 잘 담았고, 그것이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읽는 우리들에게도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억지 이야기 같은데 어쩐지 이해가 되는...잘 만들어진 것과 그 자체로 존재했던 것 같은 인공미와 자연미의 차이를 느꼈다면 킹의 소설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비교가 될 수 있을까.
더글러스 케네디의 유일한 단편집인 ,<픽업>의 단편들도 몇 편 읽었는데 장편 만큼 그렇게 재밌지 않았다. 소설가가 아닌 기술자가 쓰는 느낌. 그런데 왜 프랑스 독자들은 그에게 열광을 하는 것일까. 궁금한 대목이다.
10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