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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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by 김훈


나는 김훈의 그 거칠고 투박하지만 섬세하고 장맛처럼 깊은 문체를 좋아한다. 그는 그의 산문집에서 늘 당신의 말과 어휘가 부족하여 머릿 속 그 생각들을 글로 옮기기에 부족하다며 스스로의 한계를 통탄하지만, 나는 늘 그의 모든 것을 꿰뚫는 시선과 생각들에 감탄하고, 그들을 글로써 옮길 수 있는 그 능력에 감탄한다. 무의식 중에 흘러가던 생각들을 잠시 시간을 멈추어 놓고 천천히 곱씹었을 때, 차분히 정리를 해보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을까.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의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된장이나 간장, 무짠지, 오이지, 고추장아찌는 맛의 심층구를 갖는다. 시간이 그것들의 맛의 심층을 빚어낸다. 기다림 없이는 짠지다운 짠지를 맛볼 수 없다. 김장이나 오이지를 담그고 나서 우리는 설레는 환상을 참으며 그것들의 숙성을 기다려야 한다. 미리 뚜껑을 열고 들쑤시면 동티가 나서 다 망친다. 시간이 간을 재료의 안쪽으로 밀어넣고 재료의 성질을 변화시켜 맛의 심층을 이룬다. 그 맛은 거기에 절여진 시간의 맛이다.’

‘그것은 경험되지 않은 순수한 시간이었다. 바다는 수억만 년의 시간을 뒤채이면서, 이제 막 창조된 시원의 순간처럼 싱싱했고, 날마다 새로운 빛과 파도와 시간과 노을이 가득차서 넘쳐흘렀다. 바다는 시간을 통과해 나가지만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았다. 바다는 늘 처음보는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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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조종하는 고양이
사이조 나카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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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조종하는 고양이]

by 사이조 나카


마음 편하게 술술 읽을 수 있는, 소소한 이지리드 타입의 일본 소설. 고양이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일하는 ‘괴뢰사’ 고양이와, 그 괴뢰사 고양이가 부리는 한 명의 지정된 ‘괴뢰’라는 컨셉이 신선하고 귀엽다. 그들이 한 팀으로 해결해내는 사건들은 큰 반전 없이, 지나치게 뒤틀리거나 질질 끄는 전개 없이 간단하고 간결하게 진행된다. 이동하는 길, 지하철 안에서 많은 생각없이 가볍게 미소지으며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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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한정판)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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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By Alice Munro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의 평화로운 시골 마을 풍경을 말로 그려낸다. 지나치게 많은 묘사 없이도 담담하고 차분하게, 우리의 발 길이 닿지 않은 다소 폐쇄적이고 낯선 어떤 조용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우리의 가슴속에 파도를 일으킨다. 시대적 배경에 따라 변하는, 혹은 시간의 흐름에 무색하게도 저변에 깔린 그 깊은 관념들이 유지되는 작은 마을 사람들, 도시의 누구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줄 것 같지않은 그들의 생각들을 작고 큰 사건들과 엮어 시처럼 우리에게 들려준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다소 자조적인 소설과 일기 사이의 중간 즈음에 위치하는 글들이 몇 편 소개되는데, 신기하면서 당연하게도 그 글 안 안에서 앨리스 먼로라는 작가를 형성하는 몇 가지 경험과 요소, 개념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앞 서 나오는 단편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큰 종양을 제거하며 약간은 우쭐했던 일, 자신이 원한다면 저지를 수 있는, 하지만 저지르지 않는 일들, 조용한 타운에 살며 겪는 도시 외적인 요소들. 그녀의 삶 속 경험들은 그녀의 단편들에 속속들이 잘 배여 카푸치노 위 시나몬처럼,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 조용히 자기만의 깊은 향을 내고 있었다.

“집을 비추던 한낮의 햇빛이 사라지기까지, 늦은 시간까지 켜져 있던 전등빛이 사라지기까지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무언가를 다 하고, 끝내고, 마무리를 할 때 들리는 일상적인 소음이 사라지고 나면 집은 낯선 장소가 되어갔다.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잠잠히 가라앉고,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것들의 쓰임새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가구들도 모두 그 자체의 세계로 물러났다. 더는 누군가의 관심을 받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해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자유, 낯선 느낌. 처음에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고 결국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자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그때 내가 바라던 것은 이미 잠이 아니었다. 나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가 나를 붙잡고 있었고, 그것을 물리치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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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살인 2
베르나르 미니에 지음, 윤진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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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살인] by Bernard Minier
결국 이 흡입력 강한 책을 떼어내지 못해 밤을 깔끔하게 새버렸다. 나는 추리소설은 적재적소에, 궁금증과 혼란을 유발할 정도로만 단서를 주고는 그 순서나 배열을 마구 섞되, 흥미가 떨어질만큼 혼란을 주지는 않으면서 점차 그것을 풀어나가는 것이 핵심이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말이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그것이 과감하게 전시되게 함으로써 시작하는데, 그 기괴한 느낌을 끝까지 잘 살리면서 스토리를 매듭지었다. 밤을 샜으니 내일 출근은 어떡하나 싶은 와중에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은 왠갖 끔찍한 사건들로 뒤덮여 잠을 청하기도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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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탐정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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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by P.D.James.

이 책은 이미 작가의 말을 읽을 때부터 나를 매혹시켰다. “범죄소설 작가는 유쾌하지 못한 재주 탓에 작품마다 적어도 한 명은 욕을 얻어먹어도 싼 인물을 창조할 의무가 있으며, 이따금 착한 사람의 공간을 침범한 피비린내 나는 범죄행각을 불가피하게 그려야 할 때도 있다.” 작가의 이런 솔직하고 위트있는 태도와, 번역가의 굉장히 적절한 단어와 미묘한 디테일을 잡아내는 어체에서 난 이미 넘어가 버렸다. (정말이지, 유능한 번역가는 그 소설의 맛을 죽여놓을 수도, 약간의 소금처럼 기적처럼 살려내기도 한다. AI가 실질적으로 번역가를 대체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조금 더 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1977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을, 상당히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물론 그러한 장치들은 휴대전화의 부재라던가, 상당히 번거로운 서류 확인과정 등에서 드러나기는 하지만, 상당히 현대적인 사고방식과 접근법이 그런 점들을 교묘하게 가려주어 2018년 말에 지금 읽고 있는 나에게도 시대적 괴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사실상 추리소설도 대게 다른 장르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는 그 흐름이 기본 틀 내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아무리 대단한 소설가가 쓴 명작이라 한들 결말이나 범인들이 보이고는 한다. 특히 필연적이리라 느껴질만큼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주로 살인) 인물의 사연과 이유에 그 사건을 조사하던 탐정 혹은 경찰이 연민을 느끼고 공감을 하게 되어, 그 사건을 없었던 일로 종결하는 이야기는 최근 내가 읽은 추리소설 5편 중 무려 3편에 달할 정도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잔혹한 범죄들과는 다른 특별한 하나의 “이야기”로써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전개되는 추리소설은 정말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다만 이 책의 다른 점은, 아직은 성적으로 평등하지 않던 그 시절에 젊고 경험이 부족한 여성에게 명철한 두뇌와 대담하다 싶을 정도의 용기를 불어넣어 색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 보게끔 했다는 점과, 그녀가 그녀의 재능만으로 결국은 경시청의 인정을 받는 점. 그리고 상당히 밀도높은 전개와 순서에 맞춰 촘촘히 엮은 인과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시대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현대적인 감각에 이러한 점들이 맞물려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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