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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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평화로움 이면에 존재하는 불안, 마음 깊은 곳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아름답게 그려낸 단편집이다. 속이 타들어 가고 내내 시달려도, 겉으로는 표출할 수 없는 그 죄책감과 고통을 세밀하게 묘사해낸다. 결국 그 실체를 직면해야 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진정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가. 실제로도 크고 작게 겪을 수 있는 우리의 감정 곡선을 글로 정확하게 찔러내는 느낌이다.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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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양장)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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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솔직히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어체든, 내용이든 조금 아마추어스럽다고 생각했다. 책이 끝날 때 즈음에는 펑펑 울고 말았다. 책이 짧은 덕에 앉은 자리에서 슥 읽을 수 있었는데, 편안하고 쉬이 읽히는 글 속에 우리가 서로 얼마나 노력을 해도 그 노력을 모를 수 있는지, 거기에서 오는 소통의 중요성과 애틋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 3시간 정도만에 완독을 할 수 있는 양이었는데, 한 2시간 40분즈음 티슈 두어장을 준비하는 것을 추천한다.

“세상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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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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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By 무라카미 하루키

한 작가의 작품들을 꾸준히 읽어오다 보면, 그 특유의 정서나 문체에 질리기 마련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은 희한하게도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법이 없다. 기본적으로 원어가 따로 있고, 번역이 된 책들은 아무래도 번역가의 영향이 크게 미칠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 번역가가 그 맛을 잘 못살리면 더 빨리 질려버리는 듯 하다) 하루키의 경우는 좀 특이한게 원어인 일본어에서도 특유의 번역투가 느껴진다고 하니 비교적 그런 류의 괴리감은 적은 편일 듯 하다. 나 자체도 약간 번역투를 쓰는데다, 자유롭고 종종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사고의 흐름 자체가 유독 편하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탓이다. 이 책은 묘한 틈새를 파고드는 맛이 있는데, 하루키는 에세이를 많이 쓰는 작가이다 보니, 본인이 일인칭 주인공인 이 소설에서는 그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완벽히 갈라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더더욱 묘한 매력과 약간의 흥미로운 판타지를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치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는가...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일을 이루어내고 나면,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크림 중의 크림, 그게 ‘크렘 드라 크렘’이야.알겠나?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이지.”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나는 실로 방대한, 거의 천문학적 횟수의 ‘지는 경기’를 지켜봐왔다. 다시 말해 ‘오늘도 또 졌네’라는 것이 세상의 이치로 여겨지도록 내 몸에 서서히 길들여갔다는 소리다. 잠수부가 오랫동안 주의깊게, 수압에 몸을 길들이듯이.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하는 데서 나온다.”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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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열 시 반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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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난 뒤 열기가 조금 가신 밤에 샴페인 한잔과 읽고싶은 책. 절제되고 기존 뒤라스와는 조금 다른 느낌.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에서는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내면을 표출하고 농밀함을 그려냈다면, 이 책에선 환경묘사와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표현이 많았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에서처럼 살인적인 더위와 강렬한 햇볕, 그로 인해 촉발되는 나른함과 피로, 권태, 그리고 술이 전체 플롯에 포진해있다. 그 요소들이 작고 큰 감정들을 끄집어낸다는 점이 비슷하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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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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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by 한강

요즘 책을 읽을 때 무의식중에 틀어 두는 음악을 껐다. 향을 하나 피우고, 창 밖에 나는 소리를 들으며 읽었다. 시를 읽는 듯한, 그런 먹먹함. 문장 하나 하나를 곱씹으며 천천히 음미하며 읽었다. 한강의 단어들은 명료한 가운데 내포된 힘이 있다. 간결하고, 묵직하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글을 그녀의 모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온전히 그대로 접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책들이 주는 이미지랄까, 책들이 나에게 강요하는 주변환경이 뚜렷한 경우들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메이브 빈치의 ‘그 겨울의 일주일’은 햇볕이 포근한 겨울 낮 즈음에 담요를 폭닥하게 뒤집어 쓰고 밀크티를 따듯하게 마시며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반면에 한강의 ‘흰’은 계절적 배경은 동일하게 겨울일 수 있겠으나 찬 공기가 오롯이 느껴지는 어두운, 혹은 동트는 새벽 즈음, 적막을 배경삼아 흰 입김을 조금씩 내뱉으며 읽어야 할 것 같다. 조금은 늦은 밤, 와인도 음악도 없이 천천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듯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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