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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오랜만에 깊이감과 경쾌함이 한데 섞여 있는 소설을 읽었다. 정세랑 작가는 여성, 상처, 민족, 역사라는 다양한 키워드를 내 앞에 하나씩 천천히 포석 놓듯, 아이를 가르칠 때처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부터 천천히 일러주듯 풀어 놓았다. 작가는 심시선이라는 캐릭터, 그리고 그녀의 복잡한 가족을 통해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에게 무겁지만 어둡지 않게 전해주었다. 작가는 격동의 시대, 여자의 희생이 당연시되던 세상에서 그들이 커리어를, 권리를, 자신을 지켜내고자 스스로를 박살내던 이야기, 나라던 개인이던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외면하며 책임을 회피하던 그 역사, 그리고 아직도 조금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이 상황들에 지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자체의 톤은 밝고 작가는 끝내 각 캐릭터들의 삶에서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 냈다. 그녀는 아마도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겪어도 결국은 무너지거나, 죽거나, 조금씩 극복하고, 나아가며 살아간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지 않았나, 생각한다.
사실 나는 80년대 이후 태어난 한국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지 않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알게모르게 어떤 편견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김훈이나 박완서, 박경리 선생님 같은 분들만이 ‘한국어’과 ‘한국적인 정서’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외 서적의 번역본들을 많이 읽어 번역투에 익숙해져 (역설적인 의미의) 위화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기회에 젊은 작가의 큰 가능성과 나의 오만함을 깨닫게 되어 감사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내 평생 글을 쓰는 사람들의 재능과 노력, 꾸준함에 존경을 보내며 언젠가는 꼭 나도 글을 쓰는 직업에 가 닿기를 바랐지만, 정세랑 작가의 플롯 안에 ‘의미’를 담는 그 힘이 나의 부족함을 더 깨닫게 해준 것 같다. 극중 난정처럼, 편한 마음으로 좋은 작품이든 별로인 작품이든 그 나름의 맛을 즐기는 독자로 남아야하겠다. 존재하는 사람들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길고 아름다운 대화가 소설이라고 믿는 작가. 문장 하나 하나가 내 마음을 파고들게 해 다음 작품도 기다리게 된 것 같다.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생 공격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공격성이 발현되든 말든 살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기분좋게 취했던 이가 돌변하기 직전의 순간을 알았고, 발을 밟힌 이가 미처 내뱉지 못한 욕설을 들었고, 겸손을 가장한 복수심을 감지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첫번째 남편도 두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사람들은 의외로 흠 없는 것만큼이나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시 이어붙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니까요.”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을지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