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은 인기인이 되는 대가로 본업과는 상관도 없는 사생활을 노출해야 하는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특출한 재능도 없으면서 사생활을 야금야금 팔아먹는 것으로 겨우 연예계에 붙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결국 팔아먹을 사생활도 바닥이 드러나면 외면당하고 잊힌다. -68쪽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학문과 예술의 여신들이 기억의 여신의 피를 잇는다는 고대 그리스인의 통찰력에 감복했다. 인간의 창조적 정신 활동은 축적된 기억이라는 이름의 토양에서 꽃핀다는 진실을 발견한 지혜에 대해서 말이다. 정보의 범람 속에서 현대인은 기억의 부담을 줄일 작정으로 부지런히 컴퓨터에 그 부담을 지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정신 활동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는 요즘이다.-75쪽
인류가 지금까지 더듬어온 과학 기술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그 시간과 장소만의 퍼포먼스를 될 수 있는 한 충실히, 될 수 있는 한 대량으로, 될 수 있는 한 적은 비용으로 재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음을 알 수 있다. 그 대가로 우리 스스로 독창성을 발휘할 기회와 분야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세상에 상품가치를 인정받은 개성은 초상권이나 저작권 등으로 복제에 대한 권리를 보호받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소비자로서 수동적으로 즐기는 것밖에 누릴 수 없게 되었다.-77쪽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바탕으로 한 듯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끊임없이 사고, 방송 인터뷰를 하면 열에 아홉이 마치 자신의 의견인 양 방송 진행자나 신문의 논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자신이나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의 이해에 반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정당에 자진해서 투표하기도 한다. 그런 행동이 정보 조작의 결과라는 것은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 북풍형은 사람들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 오래가지 못하지만, 태양형은 그 존재마저도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오래갈 수 있다. 정신의 자유를 위해서는 허울뿐인 자유보다는 자각하고 있는 속박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90쪽
대다수의 국민이 농노라는 신분에 놓였던 러시아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지식인은 한 줌도 안 되는 소수 귀족이나 부유한 계층에 속했다. 지식인층과 일반 국민은 생활 수준이나 문화 수준의 격차가 너무나 커, 서로를 이방인처럼 여겼다. 그런 러시아에서 전자가 후자와 친밀하게 접하고 대화를 나누며, 생활 실태와 감정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여행 중의 마차나 말 썰매 안이었던 건 아닐까. 여행자(지식인) 쪽에서 보면 마부는 민중의 대표자이며, 여행 중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말을 걸기에도 좋은 상대다. 문학 속에서는 민중의 생활에 대한 안내인 역할을 떠맡기도 한다. 거기에다 마부는 견문이 넓다. 마부와의 만남으로 러시아 서정시에 통풍구가 생겨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게 된 것은 아닐까. 마부가 등장하는 문학에서 수많은 걸작이 탄생했다. -156쪽
끊임없이 먹이를 먹는 몸은 양분 흡수 능력 자체가 극단적으로 쇠퇴하고 만다. 게다가 잠시도 쉬지 못하는 소화기관의 피로는 몸 전체의 노화를 앞당긴다. 그랬던 몸이 단식으로 회복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187쪽
소비 문명이라는 괴물은 만족하지 않았다. 돈벌이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은지, 어딘가를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호시탐탐 다음 사냥감을 노린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인간의 능동적인 힘이었다. 신상품 개발은 인간의 능동적인 힘을 끝없이 깎아 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능동적인 행위는 돈을 내는 일. 그 다음은 끝없이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보고, 듣고, 먹는다는 형태로 말이다. 돈을 버는 행위는 또 어떤가. 노동력 감축과 자동화에 따라 인간의 능력은 기계와 시스템의 부품으로 변해가고 있다.-192쪽
동작 하나하나에 세세하고 엄격한 형식이 있고, 그것을 몸에 익히는 데 몇 년이 걸리는 등 부자유를 느끼며 익힌 춤일수록 오히려 자기 표현도 마음껏 할 수 있고, 춤추면서 느끼는 해방감도 크며 만족도도 높다. 형식을 몸에 익히는 과정을 거치면서 몰랐던 동작을 알게 되고, 쓰지 않았던 근육을 능숙하게 움직이게 되고, 자유로워지는 범위가 어느새 더욱 확대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부자유한 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로워야 하는데 결국 구별되지 않는 옷을 입고, 같은 말투를 쓰고, 비슷한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비슷한 것을 먹는 젊은이들을 보고 있자면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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