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모든 바에서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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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들은 게 있겠지만 간이라는 녀석은 침묵의 장기라고 불릴 정도로 좀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는 내장이다. 당신같이 자각 증상이 있어서 입원했다면 굉장한 사태에 이르렀다는 소리야." (18)

그 무렵 나는 가난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존심 같은 게 있었다. 자신은 특별한 인간이라는 의식, 세상에 녹아들지 못한 채 힘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더 미친 듯이 심해지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과신과 불안, 그 양쪽이 가슴 깊은 곳에서 검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하나하나가 당시에는 신경에 거슬렸다. 누르면 녹즙이 나올 것 같은 새파란 청년이었다. (34)

이 남자는 생억지를 쓰는 악동인 동시에 천재 시인이기도 했다. 본인은 아무것도 써서 남기지 않았지만 행동거지, 싸움하는 법, 마시고 쓰러져서 하는 잠꼬대까지 존재 자체가 시처럼 깎아 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이것을 한마다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덴도지는 삶 자체가 일체의 감상이나 수사법을 제거한, 단단하고 건조한 시 같은 남자였다. 나는 언제나 덴도지의 깊은 목소리와 야윈 가슴의 갈비뼈를 떠올린다. (36)

현역 알코올 중독자인 내가 보건대 알코올 중독이 되고 안 되고는 다음과 같은 대전제가 있다. 알코올이 필요한가, 불필요한가. 술 좋아하는 사람이 알코올 중독이 된다는 견해를 보이는 사람이 제법 있지만,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알코올 중독의 문제는 기본적으로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술의 맛을 식사와 함께 즐기고 정신이 적당하게 풀어지는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알코올 중독은 적다. 그런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알코올 중독은 되지 않는다.
알코올 중독이 되는 것은 술을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정말로 나도 그랬다. 이 세상에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 위한 도구, 약리 효과를 바라고 술을 택한 인간이 알코올 중독이 된다.
육체와 정신의 진통, 마비, 만취를 갈망하는 이, 그리고 그들의 귀결로서 ‘사후의 불감무각’을 꿈꾸는 이, 그들이 알코올 중독이 된다. 이것은 모든 어딕트(중독, 의존증)에 공통적이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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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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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은 잔인하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시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잔인함은 혼자 서는 과정에서 터지는 고름 같은 것이다. 다들 더는 어른들에게 울면서 매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들끼리 생존 게임을 시작한다. (1-70)

검찰이 한 명에게 임무를 전부 맡기는 독임제 관청임을 새삼 실감하며 그 무거움에 전율했다. 자기 같은 신임 검사에게도 독립된 직권 행사가 승인된다. 이런 직업은 달리 없다. (1-237)

"혼자라는 선택지가 없어. 중학생이란 생물은 연못 속의 물고기 같은 존재라, 모두 같은 물을 마실 수밖에 없어." (1-260)
중학생은 새떼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모두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몸이 반응해 생각없이 따라가는. (2-289)

"하지만 그게 인지상정인데 어쩌겠어요.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이성과 감정이 항상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단 말입니다. 근본이 그런 생물이라고….감정에 이성을 들이대면, 그때는 상대의 입을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화근이 남아요…."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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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 빔 벤더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빔 벤더스 지음, 이동준 옮김 / 이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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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뉴욕에 사는 친구 페터 한트케를 방문한 적이 있다.
페터는 소설 <느린 귀향>을 집필 중이었다.
그 무렵 그는 센트럴 파크 동쪽에 있는 한 호텔에서
수도승처럼 세상을 등지고 지냈다.
나의 짧은 방문조차도 그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난 그가 작업을 하는 책상 사진을 한 번 찍고,
함께 산책을 하면서 엉덩이 높이에 카메라를 두고 스냅 샷 한 번,
그리고 헤어지면서 저만치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 장 찍었다.
나중에 그의 소설 <느린 귀향>을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꼈던
그를 짓누르던 부담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136)

한번은
콜로라도 주 덴버 시에서
미국에 대해 아주 색다르고 강렬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자기 관조, 일종의 자아도취에 사로잡힌 나라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내겐 거리에 있는 미국 사람들이
고향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178)

사진에 있어서 한 번이란,
정말로 오직 단 한 번을 의미한다.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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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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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부정하지 마. 요람에서 무덤까지 같이 갈 동반자는 세상에 딱 하나,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지. 그 동반자와 사이좋게 지내야 해. 자신과 사는 법을 배워. 그게 답이야.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21)

"사랑에 빠진 남자는 언제나 양처럼 보이지. 자연의 법칙인 것 같아." (72)

앤은 리처드의 이중적인 면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늘 거만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한 흥미로운 가능성들을 지닌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 가능성들에 문이 닫혀버렸다. 앤이 사랑했던 그 리처드는, 넉살좋고 거들먹거리는 흔하디 흔한 영국 남편이란 틀에 갇혀버렸다.
그는 평범하고 포식 동물 같은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심장과 뇌의 능력은 떨어지고 그저 발그레하고 뽀얀 곱상한 외모를 자신만만해하는, 젊은 사람 특유의 노골적인 성적 매력만 있는 여자와. (222)

"희생이라니! 얼어 죽을 희생! 희생의 의미가 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봐. 그건 따뜻하고 관대하고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겠다는 기분을 느끼는 영웅적인 한순간이 아니야. 가심을 칼 앞에 내미는 희생은 쉬워. 왜냐하면 그런 건 거기서, 자신의 본모습보다 훌륭해지는 그 순간에 끝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희생은 나중까지–온종일 그리고 매일매일–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 희생을 하려면 품이 아주 넉넉해야 하지. 앤은 충분히 넉넉하지가 않았어…" (252)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 (280)

"내가 봐줄 수 없는 일이 두 가지 있어. 하나는 자기가 얼마나 고결한 인간인지 자기가 한 일에 무슨 도덕적인 이유가 있는지 떠들어대는 일, 또 하나는 자기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계속해서 후회하는 일이야. 양쪽 말 다 사실이겠지. 자기 행동의 진실을 깨닫는 거라는 점에서는. 그래야 하는 거고. 하지만 그랬으면 넘어가야지.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 계속 살아가야지."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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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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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이 아줌마처럼 좋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 아줌마는 오직 사랑뿐인 커다란 통 같았다. (26)

아줌마는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곳이 이 세상만이 아니라고 일러 주곤 했다. 이 세상의 삶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모두 얻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말라고. 또다른 생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메이 아줌마와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나에게 행복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을 외톨리도 지냈던 나는,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를 만나 지낸 세월 자체가 바로 죽어서 간 천국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멋진 일이 어떻게 나한테 또다시 일어난단 말인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37)

어떻게 보면 그 상황은 메이 아줌마의 장례식보다 더 장례식답고 푸근했다. 일단 장례식을 직업으로 삼은 장의사나 목사 같은 외부인들이 오면 사람들의 슬픔마저 어떤 틀에 맞춰야 한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저씨와 나는 그저 트레일러 안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몇날 며칠이고 엉엉 울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짬도 없었다. 사람들은 결혼을 하거나 교회에 다니거나 아이를 키울 때와 마찬가지로 친척이 죽어서 슬픔에 잠기는 시간도 정해진 틀에 따르기를 바란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저씨와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가 사무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목사를 찾아가 종교 절차를 얘기했으며, 그 전에는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수십 명의 친척과 의미없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그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어야 했고, 그들의 포옹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가 혹시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았나 하고 안색을 살피는 눈길도 그대로 받아 낼 도리밖에 없었다.(53)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오브 아저씨와 나는 난데없이 사교계의 명사라도 된 듯했고, 그렇게 우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목놓아 통곡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틀에 맞춰 슬퍼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황량한 밭에 서서 메이 아줌마를 되살리려는 오브 아저씨의 말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미 장례식을 통해 정리되었어야 할 뭔가가 비로소 내 안에서 정리되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클리터스는 장의사도, 목사도, 친척들도 하지 못한 일을 우리에게 해주고 있었다. 그 애는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 오브 아저씨의 넋두리 한마디 한마디를 귀담아들으면서 더없는 위안을 안겨 주었다. 클리터스에게는 내가 미처 몰랐던 능력들이 있음을, 나는 차츰 깨달아갔다.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정확히 가려내는 능력도 그 중 하나였다. (54)

그 순간 아줌마가 떠올랐다. 메이 아줌마가 생각났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신 뒤, 나는 한번도 제대로 울어보지 못했다. 그저 아줌마의 빈 자리를 견디는 데 급급해서 지난 두 계절 동안 내 속에 차오르던 눈물을 안으로 삼켜왔다. 하지만 그 올빼미가 눈 앞에서 사라지고 이제 이 세상에서는 메이 아줌마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뼛속 깊이 와닿자,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침대에 공처럼 웅크린 채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지도록 울었다. 아저씨는 나를 꼭 끌어안고는, 내가 울음으로 쏟아 내는 생명보다 더 많은 생명을 나한테 불어넣어 주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몸 속의 눈물이 다 빠져나가서 가뿐해질 때까지 나를 안고, 크고 튼튼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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