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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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혹 내 얼굴에서 낙오자의 안색을 발견하면 어쩌나 조바심도 났다. 광합성을 하는 사람에게는 광합성의 빛이, 전자파를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전자파의 빛이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16)

갑자기 목울대로 확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사막에서 만난 폭우처럼 난데없는 가정이었다. 곧이어 내가 살아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그렇게 쉬운 생각을 그 안 왜 한번도 하지 못한 건지 당혹스러웠다. 별안간 뺨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44)

기옥씨에게는 요즘 그런 게 필요했다. 때가 되면 중년들이 절로 찾게 되는 글루코사민이나 감마리놀렌, 혹은 오메가3처럼…몸이 먼저 알아채 몸이 나서서 요구하는 것들이. 이를테면 설에는 떡국이, 보름에는 나물이, 추석에는 송편이, 생일에는 미역국이, 동지에는 팥죽이 먹고 싶다는 식의, 그래야 장이 순해지고, 비로소 몸도 새 계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는, 어느 때는 너무 자명해 지나치게 되는 일들이 말이다. 제사는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지내줘야 했다. 기옥 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시간에게, 자연에게, 삶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제안하듯 말이다. 기옥 씨는 그걸 ‘말’ 아닌 ‘감’으로 알았다. (179)

결혼식은 미소가 너무 많아 힘들다. (232)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251)

소리에도 겹이 있다는 것, 좋은 스피커를 통과한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건축이 된다는 것, 그것도 그냥 건물이 아니라 대성당이 된다는 걸 서윤도 어렴풋이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263)

20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293)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297)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발한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중요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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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
윤성근 엮음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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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나는 나의 고독과 함께 잠잤기에 고독을 거의 한 친구처럼 하나의 달콤한 습관처럼 삼고 말았네. 그래서 고독은 마치 그림자처럼 충실하게 나를 따랐지. 아니 난 결코 외롭지 않아. 나의 고독과 함께 있기에.
- 헤겔의 책에 쓰인 이 글은 김수영의 시 <거미>를 떠오르게 한다. 으스러지게 서러운 외로움, 고독과 아픔들이 달콤한 습관이 되는 무서운 진실. 고독은 끊을 수 없을 만큼 단맛이다. (49)

경마 경기에 나가는 말들은 ‘부담중량’이라는 무게를 핸디캡으로 짊어진다. 뛰어난 말일수록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그것을 이겨내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경쟁자뿐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겨야 하는 것이다. (69)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나무를 닮았다. 다른 철학 책도 그렇겠지만 특히 이 책은 여러 가지 기본 인식과 정리, 정의들을 늘어놓고 그것을 모아 커다란 공리를 세우는 구조다. 나무가 땅속에 넓게 퍼진 뿌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위로 자란 나무는 또 다시 뿌리처럼, 그러나 이번엔 하늘을 향해 가지를 내뻗는다. 뿌리로부터 하나의 생각이 완성되면 자연히 그 생각을 기본으로 무수히 많은 사유를 내놓을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나무의 줄기와 잎, 그리고 튼실한 열매와 같다. 그러므로 <에티카>를 읽는 것 자체가 바로 자기 안에 나무를 하나 심는 일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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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너는 자유다 -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난 낯선 땅에서 나를 다시 채우고 돌아오다, 개정판
손미나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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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투우경기가 인간의 ‘결혼’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그 설에 의하면 소는 남자를 의미한다. 지금은 투우경기에 쓰일 소를 따로 사육하지만 원래는 야생에서 살던 소를 잡아다 경기를 벌였기 때문이다. 남성성을 뽐내며 마음껏 여자들을 범하고 원하는 대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거침없이 살던 야생의 투우는 신랑, 화려한 복장으로 물레따 속에 에스빠다를 숨기고 투우를 유혹해 결국 무릎을 꿇게 만드는 투우사는 신부, 그 어느 곳으로도 빠져 나갈 수 없이 그들을 가두고 있는 투우장은 결혼, 그리고 숨막히도록 긴장감 넘치는 투우경기는 신혼 첫날밤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투우사의 칼을 맞고 무릎을 꿇는 투우처럼 한 여자에게 정복당하고 마는 것이 남자의 운명이라나. 어리석게도 투우사의 화려한 차림과 물레따의 움직임에 속는 것도 남자들의 속성과 닮았다는 주장이다. 투우사들이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고 현란한 색과 장식의 옷을 입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해석이다.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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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IN 레드 문 클럽 Red Moon Club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살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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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란 연애의 본질이기도 하다고 다마키는 생각했다. 연애는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은밀하게 변질되어 간다. 부패해 간다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이다. 가스가 차서 한꺼번에 폭발한다. 폭발한 뒤에는 두 사람 다 제각각 내동댕이쳐져 주위를 둘러보면 눈앞에 낯설고 거친 들판이 펼쳐진다. (76)

작가란 무서울 정도로 우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믿는 존재다. (217)

소설이란 사람들의 무의식을 그러모아 이야기라는 시간축과 리얼리티를 부여해 무의식을 다시 재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74)

"…할망구이니 수수하게 늙어 가면 안심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내가 남을 안심시키기 위해 살고 있는 건 아니지. 주변 사람들이 이 사람은 틀림없이 이러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의표를 찌르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오. 그래서 빨간 옷은 여든이 넘어서 마련한 내 갑옷인 셈이죠." (312)

"진실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소설에 쓰는 바로 그 시점에 그건 픽션이 됩니다. 그걸 알고 있는 작가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매력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게 만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로 착각할 픽션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작품은 모두 픽션입니다."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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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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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과 섞이는 경험은 마치 여러 개의 거울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수치스러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했고, 스스로를 꽤 좋아할 만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던 순간도 겪었다. (45)

‘가벼운 웃음으로 근심이 깨어지는’ 반복적 경험을 통해 나도 마음을 열고 길이 선물하는 우연한 만남을 기꺼이 받아안았다. 어디 온전히 ‘나뿐인 나’가 가능하기나 할까.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나’는 사실은 수많은 관계의 교차점이자 흔적들의 중첩일 것이다. (46)

기쁨과 즐거움뿐 아니라 슬픔과 우울함, 비열함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처럼 찾아오더라도 그 모든 감정을 피하지 말고 "문밖까지 나가 웃으며 맞이하라"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선물에 아로새겨진 무늬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마따나 정말 큰 문제는 그 모든 감정에 문을 닫아걸고 자기 안에 갇혀 제대로 ‘살아보지 않는 것’이다. (75)

뇌 촬영을 통한 연구 결과 내가 다른 이들로부터 배제당하는 경험은 날카로운 흉기에 찔릴 때 느끼는 물리적 통증과 똑같답니다. – 정혜신 블로그 ‘그림에세이’ (77)

내가 갖고 싶은 용기는 매사를 원하는 대로 통제하려는 강박을 버리고 삶에서 우연의 여지를 열어두는 태도였다. 예기치 않은 일에 더 많은 여지를 허용하면서 살아가기, 실수를 저지르거나 일이 잘못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래도 어디까지 한번 가보겠다고 하는 마음. 내가 갖고 싶은 용기는 그런 거였다. (251)

"낯선 이의 친절로 살아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중에서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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