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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멜리 노통은 삶의 여러가지 지옥을 보여준다. 그 지옥들은 돈도 아니고 일의 힘겨움도 아니다. 아멜리 노통이 그리는 지옥은 대부분 타자에 의한 지옥이다.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지옥이 되는 타인들은 전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적의 화장법>에서는 공항에서 마주친 사내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옴으로써 지옥을 만들고 <두려움과 떨림>에서는 직장 상사가 아무리 열심히 일 해도 결코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지옥을 보여준다.
<오후 네 시> 역시 타인은 지옥이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고도 여실하게 보여준다. <적의 화장법>의 경우 공항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나타난 지옥이므로 공항을 벗어나거나 집으로 돌아가버리면 그만이고 <두려움과 떨림>에서는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직장을 때려치움으로써 더 이상 그 직장상사가 선사하는 지옥에 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오후 네 시>에 등장하는 타인은 집으로 찾아든다. 따라서 그 장소만 피하면, 혹은 일을 관두면 같은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타인은 그다지 큰 지옥은 아니었다. 오후 네시부터 여섯시 까지만 찾아오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떠들거나 일을 꾸며서 괴롭히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곧 알게된다. 상대방이 이유도 없이 규칙적으로 매일 같은 시간에 방문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것이 얼마나 지옥인지를 말이다. 한동안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는 그를 비꼬기도 하고 골리기도 한면서 은근히 즐기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렇지만 곧 하루 두시간 때문에 나머지 스물 두 시간이 지옥으로 변하는 끔찍함을 겪게 된다.
다른 작품에 비해 <오후 네 시>는 정말 조용하고도 느릿한 공포로 연속성에 의한 공포를 나타내고 있다. 큰 사건이 일어나거나 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같은시간 찾아드는 미리 예고된 공포는 사람을 숨막히게 한다. 한방울씩 이마에 떨어지는 물이 한시간이 지나면 바윗덩어리처럼 느껴져서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얘기처럼 아무말 없이 방문하는 방문자는 비록 떨어지는 한방울처럼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바윗덩어리처럼 창대했던 것이다.
여타 작품들과 한가지 다른것이 있다면 공포를 함께하는 대상이 있다는것 (주인공과 그의 아내) 그래서 어떤 형태로건 의논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는 공포의 요지를 아예 원천봉쇠하는 다소 능동적인 방법을 취한다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고통받던 다른 책의 주인공들은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못하거나 본인 스스로 정해놓은 선까지 참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보다 강력한 방법을 동원한다.
아멜리 노통의 책이 재미있는 가장 큰 이유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릴때부터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나라를 다녔기 때문에 그녀에게서는 딱히 어느나라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심지어 유럽과 아시아로도 나누기 힘든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써 낸다. 그 배경이 프랑스건 일본이건 말이다. 여태까지 여자 작가들은 사랑에 관한 얘기 빼고는 여행기를 쓰는것이 전부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면 아멜리 노통의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