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클럽
배수아 지음 / 해냄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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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글은 아마 단편에서 읽었던것 같다.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걸 보면 으례 단편들이 그렇듯 특별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음이다.

붉은 손 클럽은 제목과는 달리 그렇게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과 아방가르드 요리 잡지 편집장. 주인공의 남자인 무열과 붉은 손 클럽을 만든 이반이 전부이다. 클럽이라고는 하지만 가입되어 있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과 이반만이 붉은 손 클럽의 회원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주인공의 옆을 배회하는 사람일 뿐이다.
배수아에게 기대를 했던것은 속물적으로 느껴지겠지만 그녀의 학벌때문이다. 이제는 한물 간 대학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이화여대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다. 그녀들이 졸업식때마다 미스코리아 머리를 하고 예사롭지 않은 사진을 찍는것 처럼, 그리고 그 졸업사진은 곧 신부감을 물색하는 뚜쟁이들의 손에 의해 참한 신붓감 명부 쯤으로 탈바꿈하는 것 처럼 말이다.

기자로 있는 친구 하나가 이화여대를 다녔다. 그녀에게 배수아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배수아? 우리학교에서는 문법파괴의 일인자라고 불러' 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타입일지도 모르겠다며 읽어보길 권했다. 결과적으로 나와는 맞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해서는 조금 알게 되었다. 나는 문법이나 정공보다는 느낌에 집착하는 혹은 남다른 튐에 사환을 거는 사람처럼 보였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배수아의 책을 권할리가 없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건 간에 이번에는 틀렸다. 나는 책 만큼은 더구나 소설만큼은 아주 충실한 정공법을 따른것들이 좋다. 재미있는 얘기가 문법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 전개되어주기를 바라는것. 그러나 배수아는 아니었다.

소설에 문법적 오류를 따진다는 것은 바보스런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그 우스운것 마저 무시를 한다면 더더욱 웃겨질수 있음을 배수아를 통해 배운다. 그녀의 소설은 단지 이상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 쓰는것 같다. 뒤에 황경신(페이퍼 편집장)이 인터뷰를 해 놓은것을 보면 황경신또한 그녀가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녀의 인터뷰를 계속해서 읽고 그녀가 낸 인터뷰책까지 본 나로서는 교묘하게 감춰놓았지만 배수아에 대한 그녀의 반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찌되어 배수아의 책 뒤에 배수아를 설명해줄수 있는 사족쯤으로 달려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배수아가 자신을 독특한 시선으로 봐준것이 몹시 기뻐 실었을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인터뷰를 읽어보면 붉은 손 클럽의 부실함이 약간은 용서가 된다. 아하 이렇게 깊은뜻이 같은게 아니라 배수아에 대한 이해다. 그녀는 붉은 손 클럽의 주인공과 많이 닮아있다.

흔히들 여류작가는 자기 얘기를 써 놓고도 주인공과 자신은 엄연히 다른 인물이라고 극구 주장하는 반면 아직 짠밥이 얼마되지 않은 배수아는 순진하게도 자신과 주인공이 닮았다고 시인한다. 밥에다 요구르트를 비벼먹는 것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배수아는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지는 않겠지만 샴쌍둥이처럼 닮은 삶 정도는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배수아의 소설속에는 마음을 쓸 만한 그 어떤 얘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애틋할것도 없고(그렇다고 해서 삼류 소설의 애틋함을 얘기한다고 생각하면 억울하다) 중요한것도 없으며 모든게 그냥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겠어라는 식이다.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데 될대로 되란식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있겠는가? 배수아의 소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한다. 그리고 한 수 가르침을 포기한 대신 무기력만 한아름 안겨주고 있다.
책에는 노석미의 그림 정도는 봐 줄만 했다. 그리고 붉은손 클럽 그림을 함께 넣은것은 아주 잘 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으로 인해 내가 이 소설에 대해 기대를 하게 만든것은 괴씸하지만 말이다. 어쩔 수 있겠는가 부실한 글을 조금이라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필요악처럼 멋진 비주얼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걸 알고 있는게 죄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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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서 맥주를 마시다 - 쾌락주의자 전여옥의 일본 즐기기
전여옥 지음 / 해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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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때는 코끼리표(조지루쉬라는 상표가 있지만 대게는 그 로고인 코끼리표로 통했었다.) 밥통과 보온 도시락통이 주부들에게 꼭 가지고 싶은 가전중 하나로 꼽힐때가 있었었다. 누군가가 일본을 간다고 하면 부탁을 하거나 밥통만 전문적으로 사다 나르는 보따리 장수가 있을 정도였으니 코끼리표 밥통이 하나 있으면 그 집은 적어도 밥걱정은 안하는 집이었었다.

우리집에도 밥통과 보온 도시락이 있었는데 밥통보다 반찬통이 더 큰것을 보고 우리 어머니는 선진국에선 역시 밥보다는 반찬을 더 많이 먹는 법이라며 자랑스러워 하셨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소니 워크맨을 사가지고 오셔서는 외출할때는 물론이거니와 집에서도 오디오 대신 소니 워크맨을 듣곤 하셨었다. 나에게 있어 일본은 코끼리표 밥통과 소니 워크맨의 나라였으며 유치원생에게도 타이즈 하나 신기고 반바지를 입혀 외출시킨다는 일본 어머니들의 교육법에 크게 감동받은 우리 엄마 덕분에 한동안은 추위에 덜덜 떨며 학교를 다녀야만 했었다. 그들의 식민통치와 그로 인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접한것은 이미 소니 워크맨이 아버지에게서 내 손으로 넘어온 이후의 일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반미 감정을 가지고 지난 역사속의 일본은 물론 현재의 일본도 용서하지 못하는 부류. 또 하나는 일본의 전자제품에 이어 문화상품마저도 커다란 매력으로 작용하여 광적으로 일본에 대해 신봉하는 부류. 전여옥이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내기 전에는 후자의 부류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근검절약하는 일본. 우리와 조건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큰 나라 미국에다 빌딩을 여러채 가지고 있는 부자들이 많은 나라.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30년이나 앞서 있는 나라. 만약 중국이 그러했다면 우리는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일수도 있었을 테지만 일본이기에 우리는 밉기도 밉고 부럽기도 부러운 이중적인 감정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는 시원하고 통쾌했다.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속에 한 여자가 나서서 일본에 살아보니 일본에서는 (미래가)없더라 라고 외친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지침이라도 내린듯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고 일본보다는 우리의 미래가 밝음에 안도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책 삿포로에서 맥주를 마시다는 굳이 표현하자면 김빠진 맥주같은 책이다. 그녀는 일본에서 즐길것은 음식 뿐이라고 작정이라도 한듯. 일본 음식의 특징부터 파는장소 가격까지 상세하게 안내했다. 차라리 일본 음식 100배 즐기기 같은 제목을 달고 나왔더라면 훨씬 솔직해 보였을 것이다. 물론 중간중간 일본의 절이랄지 백화점기행도 있고 일본은 없다 이후 정말로 없어져버린 (우리가 일본인의 특징으로 알았던) 가업잇기나 근면 성실에 대해 잠깐씩 언급을 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건 어디까지나 일본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금전적 여유도 있는(그녀가 먹은 음식은 대게 아무리 싸다고 해도 우리나라 회사원들이 먹는 5천원짜리 정식은 없다.) 전여옥 개인의 일본 식도락 여행기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당연하게 여행기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며, 이 책이 그녀의 베스트셀러인 일본은 없다같은 접근을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제는 일본에 대해 조금은 편해져버렸다는 그녀에게 결국 일본은 맛있는 음식을 파는 거대한 식당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일본 어디에 뭐가 맛있으며 어떤 음식을 먹고 다녔는지를 읽기위해 책값을 지불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제목에서 처럼 다소 사색적인 일본 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별로 권하지 않는다. 지금 일본은 10년째 경기 불황으로 허덕이고 있다. 그걸 안됐다며 혀를 찰 것 까지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처럼 여봐란듯 고소해할 필요는 없다. 어떤 나라이건 불황이 닥치면 평범한 중산층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고 그걸 기뻐하는 것은 놀부심보인듯 하다. 비교적 여유로운 그녀가 일본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비싼돈들여 즐기는 것을 대리만족할 정도로 일본에 한이 맺히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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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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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책을 별로 안 읽는 편도 아닌데 그녀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것 같다. 낭만적 사회와 사랑은 총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나오는 그녀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여자들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이 여자임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녀들은 편안한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마저 서글픈 이유는 그녀들이 평등한 사회에서 자신의 재능만으로 평범하게 홀로서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매력을 사회적 지휘로 바꾸어야 하고 자신의 순결을 원하는 남자를 골라 결혼하기에 이용해야만 한다.

그녀들 곁에는 하나같이 치졸한 남자들 뿐이다. 구애를 거절하면 모두들 보는 신문에다 정 반대의 일을 올려버리거나 아내몰래 바람을 피우며 한 침대에서 뒹굴었건만 결정적 순간에 도움을 요청하면 자신에게는 피해가 오지 않도록 하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한다. 이러니 그녀들이 나빠지지 않고 베기는가! 아무도 나쁜인간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나쁜년은 더더욱 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가 읽은 동화속에서 늘 착한 여자가 되어야만 왕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소설속의 그녀들은 착한 여자가 되어 왕자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사회가 너무 매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들은 자신의 무기인 몸이나 순결을 이용해서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서는수 밖에는 없다. 착한여자가 되어 세상에서 아무도 자길 지켜주지 않는다며 퍼질러 앉아 울기보다는 나쁜년이 되어서라도 행복을 거머쥐는 것이 훨씬 났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은 [순수]인데 그 여주인공은 순수한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져 보이는 소위 결혼을 밥먹듯 하는 여자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행복하다. 자신의 행복을 남자의 손에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남자와 있어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가차없이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섰다. 남자들에게서 순수가 사라졌으면 여자에게서도 순수가 사라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단편이다.

그 외에도 작가가 무척 어리게 보이려고 애쓴 소녀시대는 간혹 등장하는 껄끄러운 요즘애들의 말투나 표현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강남의 청소년. 그 중에서도 여자아이를 잘 표현해냈다고 본다. 그 외에 책의 제목과도 같은 낭만적 사회와 사랑, 트렁크등이 재미있었고 나머지 작품들도 읽을만했다. 별 넷을 주기에는 좀 모자라고 별 셋을 주기에는 옹색하다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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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광수생각
박광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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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그닥 많이 보지 않음에도 박광수의 만화만큼은 꾸준하게 본것 같다. 남들은 착한척 순수한척 한다며 미워하기도 하지만 나는 박광수라는 인간 자체의 순수를 가늠하기 위해 만화를 보는것이 아니라 그가 말해주는 내용들이 적어도 한번쯤은 순수함을 되돌아보게 하는것 같아서 봤었다.

광수생각 시리즈로 만화계 스타로 급부상한 박광수. 그의 이름이 이제는 더이상 폭풍의 중심에 서 있지 않은 지금. 나쁜 광수 생각이라는 책을 냈다. 고백하건데 내가 만약 서점에서 이 책을 몇장 휘리릭 넘겨봤었으면 그 적날함에 또는 19세 미만 구입불가라는 빨간 딱지를 보고 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쁜 광수 생각은 어쩌면 야한 광수 생각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광수도 남자인지라 그가 하는 나쁜생각은 거의 다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대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여자가 봐서 그닥 공감을 하거나 재미있을 만한 내용은 없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남녀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세상이지만 성적 판타지 마저 똑같을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여자가 거기에 함께 공감하며 키득이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른다. 그렇지만 인간은 어차피 동물 이라며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여자라면 별로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광수 생각이 좀 순수하고 착한 내용이라고 해서 나쁜 광수 생각도 나빠봐야 지가 어디까지 나쁠라고 끽해야 불효 정도겠지 하고 생각하다가는 큰코 다친다. 광수생각의 영원한 테마인 효를 비롯해서 갖가지 착하게 살자 버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책의 가장 뿌리를 이루고 있는것은 뭐니뭐니 해도 박광수 개인의 성적 판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변태스럽거나 밉살스럽지는 않다. 누구나 그 정도는 뭐 하면서 유야무야 넘어가줄 정도는 된다.

한가지 부러운 것은 마누라를 무서워 한다면서도 이런 책을 만천하에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광수라면 마누라가 무서워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을것이다. 책을 보면서 약간 놀란게 있다면 박광수가 한번 이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혼 자체가 놀라운것이 아니라 전에도 마누라에 관한 내용을 많이 써 놓았던데.. 그 내용으로 봐서 이혼같은건 안할 사람으로 알았는데 하는 정도의 놀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광수는 영원한건 아무것도 없다를 몸소 보여준 셈이다. 그렇게나 사랑한다고 많이 말하던 마누라와 어찌되었건 헤어졌으니 말이다.

원색적인 표현도 많고 읽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키득일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여전히 박광수표 착한 만화도 군데군데 등장했다. 단 너무 심기 연약한 여인네들은 보지 않았으면 한다. 차라리 그런 분들은 박광수의 책을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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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특별했던 하루 - 단편
한혜연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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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렇겠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듯 지루한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으리라. 보이는 어른들마다 학창시절만큼 좋을때가 없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막상 나는 뭐가 좋은지 하나도 모르겠던 시절. 그때 나는 공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노는애도 아닌 어정쩡한 아이였다. 마치 우리가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정쩡한 나이였듯이 말이다. 공부는 아예 손을 놨지만 학교를 땡땡이 치지는 않았던 내게 유일한 구세주는 책이었다. 그 책들 덕분인지는 몰라도 내가 대학에 합격하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던 담임 선생에게 장을 지질 기회를 제공했고 나는 여전히 별 특색없는 삶을 사는 어른이 되었다.

한혜연의 단편 어느 특별했던 하루에는 그때의 나 만큼 어정쩡한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여자이고, 공부를 잘 하지도 못하고, 노는애들 속에 속하지도 않은 아이. 특별히 친한 친구도 없지만 그나마 같이 다니던 친구가 떨어져 나가도 그걸 잡을만큼 애착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는 아이.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아이를 보면 정이 간다. 아마 내 모습을 닮아서 그런것 같다.

만화를 그다지 즐겨 읽지는 않지만(그러나 만화를 아주 좋아한다.) 한혜연의 단편만큼은 꼬박 꼬박 읽었었다. 여동생이 정기적으로 나오는 만화잡지를 살때 마다 한혜연의 단편이 있으면 빼놓지 않고 보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여동생마저 만화를 보지 않아서 한참동안 나는 한혜연의 만화를 보지 못했었다. 어느 특별했던 하루 속에 있는 단편들도 다 만화잡지에 연재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두번째 에피소드인 One Summer Night만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총 네개의 단편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은 어느 특별했던 하루이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한 매일매일 똑같을것 같았던 여고생이 늘 모범생인 반 친구와 함께 겪는 반나절의 일탈인데, 그렇다고 해서 뭔가 큰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늘 가던 학교를 빼먹고 영화를 보고 떡볶이를 먹는것 만으로도 그녀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하루가 된다.

두번째 단편은 공포물인데 그닥 많이 무섭지는 않지만 생각할수록 머리털이 서는 내용이다. 죽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은줄 모른다더라류의 수많은 영화들과 맥락을 같이한다.
1과 49는 전혀 어울릴것 같지 않던 1등과 49등을 하던 아이 둘이서 수학여행에서 사라지는 내용인데 조금 당위성이 부족하지만 일탈을 꿈꾸면서도 그럴 용기는 없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할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여름방학은 왼손잡이 여학생이 여름방학을 보내는 동안 일어나는 에피소드인데 똑같은 왼손잡이 친구를 만나게 되고 또 한 친구는 멀어지고 마지막으로 한사람을 영원히 잃게되는 내용이다.

전부 여고생이 주인공인 단편은 솔직하게 말 하자면 그녀들의 크리스마스나 다른 단편들보다는 약간 재미가 떨어진다. 그렇지만 나처럼 이도저도 아닌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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