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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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방바닥에 누워서 과자를 먹으며 읽었던 책 한권이 생각난다. 왕룽과 오란이 나오는. 그렇다. 그 책은 펄벅 여사의 (어째서 그녀만 여사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대지이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거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모든 장소와 모든 물건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합쳐져서 내는 모든 상황들을 상상했었다. 실증을 잘 내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대지는 드물게 열번 정도는 읽었던것 같다. 읽을 책이 없거나 심심하면 꺼내서 읽었고 그 증거로 대지는 지금 나달나달해진 채 내 책장에 꽂혀있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지는 단 한번도 지겹거나 재미없거나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뒷 내용을 알지 못하는 다른 새로운 책들보다 이미 내용을 다 아는데도 한번 손에 잡으면 멈출 수 없을 만큼 매번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 나는 다시 펄벅의 대지같은 책을 만났다. 허삼관 매혈기. 제목만 들었을때는 '혈의 누'나 '무정' '화수분' 처럼 고만고만한 시대에 쓰여진 우리 소설인줄 알았었는데 이게 중국 소설가의 책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제목이 너무 친숙했다.) 내가 알고있는 한자가 얼마 안되었지만 그래도 매혈기라는 뜻 풀이는 가능했다. 그러니까 뭐 피를 판다 이런 말인데 과거 우리도 어려운 시대에 피를 팔아서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듯 중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나보다.

내가 대지를. 정확하게는 왕룽과 오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난하지만 절대 궁상을 떨거나 혹은 작가가 그들을 불쌍하다는듯한 느낌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의 가난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 특히나 고생만 진탕 한 오란을 너무나 안되었다는 식으로 썼었더라면 나는 그 책을 결코 재미있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판단 모든 느낌은 독자에게 넘겨준 채 펄벅은 왕룽과 오란을 아주 담담한 문체로 그려내기만 한다. 그리고 허삼관 매혈기도 마찬가지다. 허삼관과 그의 아내 허옥란. 그리고 그 아들들인 일락, 이락, 삼락이의 얘기를 그 어떤 군더더기나 과장없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마치 작가는 자기가 이야기를 만들어낸게 아니라 어디 이웃서 본 얘기를 감정없이 그리고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그대로 읊어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도록 한다.

허삼관과 허옥란은 왕룽과 오란을 닮았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전혀 닮지 않았다. 왕룽이 일세대이고 허삼관과 허옥란이 삼세대쯤 된다고 상상했을때 정도의 닮음과 다름이다. 왕룽은 땅에 집착하고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 목표는 곰처럼 일만 하고 아무 불만도 말하지 않는 아내 오란을 만남으로 인해 현실이 된다. 그러나 허삼관은 좀 다르다. 허삼관은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거창한 목표가 있는것도 더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큰 일이 벌어지면 물을 여덟 사발쯤 들이킨다음 오줌보가 터지기전에 재빨리 병원에 가서 두 사발쯤 피를 팔고 그 돈을 벌어진 일을 해결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삼관을 아무 생각없이 사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고뇌와 번민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허삼관만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허삼관이 아닌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분도 말했지만 허삼관 매혈기를 읽다가 딱 한번 뒹군적이 있었는데 기근이 들어 배가고픈 허삼관네 식구들이 전부 누워서 각자 먹고싶은걸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이 어찌나 리얼하고 또 재밌던지. 꽤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상의 요리를 해 대면서 또 그 안에서는 너무나 진지한 허삼관과 그의 식솔들을 보고 있자니 그분의 말마따나 그 장면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웃을 지경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지지리도 가난한 남자가 거의 매일 피를 팔다시피 해서 정말 궁상스럽게 살아가는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다. 책에서 피를 파는 대목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허삼관은 10년에 한번 11년에 한번 피를 팔기도 한다. 물론 중간에 큰일이 생겨서 자주 피를 뽑다가 생명을 잃을뻔 하기도 하지만 인생 전반에 걸쳐서 늘 피를 뽑아야 하는건 아니다. 그렇지만 큰 일이 있을때마다 허삼관은 피를 뽑는다. 허나 그는 피를 뽑는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를 뽑을 수 있으니 자신은 건강하며, 또 피가 자신의 돈나무라 생각을 한다. 허옥란도 마찬가지로 내 예상에서 빗나가는 인물이다. 오란처럼 허삼관을 하늘같이 모시고 아무 군말없이 그저 일이나 죽도록 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다. 그러나 곰같이 일하는 오란 못지않게 허옥란도 매력적인 인물이다. 허옥란에게 매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목은 허삼관 매혈기이고. 분명 허삼관은 피를 팔아서 큰 일을 치르곤 하지만 책의 큰 줄거리는 허삼관의 피 파는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남의 인생을 이토록 담담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화는 허삼관과 허옥란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담백하게 전해준다. 어떤 양념도 어떤 고명도 얹지 않아서 약간 심심할 정도이지만 그래도 이 책은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을 맛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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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1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다 보면 어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던 소설입니다.

반딧불,, 2006-05-12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룽과 오란이라니..
오란의 그 매정하게 딸내미 전족시키던 장면이 슬그머니...;;

비연 2006-05-1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마지막까지 마음이 찡하고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플라시보 2006-05-1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네. 좀 안되었긴 했지요. 그런데 뭐 그다지 궁상스럽거나 많이 슬프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반딧불님. 아.. 맞아요. 전족하던 장면 기억나네요. 오란은 전족을 안해서 왕룽에게 이쁨을 못받는다 생각해서 딸에게 만큼은 그렇게 해 주려고 전족을 했었지요. 그때가 아마 왕룽이 첩을 들였을때였지 싶은데.. (제 기억이 맞다면..)

비연님. 네. 간만에 꽤 좋은책을 만난것 같아서 저도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어요. 님 말씀처럼 재미도 있었구요.

밑줄긋는남자 2006-05-19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훔쳐보기만 하다 처음 흔적을 남기는군요
플라시보님보다 먼저 읽은 책이 있다니 신기하기도 해서 그런가 봅니다.
아마도 또 계속 훔쳐보지 않을까 싶군요
권위에 약한편인데 에디터스초이스 다음으로 신뢰가는 플라시보님의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플라시보 2006-05-19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는남자님. 아.. 아이디가 참 마음에 드네요. 저도 그 책 재밌게 읽었었거든요. 음.. 이 책 읽으셨군요. 저도 읽고나서 리뷰쓰려고 보니까 리뷰수가 정말 많아서 놀랬어요. 유명한 책이었구나 하고 그제야 알았죠. 에디터스초이스 다음으로 신뢰해주신다니 흐흐.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