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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파운드의 슬픔
이시다 이라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시다 이라라는 작가에게 홀딱 반한 것은 그의 단편집 'LAST' 를 읽고 나서였다. 4teen도 읽었지만 LAST만큼 강한 느낌은 아니었다. LAST를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작가는 절대로 혹은 적어도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주절거리지는 않겠구나. 그렇지만 이번 작품 1파운드의 슬픔을 읽으면서 나는 내 생각을 바꿔야 했다. 이시다 이라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꽤 잘 주절거릴뿐 아니라 동시에 꽤 많이 주절거렸었다. 슬로우 굿바이라는 책에서도 사랑을 말했고 동경 DOLL에서도 사랑을 말했다고 하니 말이다. 내게있어 그저 LAST의 암울한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그게 전부라고 착각했을 뿐. 이 작가 우울한 얘기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총 10개의 사랑얘기가 적혀있는 이 단편은 뭔가 운명적인 사랑이라던가 아니면 대단한 우연이 끼어든 사랑을 얘기하지 않는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그렇지만 다들 이렇다. 확실한 미인은 아니지만 매력있는. 배우처럼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호남가는 미남형인) 그들의 사랑 얘기가 시작된다. 가끔은 이미 시작된 사랑이기도 하고 또 어떨때는 시작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의 사랑일때도 있지만 아무튼 10가지 얘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남녀간의 사랑이다.
LAST와는 정확한 반대편에 서 있으려고 작정이나 한 사람처럼 이시다 이라는 이 작품에서 큰 고민없고 큰 아픔없는 사람들의 사랑을 얘기한다. 하긴 당장 빛에 쪼들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판국에 사랑타령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LAST. 끝장으로 가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대한 내 오랜 편견이 하나 있다면 사랑은 어디까지나 등따시고 배부를때 할 수 있는 것이란 거다. 등이 차갑고 배가 고플때 하는 사랑.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드물다는게 내 생각이다. 내일 끼니를 걱정하지 않을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을때 사랑하는 사람을 떠 올리며 잠못이루거나 설레이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그런 점에서는 이시다 이라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LAST에서는 아무도 사랑을 얘기하지 않았고 1파운드의 슬픔에서는 아무도 돈 얘기를 하지 않으니 말이다.
술술 잘 읽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취향의 소설은 아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처지라면 주인공들을 나름 나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보겠지만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생각한지 너무나 오래 된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얘네들 살만하니 사랑을 하는구나 싶을 뿐이다. 그나마 가장 와 닿은 것은 첫번째 단편인 두 사람의 이름인데 그건 사랑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등장하는 고양이 때문인것 같다.
읽다가 보면 10개의 얘기를 채우기 위해 참 많은 상황들을 동원했구나 싶지만 읽다가 보면 어쩐지 뒤로 갈수록 약간 허술해지고 맥빠지는 느낌이다. 좀 쎄개 말하자면 어른판 하이틴 로멘스라고나 할까? 동화같은 사랑이 등장해서 10대 소녀들을 후리는 하이틴 로멘스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에 등장하는 얘기들은 꽤나 달달하다. 꼭 이시다 이라가 아닌 다른 사람도 충분히 쓸 수 있을만큼 달다. 어쩌면 약간은 어두운 얘기들에 끌리는 내 성향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단편집에 그리 많은 점수를 주기가 어렵다. 그냥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로 끝나는 동화책들은 어쩐지 의심스러운데 이 책 역시 그런 의심을 준다. 과연 그 뒷장이 쓰여진다면 그래도 이 사람들은 행복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여전히 기쁠까 하고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그렇지만 내가 하면 단 하나 뿐이고 특별한게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있으면, 그것과 약간만 연관된것을 만나도 마치 신이 내린 계시인양 기뻐한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면 이 책이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연관시키려 마음만 먹으면 이 10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하나쯤은 비슷한게 나올테니 말이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이미 좀 시큰둥해져 있다면 이 책은 달긴 단데 꽤 밍숭하다. 사랑해서 좋겠네 니들은 이라는 생각까지는 가질 수 있지만 사랑이란 정말 기기묘묘하고도 놀랍구나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