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HOT가 컬러플한 옷을 입고 캔디라는 곡을 신나게 불러제낄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내가 오빠 혹은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연예인들은 점점 줄어들겠구나. 그리고 어느덧 TV속에는 나보다 훨씬 어린 연예인들이 나오는게 당연해졌으며 내게 있어 언니나 오빠였던 우상들은 하나같이 망가진 모습으로 푼수처럼 가끔씩 등장할 뿐이었다. (그들은 그걸 변신이라 불렀지만 나는 한때나마 멋졌던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으로서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76년생에 95학번인 나는 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도 어른이 되어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00학번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영 믿겨지지가 않았다. 예전에 내가 60년대 혹은 50년대 생을 보면서 저 사람들 참 오래되었구나 하고 느꼈던 것을 80년대생이나 00학번이 나를 보면서 느끼겠지 하는 생각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내가 딱 한군데 위로를 받는 곳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책을 쓰는 작가들에게서 였다. 아직까지 그들은 내가 작가님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그러니까 나 보다 단 한살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었다. 76년 이전에 태어난 그들은 내가 좋아했던 연예인들과 달리 살아남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역시 글은 연륜이 어느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지. 암. 연예인처럼 몸으로 먹고 사는 직업이 아니잖아 하며 나는 기뻐했다. 그러나 김애란을 만나고 나니 그 기쁨도 접을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애란은 내가 그때 태어난 사람도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한 80년생이다.)

작가를 여자와 남자로 나누어서 생각한다는 발상이 좀 웃긴지 모르겠지만 나는 남자와 여자가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차별의 의미가 아닌 다름의 의미) 자주 작가들을 그렇게 나누어서 생각한다. 남자 작가들에 비해 여자 작가들이 앞서는 것은 디테일과 감정적 표현이다. 물론 아닌 경우나 예외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 작가들은 감정을 무척 섬세하게 잘 표현해내고 상황을 디테일하게 설명해준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겪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겪은 일 처럼. 현재 상황처럼 느끼게 한다. 그에 비해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취재력과 유머감각이 아닌가 싶다. 체력적 한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자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로 취재를 했겠다라는 느낌을 받은적이 별로 없었다. (역시 아닌 경우도 많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전체적인 부분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능력이 탁월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더 들자면 여자 작가들의 작품은 하나같이 다 심각하다는 것이다. 문학이 장난이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겠지만 나 같이 뭘 모르는 독자들은 가끔 재밌고 가벼운 작품도 읽고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실제로는 심각한 소설을 쓰지만 단편이랄지 산문집에서는 한없이 널널한 모습을 보이는 것. 김영하가 작품과는 달리 소소한 글쓰기에서는 무척 유머러스한 것. 나는 이런 글을 여자 작가들에게도 보고 싶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유머감각이 떨어지지는 않을텐데 어째서 그녀들은 늘 진지하기만 한지. 어쩌면 세상 일이 다 그렇듯 문학판에서도 역시 여자가 살아남으려면 치열해야 하고 그 치열함이 작품속에서도 녹아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김애란의 단편집 달려라 아비를 보면서 나는 드디어 속시원한 여자 작가의 유머러스함을 발견했구나 싶어서 무척 기뻤다. 늘 진지하기만 한 여자 작가들의 작품만 보다가 김애란의, 내가 여태 남자 작가들에게서만 발견했던 유머러스함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 같은) 을 읽었을때 기쁨은 훨씬 더 컸다. 그렇다고 해서 김애란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가볍고 할랑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유머를 알고 가벼움의 미학을 알며 진지함을 아무렇지 않은척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상황이건 농담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누군가와 싸울때도 나는 농담을 해서 상대방을 웃긴적이 있다. 이건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일텐데 아버지는 야단을 치시다가도 우릴 웃겨서 늘 엄마에게 실없는 양반이란 소릴 들으셨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웃음이었다. 어떤 상황이건 유머는 존재해야 한다는 당신의 생각은 곧 내 생각과 내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달리 유머와 웃음에 집착한다. 코메디프로의 그 억지스런 웃음이 아닌 인간이 접하는 모든 문화와 예술과 생활에 녹아있는 웃음이 좋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나는 책에서 웃음을 찾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아무리 문학적으로 뛰어나고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재미. 즉 웃음이 없으면 나에게는 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든다.

코메디언 흉내를 내거나 유행하는 말을 해서 웃기는 것과 재치가 있고 유머를 알아서 상황을 웃기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웃기는 사람. 웃기는 삶이 좋은 만큼 나는 나를 웃게 하는 책이 좋다. 그리고 아주 간만에 나는 여자가 쓴 책을 보면서 원없이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여자 작가의 책을 보며 운적은 있어도 웃은적은 별로 없었던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김애란의 책은 뻘에서 뜻밖에 진주조개를 잡은것 같은 기분이다. (뻘에서 진주조개 잡는게 가능한지는 나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책이 그저 참 웃기고 재미있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녀는 다른 여자 작가들 못지않게 섬세하며 디테일하고 또 상상력이 풍부하다. 여자 작가들이 가진 장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간 부족한듯 했던 유머러스함을 갖추었다는 것. 이것이 김애란이란 작가를 더더욱 빛나게 하는 이유인것 같다. 앞으로 그녀가 낼 책들이 몹시 기다려진다. 한 작가를 만나고 그 작가를 믿으며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것. 그건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기쁨이 아닌가 싶다. 200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그런 작가들의 이름에 김애란이란 이름 하나를 즐거운 마음으로 추가시킨다.

덧붙임 : 나는 이 책을 구입하려고 마음을 먹었을때만 해도 아비가 사람 이름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아버지라는 뜻의 그 아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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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사스 2005-12-2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멋진 리뷰네요. 사놓고 개시 못하고 있는 <달려라, 아비>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플라시보 2005-12-28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훈성님. 네. 읽어보세요. 저는 재밌더라구요. 님께도 재밌는 책이면 좋겠습니다.^^

poptrash 2005-12-2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이 책을 찾고 있었는데. 참, 좋은 아버지를 두셨네요.

깐따삐야 2005-12-2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오랜만에 상큼한 재간둥이 작가 하나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와 동갑내긴데 나는 왜 이런 신선한 사고를 못하나, 자괴감도 들었구요. ^^

플라시보 2005-12-29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optrash님. 흐흐. 네. 모든 면에서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분명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

깐따삐야님. 작가가 저보다 무척 어리다는 것에 커다란 충격(?)을 받으며 읽었었는데 님은 또 님 나름대로 동갑이라 충격이셨나보군요.^^ 아무튼 님 말씀처럼 상큼한 재간둥이 작가입니다. 흐흐.

검둥개 2005-12-29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작가들은 유머가 떨어진다는 것, 예리한 지적입니다. ^^ 재미있게 리뷰 읽구 추천하고 갑니다. 이 책 점점 더 참을 수 없이 읽고 싶어지는데요. ;)

플라시보 2005-12-29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흐... 뭐 재가 책을 많이 안읽어봐서 혹은 불행하게도 유머러스한 여자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태 본 책들은 그런 경향이 있더라구요. 기회 닿으시면 한번 읽어보세요. 저는 재밌더라구요.^^

hnine 2005-12-2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다려요

플라시보 2005-12-29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흐... 같이 기다립시다요.^^

픽팍 2006-01-0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살까말까 심각하게 고민중이었는데;;;
책이 너무 얇아서;;얇은 책이 재미있으면 읽는 내내 아쉽더라구요 ㅠ

울보 2006-01-0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플라시보님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 되신것이요,,

책속에 책 2006-01-06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플라시보님^^

Kitty 2006-01-07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이 책 저도 샀어요. 오기만들 기다리고 있는 중~ ^^ 기대됩니다~

paviana 2006-01-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