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하도 볼만한 영화가 없어서 꽤 오랫동안 극장을 안갔었다. 그러다가 연애의 목적이 밤 12시에 개봉을 하길래 동네주민 언니랑 둘이서 마실삼아 슬슬 걸어가서 이 영화를 보고 왔다. 밤 12시 영화라서 심야할인에 통신사 카드 할인을 받아서 6천원에 영화를 보니 뿌듯하기 그지 없었다. (거기다 팝콘은 집구석에서 튀겨가고 콜라도 박스떼기로 사놓은 캔을 들고 갔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고등학교 교사인 유림 (박해일)은 새로 온 교생 홍 (강혜정) 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노골적으로 찝쩍거린다. 유림에게는 이미 6년동안 사귄 여자친구가 있고 홍에게도 곧 결혼할 남자가 있다. 유림의 뻔하고 노골적인 수작에 홍은 계속 외면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뻔뻔스러운 남자가 귀엽게 느껴진다. 유림과 홍은 드디어 연애질을 하게 된다. 이들의 연애는 아름답거나 고귀하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담백하다. 사심을 숨기지 않는 유림과 그의 수작을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홍. 그러나 이들의 연애에 갑자기 예기치않은 문제가 생기고. 일면 쿨한듯 보였던 연애질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박해일의 뻔뻔스러운 연기에 관객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관심있는 여자에게 해대는 뻔한 짓거리란 짓거리는 모조리 해대는 박해일. 그러나 박해일이기 때문에 전혀 미워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이 영화를 보고 '나도 박해일 처럼 해도 여자들이 넘어와 주겠지?' 라고. 남자들이여 착각하지 말자. 그건 어디까지나 박해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조금이라도 느글거리는 면이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관객들은 도저히 그를 봐 넘겨줄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애란 포떼고 차떼면 참으로 뻔한 플레이구나. 자기들끼리 할때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제 3자가 되어서 그걸 지켜본다면 이것처럼 유치한 놀이가 없겠구나. 어쩌면 그렇게 뻔하고 뻔해서 재미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영화를 보는동안 박해일이 보여주는 뻔한 수작과. 그 수작을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강혜정의 모습은 결코 우리가 영화에서 기대하는 사랑의 내용들은 아니다. 어쩌면 홍상수 감독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홍상수가 조금만 더 영화적 멋을 부린다면 이런 영화를 찍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감독 한재림은 이 작품으로 데뷔를 했으며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 몇분 동안은 남자가 보면 참으로 거시기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그들이 했던 혹은 앞으로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그 모든 뻔한 수작들을 너무 숨가쁘게 나열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이 남자 생각만큼 뻔뻔하고 나쁜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남자들의 목적은 다 뻔하다. 다만 박해일이 맡은 유림이라는 캐릭터는 그걸 크게 미화시키지 않을 뿐이다. 여자와 자고 싶다는 표현을 애둘러서 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하고. 약간 애두른다는 것도 상대방이 눈치채기 딱 좋은 정도밖에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게 영화가 아닌 현실이면 어떨까? 장담하건데 박해일이 아니라면, 또 여자가 그 남자에 대해 마음이 있지 않는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약간의 신파조를 보이던 부분에서 다소 실망스럽긴 하지만 감독은 꽤 상큼하게 끝맺음을 잘 한다. 만약 거기서 좀 더 얽히고 섥혔으면 초반부의 쿨함을 다 말아먹었겠지만 이 감독은 영특하게시리 잘도 피해간다. 다만 중간에 홍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 홍이 유림에게 한 행동은 자신이 당한것과 똑같은 행동이다. 홍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영화 후반부에 보면 그럼으로써 홍이 그 고통스런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겠구나 싶기는 하지만. 자신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에게 자신의 고통을 똑같이 나눠준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쉽사리 동의하기 힘들다.
아무튼 영화는 적당히 귀엽고 적당히 상큼하다. 그리고 여자라면 아마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너무너무 뻔해도 좋으니까.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타나서 수작 좀 걸어주면 좋겠다고.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는 뭐니뭐니 해도 박해일이 펼치는 뻔한 수작 퍼레이드이다. 정말이지 내가 알고 있던 남자들의 뻔한 수작이란 수작은 다 등장한다. 단. 섣불리 따라 하다가는 연애고 나발이고 무지하게 쪽만 팔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홍이 유림에게 넘어갔던건 순전히 유림이 그렇게 해서라던가, 그렇게 해도 되어서가 아니라 홍의 마음에 유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없다면 그런 수작을 백날 걸어봐야 따귀만 맞을 뿐이다. (그러니까 할때 하더라도 이 여자가 나한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을 잘 해야한다.)
끝으로 이 영화는 뭐라고 뭐라고 길게 할 말이 없는 영화이다. 그저 한번 보라는 소리를 할 수 밖에. 보면 안다. 그리고 아마 봐야할꺼다. 되게 재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