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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영혼
필립 클로델 지음, 이세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인터넷에서 책을 사고 부터 오프라인 서점을 가 본지가 꽤나 오래되었다. 책의 실체가 눈 앞에 있으니 온라인 서점보다 고르기가 훨씬 쉬울꺼라고 생각하며 갔건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그 많은 책들 앞에서 멀미가 날것 같았다. 책을 손에 잡고 펴서 조금 읽을수도 있건만 나는 달랑 두권의 책을 고르는데 무려 한시간 남짓 소비해야 했다. 그날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표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프랑스 문단이 극찬했다는 문구가 씌여진 띠를 두르고 있는것에 혹해서 샀다.
이 책은 한 남자의 고백으로 시작을 한다. 어떤 사건에 대한 고백이다. 하지만 그 사건에만 집중을 해서 고백을 하는것은 아니다. 이 남자는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마치 전원일기가 돌아가면서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번씩 해 주듯이 그렇게 자신이 속한 마을 사람들과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 모두를 이야기한다. 남자가 말하는 사건이란 동네 식당의 주인인 브라슈의 막내딸 벨 드 주르가 어느날 살해를 당한 것이다. 아직 어린 소녀인 그녀. 세 딸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예뻤던 그녀는 목이 졸린채 물에 빠져서 죽어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사건의 범인을,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고 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탐정소설의 형식을 빌려오지는 않았다. 마치 주인공은 전혀 범인의 뒤를 쫒는다는 느낌없이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느낌이 없이 조금씩 사건에 다가선다.
책은 무척이나 재미있다. 사람들의 이름이 좀 어려워서 헤깔리긴 하지만 그들을 묘사해놓은 글들 덕분에 이름을 까먹는다 해도 뒤에서 다시 알아내는 것에는 별 문제가 없다. 첫 장은 다소 심각하게 시작하지만 글은 중간중간 예상의 허를 찌르며 웃긴다. 한 소녀가 죽고 마을은 전쟁을 겪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작가는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는다. 중간쯤 읽어가면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군지를 찾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지만 마지막 장에 이르면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는다. 뭐가 사실인지 뭐가 착각인지 섞이기 시작하고 죄는 다시 쓰여지기 시작한다. 이때쯤 이르르면 작가는 중간중간 쓰던 유머러스한 문체를 버리고 꽤나 심각했던 첫장의 자세로 돌아간다.
이 소설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다. 내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매력을 고스란히 다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을 '캡짱 재밌으니 강추' 따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소설은 읽는 내내 사람을 유쾌하게 하기도 하고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탐정소설처럼 사건이 벌어지고 사건이 해결되어가는 과정이 나오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주인공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고 그 사연들은 소설내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읽고 나서 이토록이나 이 소설이 어떠했다는 것을 말하기 힘든 소설은 처음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매력적이다. 치명적인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찔릴것을 알지만 그 아름다움에 취해 덥석 손을 내밀게 되는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글 쓰는 기법.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까지 모든것이 다 새롭다. 그는 마치 성을 쌓는것처럼 기초부터 정교하게 소설을 써 나가기 시작하지만 독자들이 고루해하지 않도록 갖가지 장치를 해 두었다. 그저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의 소설이라기 보다는 천재의 독백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소설책에서 경외감을 느낀다면 그건 너무 과한 칭찬일까?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전혀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다른 책들에 비해 시간이나 죽인다는 식으로 폄하되기 쉽상인 소설책이지만 이 정도의 구성과 정교함을 갖추면 소설책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완전하고 정성스러운 작품으로 대접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인간의 내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아는척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있는 심성을 이렇게까지 들 쑤실수 있음은 작가의 위대함을 더더욱 곤고히 한다.
간만에 그저 재밌다 혹은 빨리 읽히니 수월하다 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한 제대로 된 소설을 만났다. 그 모든것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은것. 그건 이 책을 완전무결하게 만든다. 도무지 흠잡을 곳이 없는 소설. 그런 소설을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