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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녀의 소설에는 언제나 적이 등장한다. 적들은 처음에는 조금 성가신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신경을 좀 긁기는 하지만 별 문제 아니려니 하고 넘긴다. 하지만 적은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그들은 성가심을 넘어 모욕을 주고 짓밟으며 마침내는 영혼을 갉아먹는다. 주인공들은 참고 또 참다가 드디어 폭발을 하고 적을 제거한다. 하지만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적은 이미 내 안에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내가 적인지 적이 나인지의 구분을 모호하게 해 버린다. 노통의 소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적에 잠식된 사람들 쯤이 아닐까? 악과 선의 경계를 드나들며 그것의 차이를 결국 종이 한장보다 더 얇게 만들어 버리는 노통의 소설은 확실히 흡입력이 있다.
내 생각에 노통은 강박적으로 글을 쓰는것 같다. 그녀의 소설속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적에 관한것은 고사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언제나 외적으로 차단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시킨다. 어눌하고 어리숙하게 보여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주인공. 특히나 주인공이 여자일 경우 그녀들은 대부분 성숙한 여성이 아닌 소녀이다. 아직까지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의 소녀들. 그녀들은 자폐증 환자 만큼이나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서 산다. 그러다가 적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어떤 식으로건 세상과 소통하지 않을수가 없다. 또한 마지막에는 적이 제거가 되기는 하지만 적과 너무 오래 대치한 때문인지 아니면 적으로 인해 너무나 오랜기간 시달림을 받아서인지 주인공의 모습에는 언제나 적이 오버랩된다. 작가들마다 특징이 있고 또 취향이 있겠지만 아멜리 노통 만큼이나 그 부분에 있어 확실한 것을 보여주는 작가는 드물다.
소설 앙테크리스타에도 역시 적이 등장한다. 주인공 블랑슈는 어느날 크리스타라는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 늘 있는듯 없는듯한 존재인 블랑슈에 비해 크리스타의 존재는 눈부실 정도로 확고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든걸 가진듯 보이는 크리스타는 블랑슈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또래 집단에서 흔히 보이는 따돌림 정도가 아닌. 크리스타는 블랑슈가 가진 모든걸 하나씩 침해하고 지배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블랑슈는 자기가 가졌던 전부를 크리스타에게 빼앗기게 된다.
크리스타의 비밀이 밝혀지고 블랑슈의 삶에서 크리스타는 물러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늘 그렇듯 노통의 소설은 적이 나고 내가 적인 상황이 이 소설 앙테크리스타에도 변함없이 등장한다. 키아누 리브스와 알 파치노가 나왔던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적그리스도인 알파치노를 거부함으로써 모든게 끝난것 같지만 다시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것 처럼 블랑슈는 크리스타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순간 바로 크리스타가 되어 있다.앙테크리스타라는 이름은 크리스타를 적그리스도 처럼 표현을 하여 블랑슈가 크리스타에게 지어준 별명이다. 종말에 나타나 사람들을 현옥시키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다는 적그리스도. 크리스타는 그런 적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쏙 빼다 박았다. 너무나 매력적이여서 감히 거부할수 없는 힘을 가졌으나 그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을 맛보게 된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노통의 책인 오후 네시와 적의 화장법. 두려움과 떨림 보다는 다소 재미가 떨어지긴 했지만 책을 잡는 순간 단박에 읽어치우게 하는 매력은 여전하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처음에는 매력적이었던 그녀의 방식이 이제는 점점 식상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체 소설속에 얼마나 많은, 징글징글할 만큼 혐오스럽고, 끊임없이 신경을 긁어대는 적을 등장시켜야 만족하는 것일까?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정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일까? 아니면 평온한 삶은 적으로 인해 언제든 깨어질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라는 사실일까? 노통의 소설은 분명 재밌기는 하지만 무언가 울림이 있다거나 남는게 있는 책은 아닌것 같다. 필때는 화려하지만 지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장미꽃같은 소설이 아멜리 노통의 소설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