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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말이다. 나는 여성 작가들이 쓴 글을 아주 좋아한다. 쉽게 읽히는데다 재밌고 감성도 풍부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읽을때는 페이지 페이지 침 발라가며 재미나게 읽었으면서 리뷰를 쓸때는 언제나 삐딱한 자세가 되곤 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이다. 아무리 재밌으면 모든걸 용서하는 나 이지만 그래도 일기장 소설은 좀 심했다고. 적어도 작가라면 상상을 하던가 아니면 발로 뛰면서 자료를 좀 모은다음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무언가를 근사하게 써 낼 줄 알아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이다. (예전에 읽었던 별로 재미없는 소설에 많은 점수를 주었던 이유는 그 작가가 책의 배경이 되는 이국땅에 가서 이미 다 사라진 자료를 고생고생해서 찾아가며 썼다는 말에 그만 감동을 먹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요 근래에 보기 드물게 내가 재밌게 읽은 만큼. 그대로 칭찬을 해 주고 싶은 작가를 만났다면 바로 심윤경이다. 아무리 재밌었던 책들도 일단 리뷰를 쓰는 순간만 되면 나에게 일기장 소설이며 침대소설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었는데 이 작가의 책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정말로 노력을 해서 썼으며 작가적 상상력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재밌기까지 하다. 즉 남의 일기장을 들추는 듯한 느낌을 없이도 내게 재미라는 것을 준 보기 드문 여성 작가인 것이다.
심윤경이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우선 극중 주인공이 남자라는 것에 있다. 알다시피 극중 주인공이나 화자는 나이가 많건 적건 직업이 뭐건 간에 우선 작가와 기본적으로 같은 성별을 책정해 놓는 것이 가장 편한 일이다. 아무래도 다른 성별로 지정을 해 놓으면 자기와 동일한 성별일때 보다는 신경이 쓰이며 더 나아가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해서 작품을 망처버릴 확률이 농후하다. 그리고 작가들 대부분은 성별 뿐 아니라 주인공의 직업을 자신과 동일한 소설가나 기자 등등 아무튼 글쟁이로 설정을 해 둔다. 주인공의 직업마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직업을 설정 해 둠으로 인해 골치아파질 것을 우려한 안일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내가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 직업은 소설가가 단연 1위였다. 2위가 기자임은 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심윤경은 주인공을 남자로 설정했으며 별 무리없이 잘 그려내었다. 약간 오바한 나머지 남성미가 지나치게 풀풀 풍기는 남자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몸만 남자지 여자의 감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남자도 아닌 그냥 남자를 그려냈다.
다음으로는 좀처럼 소설 속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옛 언찰(諺札)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국문학을 들고 판 사람이 아니라면 언문 같은걸 일일이 찾아내어서 언찰로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심윤경은 국문학이나 사학을 전공한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힘이 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집어넣은 언찰은 나처럼 무슨 말인지 모르면 귀찮아서 읽지 않고 건너뛰는 인간에게 조차 주석을 보고 해석을 하는 기특함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물론 사가에서 손녀와 할머니 사이에서 주고받능 언찰이라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덕도 있다.)
이 소설은 현대가 배경이긴 하지만 주인공이 속한 공간이나 살아가는 방식은 현대라기 보다는 양반 상놈이 존재하던 시대나 다름이 없다. 종손으로 태어난 주인공은 비록 대학을 다니고 가끔 서울을 가기도 하지만 그의 삶의 대부분은 할아버지가 지키고 있는 효계당에서 이뤄진다.
어떻게 보면 이건 사랑 얘기일수도 있고 한 맺힌 원혼들 때문에 풀려도 더럽게 풀리는 집안사에 관한 얘기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전자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이라는게 어디 정해놓은 공식이 있는것도 아닌만큼 나는 분명 주인공이 사랑을 했다고 생각을 한다. 비록 좀 이해하기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간만에 아주 재밌는 소설책을 읽었고 또 읽을때의 느낌과 마찬가지로 칭찬을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살면서 이런 소설가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라고까지 여겨질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주문을 해 두었다. 작가 말처럼 요즘 소설처럼 쿨하지 않고 실제의 삶이 그런것 처럼 다소 구차하고 남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없이 질척거리며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분명 작가의 기량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