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세계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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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수의 결혼한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본질적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겐 새로운 정체성, 즉 누구의 아내, 혹은 누구의 엄마를 사회로부터 부여받습니다. 인문학자이자 시인, 비평가이자 소설가로 이미 유명해진 저자 시리 허스트베트조차도, 작가로서의 그녀와 유명 작가 폴 오스터의 아내로서의 그녀 중 어느것이 사람들에게 먼저 생각날 지 모르겠습니다.《불타는 세계》는 시리 허스트베트만큼 재능있는, 완전하면서도 불완전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해리엇은 개성있는 외모와 뛰어난 지성, 훌륭하면서도 조금 기괴한 미적 감각을 가진 여성 예술가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아주 영향력이 많은 유명 미술상의 부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무명 예술가와 유명 미술상의 부인. 사람들은 그녀를 예술가로서 보지 않았습니다. 해리엇은 재능과 욕망을 억누르고 유명인의 아내이자 파티의 안주인, 남매의 어머니의 삶을 살아갑니다. 유명한 미술상이었던 남편이 죽은 뒤, 그녀는 다시 예술가가 됩니다. 그녀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녀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발표된 이름은 그녀가 도와줬던 젊은 사람들, 바로 남자들이었습니다.

전부는 아니라도 많은 여자들이 바람직한 성적 대상으로서의 전성기가 지난 후에야 각광을 받았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여성 미술가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뉴욕 갤러리들이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작품을 훨씬 덜 다룬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 갤러리들의 절반을 여자들이 경영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작품을 다루는 곳은 시내 모든 갤러리의 20퍼센트 언저리에 머문다.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들도 나을 게 없고, 현대 미술에 대해 다루는 잡지들도 마찬가지다. 여성 예술가라면 누구나 남성 기득권의 음험한 확산에 맞닥뜨리게 된다. 거의 예외 없이 남성의 예술작품은 여성의 예술작품보다 훨씬 더 값이 비싸다. 달러가 말해준다. - p.118


아무 관심도 끌지 못했던 그녀의 작품은, 젊은 백인 남성 작가의 이름을 단 순간, 현대미술의 파격적 시도이자 깊고 다양한 의도를 지닌 훌륭한 예술작품이 됩니다. 남자의 모습을 한 페르소나는 전부 성공을 거둡니다. 그것은 그녀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것이 아니였고, 이름을 빌려준 젊은 백인 남성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의 작품이 아니였습니다. 장래가 유망한 그를 유명하게 해줬지만 동시에 그를 파괴시켰고, 수많은 비평가들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동시에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모습과 의도를 반영하기에 예술가의 것이지만, 동시에 예술가의 품에서 떠나 하나의 기표가 됩니다.

수수께끼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가 남긴 사진을 통해 그녀의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처럼, 시리 허스트베트는 타인의 가면을 쓰고 현대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한 작품을 발표한 여성의 숨겨진 삶을 추적하는 편집자의 관점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기괴한 현대미술들, 심리학, 생물학, 인문학, 다양한 질문들. 그녀의 사랑부터 모범적인 어머니의 모습, 아이들의 이야기, 홀로 완성된 존재였지만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았기에 완성되지 못했던 불완성된 그녀, 그렇기에 타인의 가면을 선택한 그녀, 그럼으로서 비로소 완성된 예술가라고 인정받게 된 존재. 그녀의 삶의 모습은 분명 그녀의 예술작품을 닮았습니다. 수많은 메시지와, 수많은 얼굴들, 누구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깊이를 지닌 '서양 미술의 역사'라는 거창함.

시리 허스트베트는 전작《내가 사랑했던 것》에서도 뚜렷하지 않은 정체성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이번 작 역시 그녀가 탐구하고자 하는 기억과 정체성의 이야기를 선사합니다. 해리엇의 예술작품처럼, 그녀의 작품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의 정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은, 마치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해리엇의 예술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평론가들이 젊은 천재 작가 같은 페르소나를 보고 비평했던 것처럼, 시리 허스트베트가 보여주는 방대하고 다양한 얼굴을 한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 소설같지 않은 소설, 깊은 통찰에 숨겨진 열쇠들을 하나하나 줍다 보면, 어느새 그녀가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열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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