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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의 탄생 -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진실
문영심 지음 / 시사IN북 / 2014년 10월
평점 :
우리 사회에서 오직 국가만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국가에 소속됨과 동시에 폭력의 권리를 국가로 이양하며, 그것은 현재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폭력의 체제입니다. 폭력을 국가에 위임하고, 힘의 논리가 아닌 법의 논리를 통해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법치국가에서 시민들은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에게 자신의 재산을 물리적으로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공권력은 언제라도 억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재자들이 폭력을 남발하던 70, 80년대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문영심은 국가 권력이 개인에게 저지른 무시무시한 폭력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세간에서 떠들썩했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입니다. 국가정보원에 의해 간첩으로 지목된 유우성씨는 탈북자 출신중에서 처음으로 서울특별시 계약직 공무원이 되며 모범적 사례로 인정받았습니다. 국회에서 세미나도 하고, 대학에서 강연도 했습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국정원은 유우성씨가 탈북자 명단을 만들어 북한 보위부에 넘겼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웠습니다. 유우성씨가 체포된지 12일 뒤 동아일보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이라며 보도해 간첩으로서의 유우성을 기정사실화했습니다. 국정원과 언론은 그렇게 간첩을 탄생시켰습니다.
법은 국정원의 폭력을 막지 못했습니다. 국정원은 불법 납치와 불법 구금을 자행했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했으며,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박탈했습니다.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행운이였습니다. 구치소의 사서가 유우성씨의 애걸에 못이겨 편지를 보낼 우표 2장을 주지 않았다면, 그는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간첩으로 인지되었을테고, 인생은 종말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천주교와 민변에 소식이 닿아 법적 투쟁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유우성씨보다 더 큰 희생자는 유우성씨의 친동생 유가려씨였습니다. 국정원은 유가려씨의 진술을 토대로 간첩을 만들었습니다.
찰스 디킨스는 독방감금이 세상의 어떤 끔찍한 육체적 고문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고 말합니다. 그 무서운 흔적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손으로 만져지지도, 느껴지지도 않기 때문이며, 상처가 피부로 드러나지도 않으며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비명을 지르게 만들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유가려씨는 어린 여성의 몸으로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 감금당했습니다. 그녀에게선 전신구타당한 정황이 보였고, 독방에 감금되었으며,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일체 단절되었습니다. 시간과 날짜 감각이 방해받았고, 수면을 방해받았습니다. 6개월간의 감금 생활은,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반인권적 심문 과정에는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이던 좌익효수도 있었습니다. 거짓 진술만 하면 오빠의 죄를 감해주고 한국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국정원의 속임수에 유가려씨는 굴복했습니다.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탈북자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는 것이 목표다. 그들을 한국에서 살 수 있게 적합 판정을 내리는 칼자루를 쥔 '국정원 선생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탈북자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면 절대약자인 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합신센터에서 신분이 취약한 탈북자들을 쥐어짜서 간첩 검거 실적내기에 이용한다면 그들이 목숨 걸고 찾아온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 p.359
법정에서 드러나는 유가려씨의 모습은, 국가권력의 고문이 얼마나 사람에게 치명적인지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많은 변호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유가려씨는 국정원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진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검찰과 국정원은 유우성씨가 간첩이란 여러 증거를 내놓았지만, 조작된 것들이었습니다. 길고 긴 법정투쟁 끝에 1심에서 유우성씨는 무죄를 선고받게 됩니다.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는건 사실상 처음인데, 유우성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자세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며 공권력에 저항한 덕분이었습니다. 검찰과 국정원은 항소했지만, 2심에서 중국의 공문서까지 위조한 범죄를 저질렀다는게 들통납니다. 검찰과 국정원, 외교부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겼고, 2심 역시 유우성씨의 무죄가 결정됩니다.
변호사들은 국정원이 개인의 삶을 파멸시키면서까지 간첩을 만들고자 했던 것은, 국정원의 국내 사건 수사나 정치 개입 금지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간첩이 많으니, 국정원 축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수사관을 오히려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냉전이 끝나자 자신의 존재의의를 입증해야 했던 비밀정보기관들처럼, 간첩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신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국정원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들고, 선거개입을 시도하고, 테러방지를 위해 자신들에게 권력을 달라고 외치는 모습은,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괴물의 슬픈 자화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