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매트 타이비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집안에 판사나 검사 한명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 결혼정보회사의 회원 분류 기준으로 알려진 '직업별 회원등급'을 보면 남성 회원 1등급은 판사, 2등급은 검사 라고 합니다. 이 등급표에서 명문대 출신의 대기업 입사자는 9등급에 불과합니다. 판사나 검사와 친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서글픈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피의자를 피고인으로 만들어 재판에 회부하는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검사, 형을 결정하는 판사와 알고 지내야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만큼 사법기관에 대한 불신이 기저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죄를 결정하는 것은, 하늘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며, 오직 사법기관입니다.

저자 맷 타이비는, 가난이 왜 죄인지 묻지 않습니다. 그는 부의 격차가 심해진 이 시대에 미국의 불의가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무전유죄는 우리사회에서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엔자이 사건들처럼, 미국에서도 억울한 판결이 이뤄지고 있으며 그 대상은 십중팔구 가난한 사람들, 소수인종들, 이민자들입니다. 경제적 궁핍은 원죄입니다. 맷 타이비는 빈곤이 심해짐에도 불구하고 폭력 범죄가 줄어드는 독특한 현상을 말합니다. 더 독특한 것은, 폭력 범죄가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는 사실입니다. 감옥은 강력 범죄자들로 채워지기보단, 갈수록 경범죄자, 사회적 약자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누가 들어가야 하는지를 정하는 결정은 사법기관이 합니다.

당연히 감옥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 중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엔론 분식회계 스캔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 수많은 범죄들이 발생했지만, 돈 많은 회장님들, 책임자들은 사법적 특혜를 받으며 책임을 회피합니다. 세계 금융위기의 책임은 다국적 금융그룹에서 지방의 소규모 은행에게 떠넘겨지고, 많은 화이트칼라 범죄들이 증거불충분으로 처리되며, 이런 범죄의 뒷처리는 세금을 통해 해결됩니다. 대기업이 벌이는 범죄를 건드리는데 있어서 전체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는 부수적 결과의 개념이, 수천,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이 죄 없는 직원들을 인간 방패로 삼아 형사 기소를 모면하려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S기업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은 공갈협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린스펀의 지적처럼, 강자들이 탐욕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엄청나게 많아지고 있습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 1128억 원 조세 포탈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현대 정몽구 회장 700억 원 횡령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SK 최태원 회장 1조 5000억 원 분식회계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두산 박용성 회장 289억 원 횡령에 분식회계 2000여억 원인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1000여억 원 횡령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그동안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국민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혹시 생각해본적 있는가. 다들 금액이 장난이 아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보자. 금액이 크면 형량도 커진다. 그래서 50억 이상 횡령에는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그런데 위의 예와 비교해보라. 그런데도 요지부동 집행유예 5년이다. 집행유예 기간은 1년에서 5년 사이다. 최대가 5년이다. 그래서 마치 집행유예로는 최고형을 선고한 것처럼 만들어놓았다. 엄벌에 처한 것 같다. 이게 기분 나쁘다. 법을 모른다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집행유예가 뭔가? 어차피 풀어주는거다. 결국 수천억 원 해먹어도 풀어주는 것, 이게 선고의 본질이다. -《서초동 0.917》p.133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 권력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경미한 위법행위 때문에 감옥에 갑니다. 인도에서 걷지 않고 서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를 당한 청년도 있습니다. 정부기관은 260억 달러의 금융 사기를 중범죄로 다루지 않으면서, 복지 급여 몇백 달러를 부정 수급한 자를 잡기 위해 해마다 2만 6천 가구를 수색하는데 노동력을 사용합니다. 막강한 변호인단, 오랜 시간동안 법정투쟁을 할 자금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 권력층의 범죄를 잡는 것은 수사기관 입장에서 피곤한 일입니다. 때문에 수사기관은 공원에서 자고있는 청년들, 야한 만화책을 보는 성인들, 불법복제물을 다운로드하는 네티즌들 같은 쉬운 먹이감들을 잡아 실적을 올리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1989년에 열린 레오나 헴슬리의 탈세 혐의 재판에서 코네티컷 그리니치의 방 28개짜리 저택을 관리하는 헴슬리의 수석 가정부는 법정에서 자신이 부유한 호텔 경영주와 나눈 대화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세금을 많이 내시겠네요?" 가정부가 이렇게 묻자, 헴슬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는 세금 같은거 안내. 하찮은 사람들이나 세금을 내지." -《치팅 컬처》p.197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미덕인 성공에 대한 야망은, 중요한 악덕인 일탈행위를 조장합니다. 성공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제는, 가능하면 공정한 수단을 사용하겠지만, 필요한 경우 나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압력을 행사합니다. 성공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올바르다고 여겨지게 합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주변엔 성공한 자들에 의한 지배가 올바르다고 피지배층이 여겨지도록 여러 가지 장치들이 존재합니다. 오늘날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의 지배는,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피지배층의 동의와 합의를 기반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대기업 회장님들이 저지른 범죄를 알고 있고, 그 범죄에 대한 형벌이 불공평하며 올바르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에 동의하며 인정합니다.

미국에서는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법률이 완전히 다르고 징벌의 수위도 완전히 다르다. 부자들은 늘 특혜를 받고, 가난한 사람들은 늘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한편으로는 약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격렬한 증오와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들을 향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 비굴한 숭배가 넘쳐난다. 너무나 무능하여 존경받을 자격조차 없는 부자라도 예외는 아니다. - p.427


저자가 지적하는 바처럼, 우리는 너무나 게으른 탓에 자주적인 통치를 포기하고, 이 사회를 관료제라는 자동 조종 장치에 맡겨 놓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관료제가 제공하는 사법 서비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겐 철두철미한 강철의 덫을 제공하며, 부자들에겐 각종 특혜가 담긴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큰 죄는 가난입니다. 사마천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10배 부유하면 헐뜯고, 100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1,000배가 되면 그의 일을 해주고, 10,000배가 되면 그의 하인 노릇을 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10,000배가 아니라 50,000배, 100,000배 넘게 돈을 버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노예 이하의 비굴함을 보입니다. 가난을 죄로 만드는 것은, 부가 옳다는, 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우리의 의식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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