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충성 - 충성과 배신의 딜레마
에릭 펠턴 지음, 윤영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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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충성을 봅니다. 전쟁터에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병사들, 이 회사의 제품은 뭘 내주더라도 사주는 고객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자신의 충절을 의심하지 말아달라며 문자메시지를 보낸 한 국회의원의 모습까지, 우리는 충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관계들을 만들어가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충성을 미덕으로 생각하며,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충은 효에 버금가는 최상급의 사회적 가치였습니다. 반대로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기피하며, 도덕적인 관점에서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계속 충성, 충성을 외칩니다. 군인들의 경례구호도 충성이며, 자기계발서들은 직장생활을 잘 하기 위해선 충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저자 에릭 펠턴은 이런 충성의 다양한 측면을 사유합니다. 저자는 충성을 관계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미덕이라 말합니다. 충성은 결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제공하는 복종이 아닙니다. 7개월만에 300km의 거리를 달려 주인 곁으로 찾아온 진돗개 백구의 이야기는 분명히 충성적이며,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미담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충성은 이리 쉽지 않습니다. 백구는 자신을 길러줬던 주인에게만 충성하면 되지만, 우리는 수많은 가치 중에서 충성할 대상을 선택해야 합니다. 때문에 충성은 순수한 선이 결코 아니며, 손쉽게 충성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충성은 가장 나약한 미덕이면서, 가장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충성을 쉽게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에 충성할 것인지 끝없이 고뇌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갤럭시냐 아이폰이냐 하는 문제라면 고민할 가치도 없지만, 가족을 선택할 것이냐 국가를 선택할 것이냐라는 상황이 온다면 답을 내기 힘듭니다. 언제나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할 수도, 언제나 국가를 최우선적으로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충성할 대상이 가족이 된다면, 그것은 반사회적인 가족이기주의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충성할 대상이 국가가 된다면, 전체주의의 망령이 부활할 것입니다. 충성에 서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충성이 가져오는 철학적 의문은 예로부터 많은 철학작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도덕적 의무가 충돌할 때 진짜 의무는 하나뿐이라고 주장한 칸트나, 어떤 선택을 해도 올바르다는 사르트르 등 많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이런 관계와 충성 속에서의 딜레마입니다.

세키젠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평화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상이다. 평화는 인간 최고의 이상이다. 일본은 평화를 사랑한다. 우리는 평화와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국가를 잊는다면 진정한 평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어버린다면 우리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방식에 관계없이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기는 해도 언제나 일본의 전쟁은 평화의 전쟁이다." -《전쟁과 선》p.125


결혼을 하는 것도 충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단순히 파트너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서약 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있어서 충성의 서열을 재배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성의 우선순위가 여전히 부모로 향한다면,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충성이란 관계의 혜택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기 때문에,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 친구가 진짜 충성입니다. 기업들은 충성의 매력을 깨닫고 충성 마케팅을 펴곤 하지만, 정작 충성고객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업으로부터 불리한 대우를 받습니다. 수십년간 SKT 인터넷을 쓰던 사람도 KT나 LG U+로 바꾸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SKT로부터 혜택을 다 받아내지 못합니다. 기업은 직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충성하는 직원들에게 잘해주지 않습니다. 승진하지 못해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충성스러운 직원과, 적절한 급여나 직급을 보상받지 못하면 경쟁회사로 옮길 직원중에 먼저 승진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충성의 관계를 가장 강조하는 곳은 역시 군대입니다. 전쟁을 해야하는 군인들에게 있어서 국가, 군대, 상관, 동료에 대한 의무가 충돌할 때, 병사들은 대부분 동료를 택합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서로에 대한 충성이 높다고 해서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 보고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둔한 미군 부대의 사기가 높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병사들이 계속해서 동료의 윤리적 위반행위를 묵인하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병사들은 전우와의 충성을 택한 대신, 민간인 학살, 고문 등 동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눈감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부그라이브 등의 사례를 보면서,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리더가 충성심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우에는 고민스러운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선,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대개 사악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옳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도덕적 불안을 충성의 힘으로 극복하려 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충성을 강요하는 사람일수록 거의 예외 없이, 충성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몰염치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영국의 군사이론가이자 역사가인 바실 리델 하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상사에게는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하에게 충성을 강요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 p.226


우리는 동료가 자신을 배신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충성의 관계에 있어서 공적인 것보단 사적인 것에 충성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경향은 내부고발자에 대한 안좋은 인식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면 해군의 군납비리를 고발한 내부고발자 김영수 소령은 해군과 동료를 배신한 사람으로 낙인찍혔고, 당시 정옥근 해군 참모총장은 국정감사에서 그를 맹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뒷날 정옥근 해군 참모총장은 해군복지기금을 횡령했고, 정보함, 고속함, 호위함 등 해군에서 나오는 모든 군사장비와 관련된 비리에 관여한 인간쓰레기인걸로 드러났습니다. 김영수 소령은 동료와 자신이 소속된 해군에 충성하는 대신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충성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많은 고뇌와 시련을 가져왔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우리는 행사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국가에 대해 공개적인 충성맹세를 하는 이런 행위는 오히려 진정한 충성을 훼손한다고 말합니다. 충성은 믿음을 소중히 여기는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어야지 단순히 의무의 규칙이나 억지로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정말로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맹세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국가나 조직에 충성하기 위해 하는 여러 행동들이, 정말로 진정한 충성과 연결되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충성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충성은 닫힌 사회에서 치명적인 악덕으로 부패하기도 하지만, 그 부패한 것을 정화시키고 열린 사회를 만들기 위한 행동력을 제공하는것 역시 충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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