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편의점과 러브 플러스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방송에서 말한 한 일본인의 말은, 어느 정도 진실성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편의점은 식당이면서 약국이고, 서점이자 은행이며, 파출소이자 우체국입니다. 편의점에서 김밥은 물론이고 치킨도 먹을 수 있으며, 사랑도 298엔이면 살 수 있고, 손톱깎이, 우산, 콘돔, 각종 가전제품들, 심지어는 외제 자동차와 요트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ATM기를 통해 돈을 찾을 수도 있고, 택배를 맡겨놓을 수도 있고, 편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루이비통 가게만 있다면 살아갈 수 없지만, 편의점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자 전상인은 24시간 내내 현대인들을 환영하는 편의점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봅니다.

유통 단계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는 편의점은 냉동 기술과 같은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등장했습니다. 프랜차이즈 방식을 통해 급속도로 증가한 편의점은, 전통적인 지역 소매상들을 대신해 새로운 시대의 소매상 기준을 제시합니다. 효율성, 계산성, 예측가능성, 통제성이라는 합리적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미덕들을 편의점은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편의점의 물건들은 판매정보관리시스템을 통해 관리되며, 판매량을 예측하고 통제합니다. 전통시장이나 대형마트에서 볼 수 있었던 호객행위도 편의점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소매상들, 구멍가게 할머니와의 대화도 편의점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비자는 편의점에서 오직 물건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소비 그 자체인 것입니다.

편의점은 원칙과 표준화가 지배하는 매뉴얼의 공간이다. 편의점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사물들 혹은 로봇 간의 기계적 관계를 방불케 한다. 거래 행위에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편의점 방문은 '쿨한'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도시적 심성에 적절히 부합한다. 일종의 '무관심의 배려'인 셈이다. - pp.83~84

미국에서 시작해 일본에서 크게 발달한 편의점은 세계화의 단편을 볼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현지화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같은 편의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 대만, 그리고 한국의 편의점은 지역적 특색을 갖추고 있습니다. 일본 편의점이 일본식 주먹밥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일본적인 상품진열과 목록을 갖추었듯이, 우리나라의 편의점 역시 우리나라 특유의 물건들을 팝니다. 더 나아가 편의점은 판매정보관리시스템 덕분에 지역에 최적화된 물건들을 파는 카멜레온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은 우산을 더 배치하고, 삼각김밥의 수요가 많은 곳은 삼각김밥을 더 배치합니다. 이런 유동적인 모습이야말로 편의점이 가지고 있는 최대 강점입니다.

현대인의 삶이 분열된 형태로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편의점 또한 링크화되어 전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골의 면 단위에도 서너개의 편의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울릉도와 마라도에도 편의점이 있습니다. 북한의 개성공단까지 진출한 편의점은 현대사회의 인프라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편의점은 어디에서나 소비주의를 홍보하는 광고판과 같습니다. 자동차를 무엇을 타느냐로 인간의 품격이 결정된다고 광고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기호를 소비하며, 기호를 소비함에 있어서 편의점은 최적의 장소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편의점을 통해 전국 어딜 가더라도 모 브랜드의 음료수를 마실 수 있고, 자신이 매일 피우던 담배를 살 수 있으며, 평소 즐겨 사용하는 모 브랜드의 콘돔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촛불 시위'때마다 주변 편의점들이 엄청난 특수를 누리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촛불집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잘못된 세상을 바꾸고 사회를 바르게 만들자는 것일텐데, 집회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일용할 자원과 무기는 주로 인근 편의점에서 집중적으로, 그리고 실시간으로 공급한다. 하지만 촛불을 든 사람들은 정작 그러한 편의점의 배후가 거대 자본과 자본주의 세계 체제, 혹은 신자유주의라는 사실을 미처 상기하지 못한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분노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과 그런 세상을 치밀하게 지배하는 자들의 기막힌 공생 혹은 태연한 공존의 현장, 바로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편의점의 현주소이다. - p.158

최저시급은 5,580원이라며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최저시급은 받으라고 말한 '알바몬 광고'가 유례없는 비난과 관심을 불러일으킨것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청년들과 그들을 주로 고용하는 PC방과 편의점, 그리고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편의점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고객들은 20대 청년과 30대 직장인들이며, 주요 판매물품들은 담배, 컵라면, 삼각김밥, 도시락 등입니다. 3천원 내외로 식사를 해야 하는 돈 없는 사람들, 시간 없는 사람들, 사회의 을들이 주로 찾는 곳이 편의점이라는 것을 통계는 말해줍니다. 그런 을들의 공간을 만드는 것 또한 을인 편의점 점주들이며, 을 중의 을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입니다. 을 중의 을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절반 이상이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73퍼센트가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며, 87퍼센트가 4대 보험 중 단 하나도 가입받지 못합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씨유, GS25, 세븐일레븐의 점포 점유율은 전체 편의점의 90.7퍼센트에 달합니다. 편의점 업계의 매출은 증가추세에 있지만, 정작 편의점 점주나 아르바이트생의 처우는 미래를 장담하기 힘듭니다. 편의점은 자본의 집적 및 집중의 증가 현상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양극화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편의점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소비하며 살아가는지, 그 소비를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제공하는지를 24시간 내내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편의점과 러브 플러스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 현대인의 외침은, 득도한 것처럼 욕망을 억제하며 살아야만 하는 젊은 세대의 말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입니다. 편의점을 가장 많이 애용하는 사람들은, 편의점만 있으면 충분한 사람들이 아니라, 편의점밖에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