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쁜 엄마입니다 -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
양정숙.고혜림 지음, 허달종 그림 / 콤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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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장애인 복지 시설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위를 하던 그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 옵니다. 당신의 자식이 사고를 당해 장애가 생겼다는 전화였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앞에는 휠체어를 탄 자식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제 장애인 복지 시설을 찬성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반전을 기반에 둔 블랙유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장애인 시설이 생기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애인 시설을 반대하는 사람의 가족 혹은 친척, 혹은 친한 친구가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장애인의 총수는 102만 9천명으로, 이중 88.1%인 91만 명이 교통사고, 산업재해, 불의의 사고 등의 이유로 인해 후전적으로 장애인이 됩니다. 우리나라 인구 50명 중 1명은 장애인입니다. 저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누군가에겐 현실입니다.

김종대가 언급한 것처럼, 한국 사회는 소수 약자와 피해자에게 굉장히 가혹합니다.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들을 멸시하고,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모욕합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선 남자 가해자들이 강간한 것은 강간 피해자가 꼬리를 쳤기 때문이므로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소수 약자와 피해자에 대한 과한 증오는 사람들의 불안감에 기인하는지도 모릅니다. 뒤늦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닫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다수의 흐름에서 잠깐이라도 멀어져 자신이 소수 약자가 될 경우 증오의 화살은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장님을 꿈꾸며 노동자를 멸시하는 노동자들이 되었고, 완전한 평범을 꿈꾸며 소수자성을 혐오하는 소수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같은 인간'으로 본다는 것은 그가 생물학적 인간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나의 동료'로 삼을 수 있느냐 여부이다. 나의 동료가 아니라고 했을 때, 여기서 '나'란 누구인가. 그 '나'란 성적 소수자는 물론 아니며, 오히려 모든 '인간종'을 심판하는 아무 결함 없는 (즉, 아무 '소수자성' 없는) 나이다. 그는 유색인도, 장애인도 아니고, 실업자도 아니고, 불임증과 선천적 질병이 있는 사람도 아닐 것이고, 물론 남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묻는다. 왜 수많은 소수자들 혹은 '소수자성'을 가진 '내가' 완전무결한 '그'의 동료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소수자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성적 소수자의 인권》p.40

한 소년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재수 없다.", "더럽다.", "병 옮긴다.", "물 더러워진다." 였습니다. 이 소년은 더럽지도,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병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물이 더러워지는건 이 소년이나 다른 사람이나 별반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이 소년에겐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이 소년과 어머니는 재활 치료로서의 수영을 원했지만, 수영장에서 매번 쫓겨났습니다. 때론 수영장을 6시간씩 청소해주는 대가로 수영장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명백한 차별이었고, 불법이었습니다. MBC 다큐멘터리『휴먼다큐 사랑』에 나왔던, 세진이와 그의 어머니 양정숙씨의 이야기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없었던 세진이는 친부모가 길에 버린 아이었습니다. 양정숙씨가 그런 세진이를 입양해서 키우기로 결심한 것은, 정말로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세진이는 양정숙씨를 처음 봤을때부터 각인효과에 걸린 오리처럼 잘 따랐고, 양정숙씨 역시 주체할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감만으로 살기에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다리가 없는 세진이에게 있어서 최대의 불편은 다리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딜 가도, 지나가던 사람들은 꼭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들을 합니다. 사람들의 멸시는 의족을 사용하기 위해 받은 수번의 수술이나 재활운동보다 아픈 것이었습니다. 양정숙씨는 세진이가 대한민국에서 장애를 가진 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쁜 엄마'가 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즐길 권리를 장애인인 세진이가 얻기 위해서는 사회가 주는 온갖 상처를 자신이 맞아 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세진이는 삶의 목표를 일찍 찾았습니다. 재활 치료로서의 수영을 즐겁게 받아들여 수영선수로의 길을 간 것입니다. 수영장을 찾는 것도, 코치를 구하는 것도, 대회에 참석하는 것도 모두 보통의 수영선수보다 고된 길이었지만, 세진이는 훌륭한 결과로 보답했습니다. 각종 장애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400미터 자유형에서 세계 랭킹 1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고, 16살에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방송에 출연하면서 후원금이 들어왔고, 국내강연과 TED같은 국제강연에서 초청도 받았습니다. 세진이가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자 생모라고 주장하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수십명에 달했습니다. 모두 후원금을 노린 사기꾼들이었습니다. 장애인을 혐오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보란듯이 성공한 세진이의 이야기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전해줍니다.

우리 사회는 차별을 학습시키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일반 사람보다 급이 낮다는 편견을 정보로서 입력받고, 장애인을 차별하고 무시해도 된다고 학습합니다. 장애인에게 위해를 가하더라도 괜찮다는 강화 단계에 이르러서 우리 사회는 폭력 사회가 됩니다. 세진이와 나쁜 엄마는 이런 사회를 이겨냈고,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든 장애인 가족들이 세진이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양정숙씨처럼 나쁜 엄마가 되기도 힘들고, 더한 고통을 이겨내더라도 세진이같은 성공을 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세진이와 나쁜 엄마의 기적같은 이야기는 분명 감동적이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야기에 감동받는 사회가 아니라 이야기가 필요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즈음 항독전선에 참여했다 죽은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의 말에 저는 끌렸습니다. 불행한 인간에 대해 깊은 주의를 갖고,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힘을 가졌는가의 여부에 인간다움의 자격이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말의 정의》p.14

윌리엄 피터스가 쓴《푸른 눈, 갈색 눈》에 등장하는 제인 엘리어트의 실험은, 차별은 사회가 학습시키는 것이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엘리어트는 차별을 이해하고 막기 위해선 차별하는 가해자와, 차별당하는 피해자 입장을 모두 경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엘리어트의 수업을 들은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비교했을 때, 엘리어트의 학생들이 덜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장애인과 일반인이 한 교실에서 함께 수업 받는 통합교육을 실시합니다. 우리나라도 통합교육이 첫 걸음마를 떼려 하고 있지만, 아직 대부분은 특수학교란 이름의 장소에 격리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자신과 다른 자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 다름에 대한 다수 집단의 반응인 것입니다. 다수 집단의 구성원이 다름을 부정적으로 보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는 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계속될 것입니다.

장애인 복지 시설을 소재로 한 블랙 유머를 살짝 바꿔 보면 어떻게 될까요? 장애인 학생이 자신의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며 날뛰는 학부모가 있었습니다. 학부모의 항의 때문에 장애인 학생은 이사를 갔고, 그 학부모의 아이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학부모는 병에 걸려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장애인이 된 학부모를 봉양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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