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여행 - 내가 꿈꾸는 강인함
정여울 글.사진, 이승원 사진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이국적인 것을 찾아서, 풍경이 주는 위대함을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은 직접 떠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때론 따뜻한 거실에 있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여행의 쾌락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KBS의『걸어서 세계속으로』, EBS의『세계 테마 기행』같은 여행 프로그램만 봐도 여행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이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새로운 호기심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직접 가봤던 곳이라도 다른 사람의 렌즈를 통해 색다른 여행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낯선 땅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며, 작은 것에서도 더 큰 위안과 더 큰 재미와 더 큰 감동을 느낍니다. 여행이란 단어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오늘날 매일 치열하게 일해야 하는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순간의 휴가 그리고 여행은, 노동이 가져다주는 최후의 안식처로 인식됩니다. 18세기 이후 부유한 계층이 여행과 관광을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특정 지역이 휴양지로 만들어졌습니다. 기차와 비행기의 발달로 여행이 대중화되었고, 여행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서 소비주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여행의 본질은 개인의 만족감을 채우는 것이라는 풍조가 공고해지면서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빛을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우리는 여행에서 화려한 성, 박물관, 호텔, 번화가, 유적지, 맛있는 음식들을 만납니다. 때문에 우리의 여행은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가 간 여행지는 실존하는 지역이자, 이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입니다.

좋은 점만 보고 결혼했다간 나중에 후회하는 것처럼, 우리는 빛을 보는 만큼 그림자를 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여행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경복궁, 명동, 남산을 가고 호텔에서 한식을 즐기며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는 것만으로 한국을 여행했다고 말한다면, 한국이라는 대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경험입니다. 그림자 여행은 내키지 않는 여행이며, 찾기 힘든 여행입니다. 좋은 것만 보며 살기에도 삶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평상시 해볼 수 없으면서도 즐거운 것을 찾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림자 여행은 순례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림자 여행은 엄연한 여행입니다. 다만 현대인들이 잊어버린, 혹은 의식적으로 잊고자 하는 여행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이런 여행을 꿈꿀 수 있다. 하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누구의 도움에도 기대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야생의 길을 완주하는 것. 몇 달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작은 텐트 하나에 온몸을 의지한 채, 오직 '자연과 나' 외에는 어떤 만남도 기피하는 그런 여행. 여행이라기보다 고행에 가까운 여정. - p.337

그림자를 마주봄으로써 비로소 빛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저자 정여울은 말합니다. 저자는 50개의 글, 50개의 사진을 통해 50개의 그림자 여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그림자는 자신에 대한 그림자이면서, 사회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이 그림자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에서 든든한 동반자는 바로 책입니다. 헤르만 헤세, 남재일, 빅토르 위고, 조지 오웰, 박노해, 괴테, 루소 등 수많은 동반자들과 함께 정여울 자신의 그림자를, 한국 사회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여행엔 일반적인 여행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화려함과 편안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멋들어진 음식도, 어떤 나라에 간 여행객이라면 무조건 들려야 한다는 필수 관광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사유와 진실됨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여행을 떠납니다. 친구들끼리 정기적으로 즐기는 스포츠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자식이 있다면 놀이동산이나 동물원에, 연인이 있다면 꽃놀이 여행을 갈 수도 있습니다.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한 여행도 있고, 취업을 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지는 않지만 억지로 가는 국토대장정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여행은 언제라도 갈 수 있습니다. 저자는 한 번쯤은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여행을 떠나보라고 권고합니다. 사회의 그림자를 향한 여행이 부담스럽다면 자신의 그림자에 대한 여행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림자 여행은 큰 돈이 필요한 여행도 아니고, 멀리 나가야 하는 여행도 아닙니다. 어떤 여행회사도 이 여행계획을 만들어 줄 수 없으며, 어떤 유명 여행지도 여행의 목적은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