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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적은 여자다
필리스 체슬러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자신과 공통점이 있는 것들에 대해 친밀감을 느낍니다. 민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외국에서 조국의 사람을 만나거나,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면 왠지 반가움을 느낍니다. 같은 게임을 하거나, 같은 책을 보거나, 같은 가수를 좋아한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 결과는 이사를 할 때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도시를 선택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친밀한 소속감을 원하고자 하는 사람의 성향은 여자와 여자간 관계에서도 비슷한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같은 성이기에 서로 많은 것을 이해해주고, 듬직한 친구관계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감입니다. 특히나 걸핏하면 서로 싸우는 청소년기의 남자들을 보고 있자면,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비밀의 화원은 대단히 지적이고, 교양있는 공동체로 인식됩니다.
제 1차,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참상과, 과도한 생산과 소비가 낳은 환경 파괴는 남성성의 부정적 특징으로 인지되었고, 이에 대해 글로벌 자매애라는 페미니즘의 비전은 새로운 시대의 사상으로서 여성스러움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평화, 자애, 친자연적 가치는 모성이라는 이미지 아래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성성에 대한 이미지, 기대와 실제 여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필리스 체슬러는 원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의 여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경쟁하는 여자, 투쟁하는 여자, 여자를 공격하는 여자들입니다. 체슬러는 여자들도 남자들과 똑같은 능력과 똑같은 욕망과 똑같은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자들은 남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명백히 말하면 소녀가 소년들과 다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소녀들이 소년들보다 더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여자들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동정심과 잔인성, 협동심과 경쟁, 이기심과 이타심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여자들의 공격성이 관측되기 힘든 이유는, 경쟁방식의 차이에 있습니다. 남자들은 공개적인 경쟁을 벌이지만, 여자들은 간접적인 형태로 경쟁을 벌입니다. 소년의 무기는 신체지만, 소녀의 무기는 언어입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간접적이고 비육체적인 형태의 공격을 하는 법을 배웁니다. 성인이 되면 어린 시절과 같은 싸움은 용납되기 힘듭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그런 성향이 더 강합니다. 여자들은 위험이 덜하고 부상을 덜 입는 접근 방식의 하나로 간접적인 공격을 취하도록 문화적으로도 훈련을 받습니다.
세라 블래퍼 허디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과 영장류 암컷이 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동적인 동물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 고 지적했다. 그녀는 영장류 암컷이 어떻게 그들 나름의 전략을 구사하는지, 그리고 영장류 암컷의 사회적 관계가 집단의 역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했다. -《센스 앤 넌센스》p.144
여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공개적인 경쟁, 직접적인 경쟁, 신체적인 공격이 감정적으로 위험한 것일 뿐 아니라 공격을 한다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말은 남자에게 허락된 특권입니다. 때문에 여자들은 에로틱한 욕구나 공격적인 욕구를 강압적으로 눌러야 합니다. 여자들은 자신의 공격적인 본성을 누름으로써 많은 이점을 누립니다. 공격적인 본성을 숨기는 여자들이 남자들 사이에 더 가치 있는 짝으로 인식되고 여자들의 사교집단 안에서도 더 유쾌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자신들의 공격성을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에 간접적인 형태로 풀어놓습니다. 여자들의 공격과 적의, 폭력과 잔인성의 주요 표적은 다른 여자들입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덜 적대적이고 충돌을 빚는 성향이 덜하다고 단정해야 할 논리적 근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소녀들은 다른 사람을 안전하게 공격하는 방법이 그 사람의 뒤에서 공격하는 것이라는 점을 학습합니다. 그래야만 공격의 표적이 된 사람이 그 공격이 누구의 짓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자들은 끊임없이 소문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며, 육체적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고도 싸울 수 있습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육체적 폭력의 사용을 피한다는 것이 갈등을 의미 있고 영속적인 방식으로 풀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회피이며, 집단이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들만 모인 파벌 집단은 그 안의 여자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런 파벌 집단은 자신들보다 더 아름답거나 똑똑하거나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자면 누구든 경계합니다.
여자에 대한 여자의 적의는 또한 낮은 자신감, 낙관적인 태도의 결여, 내면에 대한 통제력의 부족, 신체에 대한 높은 거부감, 자아의 상실, 여자들이나 남자 파트너와의 친밀한 관계의 부족, 여자들과 함께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 여자들과의 치열한 경쟁 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폭력의 측면으로 넘어가면 그런 적의가 강간과 성희롱을 둘러싼 신화들을 쉽게 수용하게 만들고 개인간의 폭행을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 p.156
연구조사 결과 소년들은 자신의 집단에서 친구들이 자기보다 뛰어나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단의 누군가가 승리를 거두면 그 집단의 다른 소년들도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때문에 특정 구성원의 활약은 집단을 더 강화시킵니다. 때문에 남자들의 경우 서로 잘 알지 못하고 좋아하지 않을 때조차도 힘을 합쳐 인명을 구하거나, 사업을 운영하거나, 전쟁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반면 소녀들의 집단은 상호 호혜를 요구하고 있으며, 구성원 간에 지위가 조금의 변화라도 일어나게 되면 위협을 강하게 느낍니다. 여자들 사이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평등을 바탕으로 한 신뢰입니다. 집단에서 한 여자가 혼자 활약한다면, 그것은 집단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가부장적일수록, 여자를 억압하는 사회일수록 여자들은 더 은밀하고 어두운 형태로 여자들을 공격하며, 여자들이 서로에게 입히는 상처도 더 커지게 됩니다.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복종하고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의존하는 태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여자들끼리의 공개적인 경쟁은 금기시된다고 학습됩니다. 원칙적으로는 거부되지만 현실 속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경쟁이 여자들에게 훨씬 더 심각한 상처를 남기며, 그 상처는 훨씬 더 치열하고 파괴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런 사회에선 성폭행을 당한 여성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여성인 경우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익이 낮은 나라일수록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싸우기보단 노동자들끼리 패를 갈라 싸우는 것처럼, 여성의 인권이 무시되는 나라일수록 여성들은 남성의 성차별적 가치관을 습득해 여성들 스스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투쟁합니다.
여러 구조를 지닌 기업에서의 연구 결과는 환경이 여자들의 공격성을 배출하는 방법을 바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성 지배적인 조건에서는 여자들이 서로에게 거칠게 구는 반면, 지배층이 동등하거나 여성 지배의 조건에서는 여자들끼리 거칠게 투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구조의 정상 부분에 여자들이 더 많아지면, 여자들은 다른 여자들을 더 공정하고, 더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즉 여자가 여자를 공격하는 이유는, 여자들이 동족을 혐오하는 어리석은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 여자들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극히 적은 남자 위주의 지배구조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남자들만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갖추었을때, 여자의 적은 남자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에서 여자의 적은 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