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번역출판의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연도에 따라 어느정도 차이는 있지만, 출판시장에서 번역서의 비중은 전체 도서의 25~30%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학습지처럼 번역서가 전무한 경우도 있지만, 만화, 자연과학, 철학의 경우 다른 장르보다 번역서의 비중이 높습니다. 전체 도서의 50%가 번역서인 장르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출판환경에서 번역자는 작가만큼 중요하며, 번역의 질은 출판문화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규칙을 가지고 있는 언어를 전환시켜야 하기 때문에, 번역은 그 특징상 논란의 대상이 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매우 어려운 분야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어머니'로 번역하다가 '엄마'로 번역하는가 하면, 제임스 조이스의《피네간의 경야》처럼 번역됬지만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천황이냐 일왕이냐 덴노냐 하는 문제처럼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정치적 입장을 보일 수도 있고, 귀여니의 소설을 중국 번역자가 번역한 것이 귀여니 소설의 작품성을 잘 살린 것이냐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존댓말과 반말이 있는 언어와 없는 언어를 번역할 때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있으며, 최근에 있었던《이방인》번역 논란처럼 번역이 작품 전체의 뉘앙스를 바꿔버렸다는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좀 딱딱하지만 원어의 구조와 표현을 살려줄 것이냐, 아니면 독자가 사용하는 언어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문장을 사용할 것이냐는 두 가지 번역에 대한 태도는 나라마다 다릅니다. 번역서의 비중이 낮고 영어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영미권 출판사의 경우 의역을 선호하는데, 체코 작가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거리, 다리, 사람 이름을 전부 영어식으로 바꿀 정도로 자국화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일본의 경우 문학작품은 의역을 선호하며, 자연과학서와 인문, 사회과학서는 직역을 선호합니다.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로 자국의 언어표현을 선택하는 것은 역자의 자율성 문제이기 때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직역주의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책 앞에 실린 작가의 감사의 글까지 빼놓지 않고 번역을 하는데, 이 부분은 사실상 책의 내용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정도까지 원작을 중요시할 필요는 없다고 보입니다.

복주(覆奏), 부서(簿書), 함사(緘辭)처럼 두꺼운 국어대사전에도 안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놔둔 번역은 엄격하게 말하면 번역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 p.30

저자는 우리나라 번역의 지나칠 정도의 원문 지향적인 태도를 지식층의 숭배에 가까운 외국어 선호경향에서 찾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한문이 지식의 중심일 때는 한문을 읽으면 됬고,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어가 지식의 중심일 때는 일본어를 읽으면 됬기 때문에 한글로의 번역 필요성이 적었고, 번역하더라도 원어 중심의 번역을 선호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어의 영향력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해방 이후 서양의 서적들을 번역할 때 일본어로 번역된 책들을 통해 중역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영한사전을 만들때도 영일사전을 중역할 정도였습니다. 영어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존중은 번역에 있어서 영어의 느낌 그대로를 살리는데만 집중하게 했습니다. 저자는 논문이나 과학서 뿐만 아니라 아동용 도서에서마저도 '현실 정치'란 번역을 굳이 '현실 정치(real politics)'라고 불필요하게 번역해줄 정도로 외국어를 대접하는 관행이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어 실력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인상적인 부분은 직역 번역문을 많이 접하면서, 한국어 사용자들이 점점 직역 번역문에 익숙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책에도 직역 번역문의 자취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책장에서《현대자동차에는 한국 노사관계가 있다》는 책을 펼쳤더니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자동차(현대차) 노사관계는 한국 노사관계의 유형설정지(pattern setter)라고 말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번역문의 구조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지만 언어의 구조와 규칙은 점점 외국어, 특히 일본어와 영어 구조로 사고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영어 5형식을 기반으로 수많은 영어 문장을 학습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에겐 영어 구조로 언어를 사고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번역을 할 때 결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직접 갈 수 없다. 사전을 이용한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항상 현실 세계를 거쳐서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가야 한다. 각 언어는 현실 세계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와 직접적으로 비슷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언어의 종말》p.482

저자는 과도한 직역주의와 수많은 번역문을 접하게 되는 것이 한국어의 개성 상실에 이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직역 번역문에 익숙해져간다면 추상 명사가 주어나 목적어 자리에 오는 것을 꺼리고, 능동태가 더 자연스러우며, 대명사를 잘 활용하지 않는 규칙 등 듣기에 자연스러운 한국어의 개성이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번역서가 아닌데도 외국어 규칙을 기반으로 한 한국어를 쓰는 한국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고, 독자들도 그것이 부자연스럽다는것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저도 수많은 직역 번역문을 읽고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직역의 경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자는 직역 위주의 현실에서 균형을 잡아줄 한국어의 개성이 살린 의역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독자들이 번역서를 통해 원하는 것은 '뿅가죽는'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