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
엘리자베트 바뎅테 지음, 최석 옮김 / 인바이로넷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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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여성이 하지 못하는 일이란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과거 남자들의 일이라고 여겨졌던 광부나 건설노동자는 물론이고 군인마저도 여성이 참여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기술의 발전, 민주주의의 등장 등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여성의 권리는 비약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것은 곧 오랜 세월 동안 사회를 지배하던 체제인 가부장제가 붕괴할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여성의 도전에 남성들은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해왔고, 두려워했습니다. 엘리자베트 바뎅테는 남성이 두려워하는것, 그것은 여성성이었고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배척해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 두려운 여성성이 여성 속에 있는 여성성이 아니라, 남성 속에 있는 여성성이라는 것입니다.

왠만한 욕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남자들도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너는 여자같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여자같다는 말은 외형적인, 생물학적인 개념에서 여성이 아니라, 문화로서의 여성성을 의미합니다. 가부장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지배 체제에서 남성이 남성취급을 받지 못하고 여성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삽입 당하는 것, 소유 당하는 것, 성적 객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남성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고 여성성을 부정해야 했습니다. 어릴적부터 오줌 멀리싸기와 같은 남성성을 과시하는 남성들은 과격한 행동, 여성 멸시, 근육질 몸매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평생동안 남성성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남성들은 두 가지 형태의 여성성을 증오하는데, 하나는 여성이 지닌 여성성에 대한 증오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이 지니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증오입니다. 이 남성의 여성성은 곧 여성적인 남성, 동성애를 의미하며 동성애 공포증, 호모포비아로 이어집니다. 여성화된 남성을 통하여 일반 남성들은 자신들이 허약성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들, 즉 수동성이나 민감한 감수성 등의 여성적인 특성들이 자신 내부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동성애 공포증은 자신이 본래 갖고 있는 동성애 욕망에 대한 은밀한 공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로랑 베그의 실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인 남자들을 불러서 동성애 관계를 다룬 영화들을 보여준 결과, 그런 영화를 보면서 발기를 경험할 확률은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폭력에 의한 지배도, 권력에 의한 지배도, 경제력에 의한 지배도 아닌 성에 의한 지배. 게다가 지배를 받는 쪽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지배. 즉 공포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쾌락에 의한 지배야말로 궁극적 지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의 정석에는 이러한 '쾌락에 의한 지배'가 들어가 있다. 그 이유는 포르노그래피가 포르노 소비자인 남성에게서 모든 사회적인 속성을 제거한 뒤 다시금 남성성을 회복시키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근은 쾌락의 원천으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p.130

여성성에 대한 증오는 여성에 대한 증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증오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부모에게서 출발해 부모에게서 떠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를 위해 부모를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성에 대한 증오가 강하게 이어지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양육은 전적으로 여성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는 어머니의 영향력에서만 성장하며, 부성애의 부재는 남성에게 더 치명적입니다. 남성은 어머니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면서도 자신의 여성성을 상처입혀서는 안됩니다. 남성의 여성성은 비록 사회적인 이유로 인해 숨겨야 했지만 없애선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제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등장은 결국 새로운 남성성의 필요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변혁기의 모든 것들이 그러했듯이, 이러한 요구는 다양한 형태의 반발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성들을 성적으로 갈망하면서도 결코 한 여자에 집착하지 않는 남자, 남성 동료들을 시합이나 전쟁 또는 스포츠에서만 만나는 사나이, 여성적인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냉혹한 남자 같은 하드보일드하고 터프한,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던 남성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대부분의 사회가 이러한 남성의 이상을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은 남성성의 전통적인 모델이 쇠퇴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남성은 더이상 여성을 지배하는 객체도 아니고, 남성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여성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 사고되는 문화도 아닙니다. 때문에 새로운 남성들은 자신의 여성성을 받아들이는 변화를 보일 것이라고 엘리자베트 바뎅테는 지적합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순전히 외향적인 사람이나 순전히 내향적인 사람 같은 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런 사람은 정신병동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순전히 남성성만을 지닌 남성, 순전히 여성성만을 지닌 여성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정신병동에 있을 것입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포용하는 것. 그것은 어려워 보이지만, 어렵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남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여성성을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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