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기업 - 일본을 먹어 치우는 괴물
곤노 하루키 지음, 이용택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지난 10월 계약직 여직원이 엉덩이를 만지고 허리를 쓰다듬는 등의 성추행을 당하는 바람에 3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성추행, 성폭행 사건이 알려지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청춘들이 성추행, 성폭행, 잦은 야근 같은 불합리한 일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17개월의 수습사원 기간을 버티고 정규직 전환을 앞둔 직원에게도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담당검사는 가해자의 업무상의 위력을 입증할 수 없다며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내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회사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아파도 청춘이니까 참으라는 메시지를 남긴 힐링계 자기계발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내놓은 출판사였습니다.

청춘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불합리한 일들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사의 이익을 위해 그 약자들을 쥐어짜서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온 단어로, 그런 기업들을 ‘블랙 기업’이라고 합니다. 저자 곤노 하루키는 일본에서 POSSE라는 NPO단체를 이끌며 1,500여 건의 노동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는 블랙 기업들이 수많은 청춘들을 망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일본에 큰 해악을 끼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외견적으로 그 기업들은 일본의 희망, 일본을 이끄는 기업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이익을 내는 기업들입니다. 그러나 그 눈부신 성공과 경영성과는 청춘들을 갈아 만든 피로 이룬 것입니다.

블랙 기업은 위법적인 고용 형태로 청년들을 일회용품처럼 쓰다 버리는 기업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청년 직원들을 대량 고용한 뒤 장시간 근무와 부조리한 명령으로 혹사시키는데, 도태된 사람들은 퇴사하거나 심한 경우 자살을 선택합니다. 블랙 기업은 신입 사원을 비용 낭비라고 생각하는 회사, 대량 채용 후 대량 퇴직으로 직원을 선별하는 회사, 권한도 없는 이름뿐인 직급을 주는 회사, 연봉을 과장하는 회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기업들을 인지시킬 수 있는 단어가 아직 사용되지는 않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취업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취업 커뮤니티에서 자주 채용공고를 내는 기업은 가지 말라는 조언만 봐도 블랙기업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청년노동의 주요 프레임은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블랙 기업은 비정규직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정규직 전환 채용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문제이며,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취업전쟁에서 승리한 정규직 신입직원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회사는 이들을 장시간 노동을 시키고, 청춘이 조금이라도 힘들어한다면 버려버립니다. 이들을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청년 실업자들이 대량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블랙 기업에게 대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 세대는 가치가 매우 낮은 인력이며, 대체 인력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청년 노동자는 쓰고 버리는 재고에 불과합니다. 이런 대량 자원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블랙 기업의 인사 관리가 성립합니다.

예전에는 노예가 비쌌다. 그래서 노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를 돌봐야 했다. 요즘에는 몸값이 싸다. 노예들이 너무 많아서 더는 쓸모없어진 노예는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일회용 인간이다. -《일회용 사람들》

대량 모집 후 자체 선별을 거치고 마음껏 쓰고 버리는 블랙기업의 전형적인 고용 패턴은 비정규직, 정규직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만 정규직의 경우 더 우수한 인재를 모을 수 있는 반면 버리는 과정이 조금 더 번거롭습니다. 비정규직은 그냥 해고하는 반면, 정규직은 자진 퇴사를 유도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를 위해 사내 괴롭힘을 실행합니다. 식사시간에 따돌리고, 책상을 엉뚱한 데로 옮겨놓고, 다른 직원들 앞에서 강제로 코미디를 해야 하는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괴롭혀 자진해서 퇴사할 것을 강요합니다. 쉽게 퇴직을 선택하기란 힘들기 때문에 노동자는 처음엔 버티지만, 결국 자진해서 퇴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 퇴사하거나, 정신병을 얻고 늦게 퇴사하는 차이는 있습니다.

1부 상장 외식 업체인 다이쇼의 24세 남성 정규직 직원이 입사 후 불과 4개월 만에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남성은 월평균 112시간의 잔업을 했다.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11시까지 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한다. 출퇴근 시간을 빼면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는 셈이다. 당연히 산업 재해로 인정받았다. - p.77

이런 블랙 기업은 중소기업, 중견기업부터 누구나 선망하는 대기업까지 존재합니다. 블랙 기업이 직원들을 쥐어짜는 것은 결국 이윤 때문입니다. 사회에 널려있는 청년들이란 자원을 누구보다 빨리 빨아먹고 버림으로서 경영 이익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피폐해지는 청년들에 대한 대책은 사회적 비용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기업들은 사회에 비용을 전가하고 이익만 가져가는 무임승차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계와 재계는 고용유연성을 주장하며 고용 규제를 완화하고 비정규직을 늘려야 한다는 논의가 주류입니다. 이들은 탄력적인 근로시간을 도입한다는 취지하에 근로시간의 조정 권한도 기업에 넘겨주고, 쉽게 만들 수 있는 시간제 일자리 정책만을 내놓습니다. 이런 흐름의 한편에선 취업난의 문제는 청년들에게도 있다는 류의 자기계발서와 주장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저자는 청년 비정규직이 증가하는 문제가 결코 청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블랙 기업에 대한 저항이 일본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형 규동 체인 스키야의 집단 퇴직 사건은 주목할 만한 일 중 하나입니다. 스키야의 가혹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을 감내하던 노동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집단으로 당일에 퇴사함으로서 회사에 저항한 것입니다. 스키야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블랙기업적인 요소를 개선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은 곧 한국에도 유행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블랙기업에 대한 논의도 이제 일본에서 넘어와 한국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최근 청년유니온과 민주노총은 한국의 블랙기업을 알려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첫 시작은 그런 기업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일입니다. 언어적으로 인지한 뒤에야 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블랙기업의 사례는 한국 노동자들에게도 생소한 일은 아닙니다. 한달에 25일 출근, 하루 12시간 노동, 절반 이상의 노동자들이 월 200만원도 벌지 못하는 현실 등 가혹한 노동환경에 대해선 자랑스럽게도 일본에 뒤쳐질 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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