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안해도 되는 직업
최혁준 지음 / 라임위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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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가장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름 못지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직업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삼분의 일, 혹은 절반을 직업인으로서 살아가기에, 직업은 사람에게 있어서 제2의 아이덴티티가 됩니다. 때문에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만큼 중대한 일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자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아니말 라보란스라 불리는 것으로, 굴레를 짊어진 짐승처럼 매일 고된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아렌트는 아니말 라보란스의 대표적인 존재로 아이히만을 지적했는데, 아이히만은 자신의 일이 되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 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았고, 누구를 죽일 어떤 의도도 없었으며,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지만, 결국 그가 한 행동은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에 넣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렌트는 다른 부류의 노동자로 호모 파베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호모 파베르는 베르그송에 의해 창출된 말로,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노동을 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야 하는 존재로 보는 인식입니다. 아렌트는 호모 파베르에서 공동의 삶을 만드는 인간의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호모 파베르 노동자는 물질적인 노동과 행위를 판단하는 존재로, 아니말 라보란스보다 상위의 존재입니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 역시 호모 파베르를 구체적 실천을 통해 생명을 만드는 존재로 인식하며, 현대 노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지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말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 호모 파베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하라고 외쳐도,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해도, 우리는 대부분 아니말 라보란스가 됩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연봉, 사회적 인지도 등에 높은 가치를 두고 직업을 선택합니다. 물론 연봉, 사회적 인지도는 객관적으로 정형화될 수 있는 기준이라는 면에서 무시할 만한 가치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밖에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초, 중, 고등학교 때부터 동일한 교육을 받고, 대학교는 성적순으로 학과에 배정됩니다. 수능 1등을 한 학생이 의과대학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당연하게도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서 선행되어야 하는 물음, 나 자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쉽게, 아무 생각 없이도 판단할 수 있는 기준, 연봉과 사회적 인지도에 따라 직업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대부분 실패합니다.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일단 취업하고 보자는 청년들이 증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취업되는 곳의 일을 하게 됩니다. 신입직원을 뽑을 때 경력직을 선호하는 경향도 이런 현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일단 취업해서 어떤 일이던 1년, 혹은 3년만 일하면 경력직으로 다른 일을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입직원 4명 중에 한 명은 1년 내에 퇴사를 합니다. 다급히 선택한 직장의 연봉이나 환경 때문에 퇴사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연봉과 인지도가 괜찮은,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간 직원들도 많이 퇴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현상은 아니말 라보란스가 됐음을 직장인들이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만을 충족시켜준다면 좋은 직장이 되지 못합니다. 정서적인 부분, 일이 정말 좋아서 하는 그런 직업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서적인 부분만을 충족시켜 주는 직장도 좋은 직장은 아닙니다. 오늘날 열정노동이라 불리는 부작용이 등장했습니다.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서만 머물던 열정은 산업의 내부로, 노동으로 유입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열정노동이라는 새로운 노동윤리를 가져 왔습니다. 이 새로운 윤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가 아니며, 그러므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정노동의 명분을 통해 자본주의는 청춘들에게 꿈을 꾸라고 강요하고, 열정이라는 미명 하에 그 꿈을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열정노동은 일은 더 열심히 시키면서도 돈은 더 적게 줄 수 있는 최적화된 착취를 가능케 합니다. 때문에 정서적인 부분과 물질적인 부분을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직장을 만드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화운동과 복지사회로의 전환은 직장의 물질적인 부분을 상당수 개선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부분의 개선도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현재 더 시급한 과제는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일, 즉 천직을 찾는 일입니다. 천직을 찾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관련된 기술을 익히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느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그냥 일하고 살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값어치 있는, 천금보다 비싼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바로 자신의 진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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