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시력검사를 하러 온 학생에게 안과 의사가 말합니다. "앉아서 토끼뜀을 열 번 뛰어봐요." 학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토끼뜀을 하기 시작합니다.

EBS 다큐프라임『인간의 두 얼굴』에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심리학의 고전적 실험 결과를 재확인해 줍니다. 밀그램을 비롯해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확인한 사실은 권위나 지식, 상황과 같은 요소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이 의사의 명령에 복종한 것은 의사가 권위 있는 존재, 믿을 만한 존재라는 생각이 심리의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명의 의사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꿀만한 믿음을 줄 수 있는데, 하물며 더 거대한 존재, 더 믿음직한 존재 앞에서 사람이 믿음을 보낼망정 의심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자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가 말하는 사람이 의심하기 힘든 거대한 존재들은 바로 ~ism, ~주의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프랑스혁명, 계몽, 이성, 과학.. 근대의 등장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이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종교의 몰락, 이른바 세속화는 이뤄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현재는 종교의 부흥기라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저자들이 말하는 종교는 중세식의 그런 종교는 아닙니다. 종교는 변화했지만 몰락하지는 않았습니다. 근대가 가져온 것은 다원성이었습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도시화, 세계화가 이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 가치관, 생활 방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터키 음식을 먹고 일본 만화를 보고 미국 드라마를 보며 인도 춤을 추고 이집트인과 연애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근대화의 다원성은 상대화를 가져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을 접하면서 뭔가 절대적이라 믿던 믿음이 약화되고, 소멸됩니다. 몇백년, 심지어는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이 땅에서 금발 머리나 검은 피부의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절대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런 경향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지오염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 솔로로 살아도 되고, 동성애자가 되도 되고, 원하는 종교를 아무거나 믿어도 되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도 되고, 아나키스트가 되도 됩니다.

다원성, 상대화는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상대화 현상을 과도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은 인지과정에 상당한 부하를 가져옵니다. 이런 심리를 에리히 프롬은《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잘 묘사한 바 있습니다. 저자들이 언급한 것처럼, 전체주의 운동은 자유가 주는 부담에서 도피하려는 시도이며, 일종의 해방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라는대로,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사는 삶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편합니다. 반대로 상대화 현상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상대화는 두 가지의 ~주의를 탄생시킵니다.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입니다.

 

모든 상대주의에는 절대의 재래를 기다리는 광신이 있으며, 모든 광신에는 모든 절대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는 상대주의가 있다. - p.77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유일하고 보편적으로 옳은 윤리 체계란 없습니다. 실재의 부재는 푸코의 데리다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발전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 체계 안에서 지식을 전달하는 기제가 권력을 차지하려는 투쟁의 수단이기 때문에 객관성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담론의 존재를 긍정합니다. 문제는 상대주의의 인식론이 현실의 사실을 찾아내는 일을 어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화 효과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근본주의의 문제는 전체 사회를 손에 넣고 자신들의 신조를 모든 구성원에게 당연시되는 상황을 꿈꾼다는 점입니다. 여성의 사회적 약진에 적응하지 못하고 남자가 모든 권력을 쥐었던 과거를 꿈꾸는 사람들이나 경전에 씌여있는대로 생활하는 종교인 등 우리 사회 주변에서 근본주의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현대의 사람들이 손쉽게 상대주의나 근본주의를 접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 두가지 주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헌신과 숭배 그 자체이며 새로운 시대의 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과거 종교로 대표되는 닫힌 사회가 의심을 불허하는 사회였다면, 이 두가지 입장 역시 어느 쪽도 의심 때문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두 입장이 지닌 확실성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주지만 동시에 의심의 종말을 이끌어냅니다. 문제는 의심의 종말이 민주주의의 종말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의심이 없는 한 민주주의도 없다. 절대적인 진리가 모든 형태의 전제정치의 핵심인 것처럼. 제도적 저항, 다당제, 대안 세력, 민주정치 체제의 핵심에 의심이 없다면 무엇이 있겠는가? 의심이 최종적이고 절대적으로 침묵한다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종말에 이를 것이다. 더 이상 논쟁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민주주의가 뭐가 필요한가? -p.170 

우리는 의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의심은 취약하고 위태롭습니다.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의심을 보호하고 제도화해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민주주의를 의심할지라도. 이는 하나의 역설이지만, 의심을 보호하기 위해선 헌법국가와 민주적 체제가 의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순성이야말로 민주주의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찬양 중 하나입니다. 의심은 정치적, 사회문화적 요새를 필요로 하며 자유와 인권에 대한 헌법적 보호막을 갖추고 존립할 때, 인지적이고 도덕적인 의심이 가장 보호된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그런 의심을 바탕으로 파괴적인 근본주의와 급진적인 상대주의의 사이에서 어렵고 위태로운 줄타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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