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박근혜 정부를 대표하는 단어를 하나 고른다면, '창조경제'가 아닐까 합니다. 국정 핵심 키워드로 '창조경제'를 제창한 이래, 미디어나 사회 곳곳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창조경제'란 무엇입니까?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창조創造에 경제가 붙었으니 경제를 발명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이 단어가 등장한 이래 창조경제를 둘러싸고 각양각색의 해석과 적용 사례가 나오고 있어 과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과학고를 설립할때도 창조경제, 스크린골프를 만들때도 창조경제, 층간소음 해결을 위해서도 창조경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세계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한국인 가수 싸이나 그가 지원군으로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넛잡'이 디즈니의 '겨울왕국'과 대결을 하는것도 창조경제라고 합니다. 창조경제의 정의定義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화하는 언어는 사회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에리히 프롬은《소유냐 삶이냐》에서 사회의 변화를 언어의 변화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개인적 자유의 보장이라는 위대한 약속으로 시작한 산업시대가 낳은 무한소비의 시대는 '존재양식' 과 '소유양식' 중 사람들에게 소유양식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언어 역시 변화함으로써 대응하고 있는데, 산업시대에 진입한 이래 사람들의 언어에서 명사의 사용은 증가하는 반면, 동사의 사용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다'는 단어를 과거엔 동사로 표현했지만, 현재는 명사로 표현합니다. 언어는 변화하고, 정의定義도 변화합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주목하고자 하는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언어를 어떻게 정의定義할 것인가? 한 사람의 언어를 정의定義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정의定義하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아사히신문에 연재했던 이 에세이는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정의定義인 것입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다양한 언어를 보여주고, 그것의 정의定義를 고민하게 합니다. 정치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도의적이란 표현을 영어moral로 대체하고 윤리적 상상력moral imagination으로 해석한다면 어떨까, 교육에 있어서 배운 것을 되돌리다unlearn과 다시 가르치다unteach란 무엇일까?

그의 정의定義에 관한 문답이 인상적인 것은 그것이 그의 정의正義에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1970년에《오키나와 노트》를 썼는데, 이 책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에서 정부가 섬 주민들에게 강요한 집단 자결에 대한 논평이 들어 있습니다. 이 비극에 대해 일본사교과서는 집단자결이 '내몰리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문장에서 주어를 감추고 수동태 문장을 만들어 앞뒤를 맞춤으로써 문장의 의미, 그 사건의 책임에 대한 부분을 모호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교과서의 정의定義에 대해 오에 겐자부로는 반대의견을 피력했고, 결국 새역모 등의 단체들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져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정신, 사상으로 끝까지 살아가는 거다. 봉건적인 것, 광신적인 것, 배외주의는 모두 패배한다. 자연의, 인류의 법리는 반드시 이긴다. Vive l'humanite.' 저의 번역이라면, 마지막 말은 '인간다움 만세' - p.314 

핵무기의 '억지력'이 상대를 위협하여 물러가게 한다는 동사에서 나온 말에서 그 폭력적인 어감이 어떻게 이성적이고 안정성이 느껴지는 언어로 치환하게 되었는가, 나라에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깨끗한 죽음일 수 있는가,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언어의 정체는 무엇인가. 오에 겐자부로는 오키나와 문제 뿐만 아니라 반전활동, 탈핵운동 등 여러 사회활동을 하면서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정의定義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의 문제의식은 일본사회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우리나라'라는 언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나라'의 '우리'는 누구인가?

언어는 사회를 만들고, 사회는 언어를 만듭니다. 어떤 사회를 만드느냐는 곧 어떤 언어를 만드느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만듭니다. 그 의견중에 불의로운 것, 비인간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우리 사회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장애인을 차별하고, 동성애자들을 괴롭히고, 외국인을 멸시하고,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을까? 이 시대, 이 사회의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오에 겐자부로는 정의定義로 시작해 언어로써 투쟁하라고 말합니다. 4년 전 우리사회에 열풍을 가져온 마이클 샌델의《정의正義란 무엇인가》에 이어 오에 겐자부로의《말의 정의定義》는 다시금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책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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