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 인식은 과거를 구명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내 손안에 썸씽 클래식 Something Classic
에드워드 H. 카 지음, 서상원 편역 / 스마트북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1961년, 카는 세상을 향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거론하였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열린 트리벨리언 강연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여러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했다. 카의 강연은 영국 BBC 라디오에서 방송된 후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전 세계적으로 약 25만부 이상 판매되었다. 카는 역사와 연대기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역사'는 과거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이며, 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설명하는 작업이다. 반면에 '연대기'는 사건들을 상호 연결시키지 않고 단순히 목록화하는 것이다. 연대기 작가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데 만족하지만 역사가는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을 일으킨 과정이나 그 사건이 끼친 영향까지도 설명해야만 한다. 물론 카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확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역사가의 중요한 작업 중의 하나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것은 역사가의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역사가의 작업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 작업을 바탕으로 해석과 설명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카의 관점으로 보면 역사가는 연구 조사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자세를 갖춰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연대기 작가에게 사실이란 과거에 발생한 그 무엇이지만 역사가에게는 어떤 과거 사실을 역사 서술과정에서 선택하고 사용할 때에만 비로소 그 사실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는 역사학자의 임무는 단순히 과거에 누가 무엇을 왜 했는가를 살펴보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카는 역사가란 역사 속에서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추진력, 즉 경제적 변화와 산업화, 계급 형성과 계급 갈등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추진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는 마르크스주의적 관념이나 맑스 베버적 패러다임, 사회학적 관념 등 오늘날 활용되고 있는 다양한 이론들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카는 연구 과정에서 이러한 이론들을 다양하게 변용해서 이용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전체적으로 폐기해야만 할 때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론의 도움을 받든, 받지 않든 역사가의 핵심적인 과제는 과거의 패턴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카는 이러한 작업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일에 도움이 될 때에만 과거에 관심을 가졌다. 카는 역사를 우연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혹은 위대한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구현해 나간다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우연한 사건과 원인은 역사적 흐름에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영향만을 줄 뿐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경향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왜 했는지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 변화는 누구도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카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경향이 역사가가 속한 사회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때 '역사가'들은 '연대기 작가'들과 달리 그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가 30년 이상 연구한 러시아 혁명을 우리가 연구할 때, 우리의 관심사는 카가 관심을 가졌던 혁명적 갈등의 드라마나 차르 체제, 자유주의, 민주사회주의, 아나키즘 같은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못한 역사의 추동력에 관한 관념과 행동의 문제가 아니다. 또 소련 공산주의의 또 다른 대안들이 왜 그렇게 쉽게 실패했는지의 문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오늘날 우리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역사가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 그들이 구체화시킨 이념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획경제 이념이 어떻게 그들의 사고와 정책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카가 이와 같은 관점을 갖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역사가로서 특이한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 이론 분야에서 역사학도들이 가장 많이 읽을 정도로 비중 높은 책이었지만, 카는 어느 대학 사학과에서도 교수직을 맡지 않았으며, 학술단체의 역사 분야 석좌를 차지하지도 않았다. 카는 고전을 연구했으며, 20년 간 영국 외교부에서 일했고, 국제관계를 강의했으며, 런던〈타임〉지 직원으로 근무했다.

사실 요즘에는 국제관계 분야에서 쌓은 그의 업적이 역사 이론분야에서 진행한 연구보다 훨씬 더 높게 평가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특이한 배경 때문에 카는 역사와 역사 연구에 대한 도구주의적 관점을 갖게 되었다. 대다수 공무원들처럼 카는 정책 결정에 기여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또 그는 사건을 주도할 만한 권력이나 조직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 즉 대다수 과거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평가들이 지적하듯이 카는 전적으로 주요 집단들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는 정부와 권력자들의 행동들을 쉽게 동일시했고, 어떤 일이 발생했든 그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외교부 관리로서 현재의 국제 정치 상황을 다루어야 했으므로 과거에 일어났을 법한 일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카는《역사란 무엇인가?》를 저술할 당시 1960년 무렵에는 역사의 무대에 막 출현한 급진적인 학생 세대, 즉 전후 베이비 붐 세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시대에 있었던 교육 기회의 확대와 경제적 번영,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적 해방을 활용하였다. 그 세대는 역사가 현재를 설명해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혁명과 혁명가들, 폭동과 반란자들, 노동운동, 파업과 데모, 급진파와 반항아들은 당대의 폭압적인 권위주의와 구태의연한 관행에 저항한 사람들로서, 1960년대의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발굴하고 구명해야만 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중요한 인물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오늘날 그들의 사상이 가진 영향력과 그 사상이 미래를 위해 내건 승리의 약속을 감안하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산업사회 이전의 원시적인 반란자들은 원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항자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는데, 그들의 반항은 비록 뚜렷한 목적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지향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은 서유럽과 미국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잔존해 있던 차별을 일소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카는 1960년대 초 전통적인 대학이 여전히 답습하고 있던 영국사회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폭넓은 기초 위에서 역사를 연구, 교육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예를 들면 서구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계획경제를 주장한 러시아와 중국의 역사, 더 나아가 식민 지배에서 갓 해방된 제3세계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의 이런 주장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사가들 사이에 격렬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으며, 마침내 5년 후 학부 역사 교육과정이 카의 주장대로 개혁되었다. 영국과 유럽의 테두리를 벗어난 역사를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카의 주장은 역사학과 사회학 간의 더 많은 지적 교류, 더 많은 사회사 연구, 더 많은 저술과 교육 활동을 호소한 다른 주장과 함께《역사란 무엇인가?》에 반영되었으며, 1960년대의 학생 세대와 당시 많은 젊은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역사가들이란 그들이 속한 시대의 산물이라고 카는 생각했다. 역사는 개별적인 역사가들이 과거에 대해 저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사회가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다른 사회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품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항상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 또한 왜 자기들이 역사를 저술하고 있으며 자기들의 작업이 사회에서 어떻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 메시지를 가슴 깊이 간직한 젊은 역사가들은 자기들이 유용하고 의미 있는 중대한 일을 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업적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고, 자기들의 발견과 주장이 사회의 관심사를 대변할 뿐 아니라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 포이어바흐 

카는 역사가 본질적으로 문학적 탐구가 아닌 과학적 탐구 영역이기 때문에 영향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입증하는 기준과 절차는 과학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카가 역사가의 중요한 도구(수단)라고 여긴 역사 흐름과 규칙성은 과학 법칙을 적용해 한층 분명하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다. 객관적 역사가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과거의 인물, 제도, 사건들이 역사 흐름에 공헌한 정도에 따라 그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역사는 과거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며 거대한 역사적 추동력과 장기적인 발전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해야 한다. 아울러 사회 이론과 계량화, 사회과학의 다른 도구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결정을 내리도록 확고한 지식 기반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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