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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개정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평점 :
선진공업국들의 자원 소비를 90% 감소시킬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래 세대는 큰 생명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 지구환경전망 2000, 유엔환경계획
불경기로부터 조금 부활하기 시작했다. 8월 기업체의 전력 소비량이 전년도 대비 2.6% 많아졌다. - 지구환경전망 2000 다음 페이지 경제면 기사
저자 더글라스 러미스는 이 두가지 기사가 공존하는 신문을 제시하며 묻습니다. 우리는 비즈니스나 정치의 세계는 현실주의적이라 인식하지만, 자연파괴, 온난화, 사막화, 빈부격차, 기아사태 등을 거론하고 그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논하는 것은 비상식, 비현실주의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냐고 묻습니다. 과연 현실주의란 무엇인가? 어떤 현실주의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냉전 종식 이후 전쟁의 공포가 줄어들거란 기대에 대한 현실, 선진공업국 정치가들이 말하는 경제해법에 대한 현실을 바로 보고 역사와 역사가 만든 현상을 인식한 토대 위에서 어떤 미래를 만들어나가야 할지 판단하는 것이 현실주의라고 말합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근대국가의 개념은 국가를 정치의 단위로 해서, 주권, 교전권, 군사력을 부여하면 사회질서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주리라는 기대 하에 성립됬습니다. 그 결과 국가는 경찰권, 처벌권, 교전권이라 불리는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세계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이런 국가의 폭력은 폭력으로 느껴지지 않는 마법같은 효과를 발휘하는데, 테러리스트가 레스토랑에 폭탄을 던져 5, 6명의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뉴스로 접하는것과, 군대가 폭격을 가한 뉴스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논리는 홉스의 말처럼 국가는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며, 개인의 폭력의 권리를 정부에게 넘겨주면, 정부는 대신해서 사회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이런 정당한 폭력을 정부가 행사한 결과, 두가지의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체 지구의 인구가 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가장 폭력에 의해 살해된 사람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 가장 많이 사람을 죽인 주체는 다름아닌 국가라는 점입니다.
상대 나라 사람이 몇명이 죽던 자국민만 보호하면 되지 않냐는 주장을 할수 있겠지만, 국가의 폭력이 향한 곳은 상대방의 국민이 아닌 자국민이 더 많다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럼멜이 쓴 '정부에 의한 죽음' 에 의하면 100년간 국가에 의해서 살해된 인간의 수는 2억명이며, 자국민 살해의 경우 1억 3천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해된 사람의 대다수는 민간인입니다. 럼멜의 책에서는 전체주의 국가, 권위주의 국가의 경우 민간인 살해가 대다수를 이르고 전체 살해 비중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망자가 나는 대의 민주주의 정부의 장점이 되며 민주화 운동의 대의명분이 된다는 점도 제시합니다. 하지만 대의 민주주의 정부 또한 국민이 죽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안전보장이 가능하며, 그러한 군사력을 꾸준히 증강하는것이 현실주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은 시기는 정부가 가장 큰 군사력을 가졌던 시기이며 그런 것을 피하기 위해서 꾸준한 감축정책이 더 현실주의적이지 않냐고 묻습니다.
저자는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민족주의 등과 같은 것이 아닌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라고 말합니다. 이 경제발전 사상은 거의 모든 사상에서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상은 1949년 트루먼의 취임 연설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사용된 발전 이라는 언어는 그 이전의 발전 이라는 뜻과 변화되어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특이한 점은 발전을 하는 나라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라는 점입니다. 대부분 식민지에서 막 해방된, 혹은 아직 식민지 상태인 나라들이였습니다. 전쟁 이후 미국은 투자할 장소가 필요했고, 발전되지 못한, 발전이 필요한, 투자가 가능하고 쉬우면서 이익이 꼭 돌아와야 하는 경제시장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발전을 당해야 할 장소는 미개발 국가라고 부르게 되며 자동적으로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모든 문화, 민족, 사회, 경제제도를 총칭합니다.
미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수요는 적고, 화폐경제에도 길이 들어있지 않고, 또 뼈가 휠 정도의 장시간 노동을 하는 습관도 없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온 사업가를 위해 일하려고 하지 않는것이 보통이었다. - p.72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식민지에서의 사회 기간시설은 강제노동으로 시작하는데, 때로는 총과 칼로, 때로는 세금제도로, 때로는 자급자족하는 자연을 파괴함으로서 이루어집니다. 그런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의 파괴, 슬럼의 형성 등과 같은 부작용이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풍요로워질수 있을 거라는 약속, 빈부격차는 계속되겠지만 빈곤한 사람도 어느정도 먹고살수 있는 빈곤의 합리화 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모두가 빈곤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일인당 에너지 소비를 세계 전역으로 동등하게 계산한다면 지구가 다섯개가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 적도 있습니다.
저자는 빈곤을 네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먹을것이 부족하고, 약이 모자르고, 입을 옷이 없고,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굶어죽는 그런 빈곤입니다. 둘째는, 전통사회의 빈곤입니다. 자급자족하며 가진것이 많지는 않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고 사는 빈곤입니다. 셋째는 빈부격차에 따라 부자의 전제가 되어있는 빈곤층입니다. 사회 안에 있는 한 부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고 부자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넷째는 기술발달에 따라 제품의 차이에 따라 생기는 빈곤입니다. 과거엔 TV, 자동차와 같은 제품은 전혀 생활에 필요가 없었지만, 현재는 그런 제품이 없다면 생활 자체가 힘들어지는 빈곤입니다. 20세기의 경제발전은 이 네가지의 빈곤 중에 두번째를 세번째나 네번째로 고쳐 만드는 과정이며, 이런 빈곤은 경제발전으론 해소되지 않습니다. 끝없는 발전은 결국 그 차이를 극복해낼 수 없으며 언젠가는 자연의 한계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성장이 곧 멈추게 됨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더이상 자연이 파괴되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제로성장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더 많이 소비하는 사회에서 덜 소비하는 사회로, 물질적 풍요에서 마음의 풍요를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가장 파괴된 자연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이 발전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우울하고 무력한 사람들이 늘고, 젊은이들이 길거리를 방황하며 발전이 가져다준 병과 폭력이 만연합니다. 이것이 과연 경제성장이 참다운 의미로서 풍요, 쾌락, 행복과 관계가 있는지 저자는 묻습니다. 소비에 따른 행복이 아닌 인간 본연이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CD를 사서 노래를 듣는것보다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이 더 즐겁고, 남의 춤을 보는것보다 직접 추는것이 즐겁고, TV의 이야기를 즐기기보단 다른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더 즐겁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